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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Jul 09. 2024

지방사람은 서울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5 모스크바 3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모스크바 어딜 가더라도 눈에 띄었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의 금색 돔. 최근에 지은 덕에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boybeen


지금이야 서울에서 1년쯤 지냈다고 꽤 익숙해진 것 같다고 혼자서 으스대곤 하지만, 일평생 서울을 한 번 가려면 큰 결심이 필요한 거리에서 살아온 나는 KTX 창문 밖으로 63 빌딩이 보일 때쯤이면 왠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대한민국의 절반이 살아가는 이 도시는 너무 크고 거대해서 볼 것도, 할 것도 너무 많고, 그래서 사람도 너무 많으니까. 스물, 스물하나의 난 부산행 밤기차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을 안고 또 한 번의 서울을 매듭짓곤 했다. 나름대로 알찬 일정으로 다녀왔고, 실상은 서울을 딱히 동경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걸까. 무슨 외국도 아니고, 올 일이야 얼마든지 있는데 어린 날의 나에게 서울은 그런 도시였다.


그래서 오히려 모스크바 여행 일정을 짤 때는 최대한 힘을 빼고 싶었다. 무려 871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럽 최대의 도시, 서울의 4배 면적에 1,270만 명이 살아가는 그 도시를 4일 만에 이해하려는 건 욕심이 분명하니까. ‘모스크바 여ㅎ’라고만 쳐도 온갖 화려한 후기들이 쏟아져 나와서 꽤나 주눅 들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돌아가는 게 맞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공자라면 분명 또 오게 될 테니(실제로 그랬다) 욕심내지 말 것. 본전 생각을 버리고, 할 일 없는 모스코비치*처럼 돌아다녀 볼 것. 그렇게 나만의 모스크바 여행을 꿈꿨다.

* 모스코비치 : 파리의 '파리지앵'처럼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


모스크바의 날 축제의 일환으로 성가대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전역을 다녔지만 종교의례를 보지는 못 했어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boybeen
소련 대혁명 시절 폭파된 후, 세계 최대의 노천수영장이 되었다가, 2,000년에 온전히 복원되었다. 관광객 입장에선 현대식 건물인 덕에 쾌적하고 깔끔해서 좋았다. ⓒboybeen
모스크바의 풍경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화려한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서 좋았다. 어쩌면 굴곡진 역사가 켜켜이 쌓인 디오라마일 수도 있겠다. ⓒboybeen


최대한 대충 짜겠다는 각오로 엑셀 파일을 열고 붉은 광장이라는 네 글자를 매일 밤마다 입력했다. 참새 언덕이나 신시가지 등 모스크바에 야경 끝내주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지만, 왠지 붉은 광장은 하루라도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러시아의 상징 같은 공간이니까, 광화문 광장을 전 일정에 넣은 외국인 관광객도 있지 않겠냐는 핑계를 떠올려 보았던 것 같다. 나 혼자 가는 나만의 여행이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대상이 없는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일단 이렇게 적고 상황 봐서 바꾸자고 대충 넘겼는데, 그런 일이 없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좋았던 것 같다. 내 여행이니, 나한테만 만족스러우면 성공이었다.


모스크바의 두 번째 날엔 붉은 광장의 오른편에 보이는 그 붉은 성벽, 크레믈 안으로 들어갔다. 크레믈이야 성벽을 뜻하는 일반 명사인 만큼 러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이 여행기에도 여러 번 등장), 첫 글자가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다면 모스크바 크레믈을 뜻한다. 소련 시절엔 공산당의 본부가 있었고, 냉전 시절엔 백악관과 정치적인 대립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무려 푸틴이 출퇴근을 하고 있는. 이 모든 역사, 후술 할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한.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겐 ‘몇 시간을 줄을 섰다더라’ 하는 무서운 후기들만 가득한. 그렇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 역시도 한 여름 아침 땡볕에 얌전히 서서 1시간가량을 서 있다가 2만 원 남짓한 티켓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노을을 품은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러시아의 넓은 하늘에 역동적으로 퍼져가던 구름을 보정 과정에서 강조해보고 싶었다. ⓒboybeen
모스크바는 유독 핑크빛 노을이 오래가는 도시였다. LA나 뉴욕만큼이나 로맨틱한 모스크바의 노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궁금해졌다. ⓒboybeen
이 풍경을 보며 여행 초기에 비해 꽤나 선선해진 날씨가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기후도, 시간도 다른 이곳에 오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boybeen


대통령 관저가 있는 장소인 만큼 보안이 삼엄했다. 짐 검사는 물론이고 공항에서나 볼 법한 X레이 검색대도 통과해야 했다. 물론 나는 전혀 의심스럽지 않게 생긴 작고 마른 학생이었으니 빠르게 통과될 수 있었다. 크레믈 내부에는 박물관이나 종교 건물뿐만 아니라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보안 경비 구역이 다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 동선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인솔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관광객이 없어 보이는 곳은 그 이유가 있는 듯 그 근처로 가던 사람들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크레믈에서 가장 특이했던 건 한 박물관의 이름이었다. 무기고(Armoury Chamber). 가이드북에 적힌 성당 지구(Cathedral complex)와 다이아몬드 박물관(Diamond Fund)까지도 꽤나 직설적인 네이밍을 갖고 있었던 덕에 직관적으로 비교되어서 괜히 더 특별해 보였다. 처음엔 이름만 보고 일평생 군사지식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시원하게 넘기려 했는데, 어느 후기를 봐도 극찬이 자자했다. 알고 보니 무기가 아니라 러시아 황실의 보물을 싹 모아 놓은 박물관이었던 것(직접 확인해보니 2개 방 정도는 무기가 전시되어 있기는 했음). 이럴 거면 왜 굳이 무기고라는 이름을 지은 걸까?


대체 얼마나 대단하겠냐며 괜한 심술을 괜히 가지고 무기고로 직행한 나는 거의 6시간을 넘게 나오지 못했다. 사진 촬영이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녔더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여길 나중에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오래 했었는데 딱 게임에서 ‘그럼 아끼는 보물 중에서 하날 골라봐라’하며 보여주는 어려운 퀘스트 보상 아이템 같았다. 그만큼 엄청 화려했고, 심지어 하나하나마다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복학 후 ‘러시아 역사’ 과목을 수강하며 ‘이거 무기고에서 본 거잖아?’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 이제 성당지구도 구경하면 되겠다고 하며 나왔더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내려오시며 ‘크레믈 닫았어(Кремль закрыт)’하면서 껄껄 웃으셨다. 결국 난 700 루블짜리 성당지구 입장권을 기념품으로만 가져야 했다.


무기고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쓴 탓에 크레믈 폐장에 맞춰 나와 앉아서 쉬었던 계단. 이때처럼 열정적으로 무언갈 관람할 일이 있을까 싶기도. ⓒboybeen


일정 전체가 모스크바의 날 축제와 정확히 겹쳐 있었던 덕에 문학 박물관 투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여행 제목이 노문과 자퇴 어쩌고이기 때문에 웬 문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자퇴를 결정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테마였다. ‘노어’ 전공이 아닌 ‘노어노문’ 전공으로서, 실제로 문학사 학위를 받게 될 운명인 만큼 내가 문학을 계속 좋아할 자신이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 그래서 작품도 꽤나 읽어본 네 작가들의 박물관*을 일정에 넣었고, 무엇을 보며 무슨 생각으로 펜을 쥐었는지 느껴보고 싶어 생가를 위주로 둘러보았다.

* 도스토옙스키(죄와 벌···), 톨스토이(전쟁과 평화···), 푸시킨(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고골(코···)


그래서 좋아할 자신이 생겼냐면 그건 잘 모르겠다. 갑자기 그 긴 러시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짧게 느껴지거나, 장편이 단편처럼 호로록 읽힐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게 되더라도 많은 문학 전공자들이 그러하듯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이 나라에서만큼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모스크바의 날 덕에 대부분의 문학 박물관들이 무료로 개방되었을 때, ‘나야 관광객이니 표 값이 굳어서 좋은데, 이런 델 누가 올까?’하던 날 비웃기라도 하듯 현지인들은 박물관 밖 도로에까지 줄을 서고 있었으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빈민 구제를 위해 일했던 마린스키 병원.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지만 병원 인테리어 특유의 긴장감이 있어 매력적이었다. ⓒboybeen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은 우측 노란색 건물 표지판에 적힌 것처럼 '도스토옙스키 거리'에 있다. ⓒboybeen
톨스토이가 거주했던 집 박물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던 마당에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대문호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도 이랬을까? ⓒboy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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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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