#24 모스크바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운 좋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생부 종합 전형을 준비했던 난 자기소개서와 더불어 ‘생활기록부 관리’라는 것을 해야 했다. 2024년인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무엇이든 간에 꾸준, 일관되게 발전시켜 온 걸 어필하는 게 일종의 정석 루트(?)였는데, 이 때문에 모 드라마처럼 컨설팅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다행히 예전부터 한 학과만 생각하고 있었던 덕에(여기가 아닌 것이 비극) 다행히도 인위적으로 꾸며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딱 하나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독서 활동.
내 독서란엔 ‘이 정도면 나름 많은데?’싶은 정도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당연히도 다 직접 읽은 책들만 넣었으니 면접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할 말도 많았다. 그런데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 관련 서적들이 마치 구색을 맞추려는 것처럼 몇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괜히 머쓱했다. 대부분이 지금 쓰고 있는 이런 여행기였다. 모든 대륙이 다 있었던 건 당연했고, 포토에세이부터 가이드북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지금보다도 더 내성적이었던 학생시절에도 학교 밖이 더 궁금해서 3년 간 점심시간에 한두 권씩 읽던 게 생기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내성적이라고 해서 꼭 집돌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렇게 난 학교 도서관에 딱 한 면뿐이었던 여행서적들을 전부 다 읽고 졸업했다. 살면서 특별한 목적 없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기록으로 남는 일이 잘 없는 걸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큰 도움이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뿌듯한 기억으로 남았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운 좋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사실 이게 참 애매한 표현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여행기엔 운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날씨도, 사람도, 풍경도 기가 막히게 좋아서? 물론 그런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넘어지고, 다치고, 소매치기당하고, 기타 등등 오만가지 안 좋은 일을 겪은 사람들도 에필로그에 와서는 ‘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것도 다 경험이고, 추억이고, 새로운 기회였다면서.
첫, 장기, 해외, 배낭여행에서 난 운 좋은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랬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아직까지도 근황을 주고받고 있고, 열차 화장실에 온갖 게 다 들어있는 힙색을 두고 왔을 땐 덩치 큰 아저씨가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덜렁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뿐인데 플랫폼에서부터 도시 전체가 들썩들썩하고 있었다. 2018년 9월의 첫 번째 토요일.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이었다.
처음엔 얼마나 대단하겠냐고 생각했다. 서울의 날! 이라거나 부산의 날!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 일단 하루가 아니었다. 생‘일’이라면서 일주일 내내 축제였고,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모스크바 내 웬만한 박물관은 다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곳곳에서 그 큰 도로를 통제하면서까지 큰 행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모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금토일이 내 일정과 정확히 겹쳐버렸다. 여행 내내 ‘우리나라를 공부해 줘서 고맙고, 직접 온 것도 정말 환영해!’라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이젠 모스크바 전체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밤, 무려 붉은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보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저녁도 거르고 허겁지겁 도착했는데 그 넓은 광장에 사람이 꽉 차있었다. 러시아 분들이 대부분 나보다 키가 컸던 탓에 바실리 성당의 꼭대기만 보면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여기가 더 나을 걸?’하며 자리를 바꿔주셨다(끝나고 스빠씨바! 했더니 웃어주셨다). 대체 어디까지 운이 좋을 수 있는지 시험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불꽃이 터지던 그 10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괜히 또 감동해서 울까 봐, 이번엔 정말 크게 웃기로 했다는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이 운과 재수를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불꽃놀이를 찍은 영상엔 사진에 정수리만 나온 어린아이가 “끄라씨바(예쁘다)!”라며 수줍게 웃는 게 녹음되어 있었다. 그렇다. 너무 예쁜 밤이었고, 모든 게 고마운 밤이었다. 이런 기회가 나에게 온 것도 고맙고, 이런 순간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전을 한 나 자신에게도 고마웠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라는 표어에 걸맞은 규모의 공연이 말 그대로 도시 전체에서 진행되었다. 붉은 광장 일대의 도로는 싹! 다! 인도로 개방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현존하는 모든 예술 장르를 본 것 같다. 팝, 락, 오페라, 뮤지컬, 클래식, 발레, 전통음악, 퍼레이드까지! 나는 그 압도적인 분위기를 겨우 감당해 낼 뿐이었다. 길거리에서 '백조의 호수'를 버스킹처럼 볼 수 있는 나라?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야외무대에서 곡예 서커스를 볼 수 있는 나라? 러시아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막막했고, 무서웠던 첫 배낭여행의 클라이맥스였다. 예전부터 국어 선생님들은 '좋다'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쓰도록 하셨다. 좋다는 건 너무 단순하면서도 폐쇄적인 표현이니까. 근데 그 상황은 그냥 '좋았다'. 좋다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을 떠올리다가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으스댈 줄만 알았던 모스크바에서 고생했다고, 그래도 잘 왔다는 위로를 듣게 되다니. 내가 바로 그 운 좋은 여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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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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