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황금고리에서의 두 번째 날엔 블라디미르에서도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수즈달에 다녀왔다. 작정하고 첫차를 탈 계획으로 알람을 맞췄지만, 시원하게 실패하고서 이 시골 동네의 아침이 꽤 달큰하니 좋다는 합리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긴 9시 수업마다 출결로 점수가 깎이곤 했던 사람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허둥지둥 버스 터미널로 뛰어갔더니 다음 차까지는 약 30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매표소 줄이 너무 길었다. 터미널에 이렇게 줄이 긴 걸 오랜만에 봤다. 키오스크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터미널 밖까지 줄이 삐져나올 정도였는데 창구를 단 1개만 운영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직원은 손님마다 싱글벙글 수다를 떨었다. 처음엔 오히려 반성을 했다. 모든 러시아인이 쌀쌀맞다는 편견을 아직도 갖고 있었구나! 이번 기회에 나도 느긋하게 안부나 나누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27분을 서 있다가 출발을 3분 앞두고 겨우 창구 앞에 섰을 땐 ‘수즈달!!!’이라는 말만 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입석표를 낚아채고 냅다 뛰었다. 출발까지 이제 1-2분 남짓. 그런데 승강장이 너무 평화로웠다. 출발하려고 폼을 잡는 버스가 한 대도 없었다. '너도 이 버스 탈 거니? 말거니?'하고 보채는 기사님도 없었다. 사람들도 온화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심지어 가을 아침의 깨끗한 햇살과 바람이 그 분위기를 더 평화롭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깨달았다. 아, 나름 1분이나 일찍 왔는데 버스를 놓친 거구나.
일단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하여 강아지와 함께 계시던 러시아 할머니와 평온하게 앉아 있었더니,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들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그들도 나처럼 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황당해하더니, 이내 마음을 놓은 듯했다. 사실은 러시아도 인도처럼 마음을 비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인 건 아닐까?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기사님도 오늘만큼은 느긋해지기로 한 건 아닐까? 그렇게 기사님은 무려 40분을 느긋해지시고 오셨다. 내가 버스를 놓친 건지, 오기로 한 버스가 늦게 온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덕분에 내가 강아지와도 친해졌고, 할머니와는 근황을 여쭙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즈달에 들어서자 색이 바랜 흰색 건물들이 보였고, 그 앞에선 소박한 장터가 진행 중이었다. 방금 딴 것 같은 채소와 꿀, 어제 담근 것 같은 장아찌 정도가 좌판에 있었는데, 각자 집에서, 텃밭에서 자랑할 만한 걸 하나씩 챙겨 온 느낌이었다. 판매의 목적보다는 저녁쯤에 겸사겸사 다 같이 나눠드시려던 건 아닐까. 수즈달의 첫인상은 그렇게 소박하고 귀여웠다. 그 옆에 있던 낡은 상가에서 메도부하만 무려 종류 별로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서 엄청 구경하다가, 버스 타기 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길을 나섰다.
* 해봤자 병당 2-3,000원 하는 술을 뭐 이리 신기해하나 보던 가게 아주머니와, 그걸 3-4병 사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세관 신고서를 자진해서 꺼낸 당당한 나를 보며 신기해하던 인천공항 세관 아저씨가 생각난다. "이게 무슨 술이에요?"라는 질문에 "어.. 꿀로 만들었대요!" 하고 두 병을 양손에 잡고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수즈달 크레믈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비록 놓쳤지만) 첫 차를 탈까 고민했던 이유도 수즈달이 꽤나 큰데도 도보로 구석구석을 둘러보아야 했기 때문인데, 막상 도착해 보니 서두를 수가 없었다. 어떤 물감을 써야 할지 오랜 고민을 거친 유화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꽃도, 나무도, 하늘도 아닌 색깔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건 푸르고, 노란 건 노랬다. 그냥 그게 전부여서, 화려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수즈달은 화려한 도시였다. 그런 동네에서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휴대폰이 아닌 풍경을 읽고 있었으니, 쉬이 잊고 살아왔던 평범하고, 평화롭고, 일상적인,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오후를 수즈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즈달 크레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거창한 수식어를 빼더라도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노란색 별이 박힌 파란 지붕의 성당이 그 귀여운 조합과 달리 정말 크고 웅장한 것도 놀라웠지만, 가장 신기했던 건 선베드였다. 러시아 곳곳을 다니며 '이런 데에 누워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은 많았지만 실천은 못 했었는데, 그런 사람들 위해 선베드를 놔 둘 생각은 누가 한 걸까? 그것도 이런 천년고도의 요새에, 심지어 이렇게나 많이. 웨이팅 할 필요도 없이 여유롭게 남은 선베드는 마치 ‘내가 하나하나 누워보고 놓은 건데, 다 괜찮아~’하는 느낌으로 일렬로 쭉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보다 더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다들 홀린 듯 선베드로 향하기에 나도 서둘러 언덕을 올랐는데, 순간 언덕 너머의 풍경이 확 다가와서 깜짝 놀랐다. 특별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또 화려했다. 황금고리의 풍경은 항상 모든 게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느 스케치북에나 있을 것 같은 하늘, 그런 하늘을 그대로 담은 내울, 소가 딱 한 마리만 서있던 푸른 들판을 보며 내 역할은 이런 평화를 즐기는 것이겠거니 하며 잠시 누워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즈달 크레믈은 대릉원 같은 곳이었다. 대릉원이야 지금은 커플과 찍덕의 성지이고, 예전엔 그 높은 언덕에서 눈썰매까지 탔다지만 사실은 ‘1000년 전의 무덤군’이지 않은가. 크레믈의 언덕도 일부러 쌓은 것처럼 일정한 높이로 반듯하게 솟아 있었는데, 예전에는 방어용 성벽(=러시아어로 크레믈)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함이니 강을 낀 높은 언덕을 골랐을 것이고, 공국을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피가 흐르고 스며들길 반복해 온 자리가 이젠 선베드 명당이 되어 있었다. 1000년 후의 사람인 나는 이 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갔을지 상상하며, 흘러가는 구름을 숙연히 헤아려 볼 뿐이었다.
결국 도시를 다 둘러보진 못했다. 천 년이 넘은 도시를 반나절 만에 다 이해하려 했던 건 스물셋의 치기가 아니었을까. 아쉬운 마음에 이 완벽한 도시가 변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들었지만, 황금고리에서만은 괜한 걱정이란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되었다. 훗날 이 도시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또 이해하고 싶어질 때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블라디미르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메도부하 전문점은 꾸역꾸역 들러서 종류별로 몇 병을 사서 돌아왔는데, 남은 여행 중간중간에 하나씩 까먹었다. 아직도 그 달큰한 꿀 냄새가 기억난다.
* 17 루블(300-400원)만 더 내면 수즈달 시내까지 데려다주는데, 터미널에서 시내가 꽤 멀어서 꼭 내도록 하자. 나는 아예 모르고 있다가 아무도 내리지 않자 내가 솔선수범해야겠다며 '수즈달?'이라고 물어보고 멋지게 내렸는데,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수즈달(터미널?)'은 맞았지만, '수즈달(시내)?'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시내까지 걸어서 한 30분 걸리는 묘한 터미널에 덜렁 내려졌고, 풀이 무성한 갓길을 걸어야 했다. 다행히 날씨도, 공기도 좋아서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감성이 있었다. 저 끝에서 뜬금없는 말 한 마리가 풀을 뜯는 건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친해 보이는 러시아 아저씨 두 분이 털레털레 걷는 건 나름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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