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ybeen Jun 09. 2024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4 모스크바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내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boybeen
지금까지도 배경화면으로 쓰고 있다. 아마 평생토록 내가 찍은 사진들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일 것 같다. ⓒboybee


운 좋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생부 종합 전형을 준비했던 난 자기소개서와 더불어 ‘생활기록부 관리’라는 것을 해야 했다. 2024년인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무엇이든 간에 꾸준, 일관되게 발전시켜 온 걸 어필하는 게 일종의 정석 루트(?)였는데, 이 때문에 모 드라마처럼 컨설팅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다행히 예전부터 한 학과만 생각하고 있었던 덕에(여기가 아닌 것이 비극) 다행히도 인위적으로 꾸며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딱 하나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독서 활동.


내 독서란엔 ‘이 정도면 나름 많은데?’싶은 정도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당연히도 다 직접 읽은 책들만 넣었으니 면접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할 말도 많았다. 그런데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 관련 서적들이 마치 구색을 맞추려는 것처럼 몇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괜히 머쓱했다. 대부분이 지금 쓰고 있는 이런 여행기였다. 모든 대륙이 다 있었던 건 당연했고, 포토에세이부터 가이드북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모스크바 박물관 앞에 펼쳐진 좌판들. 지역의 유명한 식당들인 것 같았는데, 고려인 사장님이 김치만두를 팔고 계셔서 조금 비쌌지만 기분에 하나 사 먹었다. ⓒboybeen
고리키 공원에 세워진 무대. 디제잉이 한참이었는데, 뒤로는 무려 '삼성 갤럭시' 체험 부스가 더 크게 펼쳐져 있었다. 괜히 반가운 기분에 기웃거렸다. ⓒboybeen


지금보다도 더 내성적이었던 학생시절에도 학교 밖이 더 궁금해서 3년 간 점심시간에 한두 권씩 읽던 게 생기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내성적이라고 해서 꼭 집돌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렇게 난 학교 도서관에 딱 한 면뿐이었던 여행서적들을 전부 다 읽고 졸업했다. 살면서 특별한 목적 없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기록으로 남는 일이 잘 없는 걸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큰 도움이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뿌듯한 기억으로 남았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운 좋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사실 이게 참 애매한 표현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여행기엔 운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날씨도, 사람도, 풍경도 기가 막히게 좋아서? 물론 그런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넘어지고, 다치고, 소매치기당하고, 기타 등등 오만가지 안 좋은 일을 겪은 사람들도 에필로그에 와서는 ‘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것도 다 경험이고, 추억이고, 새로운 기회였다면서.


다리 위에서 바라본 고리키 공원. 왼쪽 입구 앞에 레이즈(감자칩) 부스가 귀여웠다. 단순한 지역 축제라고 하기엔 기업 후원도 많았고, 시민들의 참여도 굉장했다. ⓒboybeen
모스크바에 머물렀던 4일 내내 이런 핑크색 노을이 펼쳐졌다.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고, 사람들은 친절했고, 바람은 기분을 딱 좋게 할 만큼 선선했다.  ⓒboybeen
핑크색에서 보라색으로 하늘이 짙어질수록, 오늘 밤엔 또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되곤 했다. 지금까지도 내게 모스크바는 그런 도시로 남아 있다. ⓒboybeen


첫, 장기, 해외, 배낭여행에서 난 운 좋은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랬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아직까지도 근황을 주고받고 있고, 열차 화장실에 온갖 게 다 들어있는 힙색을 두고 왔을 땐 덩치 큰 아저씨가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덜렁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뿐인데 플랫폼에서부터 도시 전체가 들썩들썩하고 있었다. 2018년 9월의 첫 번째 토요일.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이었다.


처음엔 얼마나 대단하겠냐고 생각했다. 서울의 날! 이라거나 부산의 날!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 일단 하루가 아니었다. 생‘일’이라면서 일주일 내내 축제였고,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모스크바 내 웬만한 박물관은 다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곳곳에서 그 큰 도로를 통제하면서까지 큰 행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모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금토일이 내 일정과 정확히 겹쳐버렸다. 여행 내내 ‘우리나라를 공부해 줘서 고맙고, 직접 온 것도 정말 환영해!’라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이젠 모스크바 전체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붉은 광장 뒤편의 야외무대. 브라스 세션이 좋았는데, 이름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 꽤 유명한 밴드인 것 같았다. 우측엔 '모스크바, 817'이 적혀 있다. ⓒboybeen
그 큰 도로를 통제하더니 곳곳에서 갑작스럽게 발레 공연이 펼쳐졌다. 지나가던 사람 모두가 뮤지컬 영화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던 순간. ⓒboybeen


그렇게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밤, 무려 붉은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보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저녁도 거르고 허겁지겁 도착했는데 그 넓은 광장에 사람이 꽉 차있었다. 러시아 분들이 대부분 나보다 키가 컸던 탓에 바실리 성당의 꼭대기만 보면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여기가 더 나을 걸?’하며 자리를 바꿔주셨다(끝나고 스빠씨바! 했더니 웃어주셨다). 대체 어디까지 운이 좋을 수 있는지 시험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불꽃이 터지던 그 10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괜히 또 감동해서 울까 봐, 이번엔 정말 크게 웃기로 했다는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이 운과 재수를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불꽃놀이를 찍은 영상엔 사진에 정수리만 나온 어린아이가 “끄라씨바(예쁘다)!”라며 수줍게 웃는 게 녹음되어 있었다. 그렇다. 너무 예쁜 밤이었고, 모든 게 고마운 밤이었다. 이런 기회가 나에게 온 것도 고맙고, 이런 순간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전을 한 나 자신에게도 고마웠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라는 표어에 걸맞은 규모의 공연이 말 그대로 도시 전체에서 진행되었다. 붉은 광장 일대의 도로는 싹! 다! 인도로 개방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현존하는 모든 예술 장르를 본 것 같다. 팝, 락, 오페라, 뮤지컬, 클래식, 발레, 전통음악, 퍼레이드까지! 나는 그 압도적인 분위기를 겨우 감당해 낼 뿐이었다. 길거리에서 '백조의 호수'를 버스킹처럼 볼 수 있는 나라?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야외무대에서 곡예 서커스를 볼 수 있는 나라? 러시아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막막했고, 무서웠던 첫 배낭여행의 클라이맥스였다. 예전부터 국어 선생님들은 '좋다'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쓰도록 하셨다. 좋다는 건 너무 단순하면서도 폐쇄적인 표현이니까. 근데 그 상황은 그냥 '좋았다'. 좋다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을 떠올리다가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으스댈 줄만 알았던 모스크바에서 고생했다고, 그래도 잘 왔다는 위로를 듣게 되다니. 내가 바로 그 운 좋은 여행자였다.


-

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작가의 이전글 러시아 전공자가 테트리스 성당 앞에서 우는 건 주책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