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황금고리는 모스크바 북동쪽에 고리 모양으로 흩어져 있는 러시아의 고대도시들을 뜻한다. 지금이야 크게는 위성도시, 작게는 아기자기한 시골마을 정도지만, 왕년에는 모스크바랑 엎치락뒤치락했던 수준이었던지라 ‘한가락했던’ 시절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황금고리만 잘 둘러보아도 진정한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이니, 나 같은 전공자들에겐 특히나 더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블라디미르는 황금고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기도 하고, 모스크바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일반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근교 관광지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떠나서, 놀러 온 입장에서도 엄청 만족스러웠다. 횡단열차 여행이 바이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창문 밖으로 지나가던 작은 마을들은 어떤 곳일지 항상 궁금했기 때문. 그래서 ‘야외 박물관! 천년고도!’ 같은 표현들을 힘주어 사용하지 않더라도, 수수한 풍경만으로 이곳을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어느 것 하나 튀는 게 없었지만, 정성스레 보수해 온 흔적들과 주변 풍경이 오래도록 합을 맞춘 티가 났다. ‘진짜 옛날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여긴 그대로겠구나’ 싶었던 아기자기한 시골마을.
어림잡아 12개쯤 되는 황금고리 도시 중에서 내가 선택한 곳은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이었다. 차로 1시간 거리의 두 도시가 12-13세기쯤에는 꽤 큰 공국이었던 덕에 ‘기념물군’으로 묶여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도 지나가는 덕에 접근성이 아주 좋았기 때문. 이라고 말하면 엄청 모범적인 여행자 같겠지만, 나는 전통주 때문에 여길 꼭 와야만 했다. 바로 메도부하!
러시아 전문 팟캐스트 보드카 먹은 불곰의 황금고리 편에서 메도부하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꿀로 만든 술인데’ 하시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달고 맛있다’며 웃으셨다. 표현이 직설적이어서 더 궁금해졌다. ‘두꺼운 바디감 속에 달큰한 뉘앙스가 있다’고 했다면 관심도 주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꿀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달고 맛있다는 말에 시원하게 넘어가 버렸다. 마침 수즈달이 자체 브랜드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메도부하로 유명한 도시였던지라, 꼭 직접 가서 종류 별로 마셔보기로 했다.
니즈니노브고라드에서 블라디미르까지는 두 시간 남짓. 확실히 모스크바 근교까지 와서인지 침대가 아닌 좌석형 기차가 더 많았는데, 아무튼 가장 싼 티켓을 잡았더니 일반 좌석 뒤에 짐칸을 마주 보는 간이좌석에 앉게 되었다. 층층이 쌓인 캐리어를 마주 보고 있자니 구질구질해서 더 노련해 보이는 여행자가 된 기분. 창문 밖에는 한국보다는 조금 이르게 가을이 찾아온 듯, 여름 동안 각자의 색으로 짙어진 평원엔 높고 맑은 하늘이 살랑이고 있었다.
성수기를 비켜나간 덕에 블라디미르역과 호스텔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늦은 오후의 조용한 러시아 시골 마을엔 진한 노을빛이 비스듬하게 퍼지고 있었다. 어릴 적 하굣길을 걷는 기분이라던 블로거의 표현이 딱 적절했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던 그 시절의 풍경과 노을 냄새. 러시아인들도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천천히 그네를 타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첫 배낭여행이었던 탓인지, 큰 도시에서 노을을 바라볼 땐 왠지 모르게 외로웠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돌아갈 곳이 없고, 나만 오늘 밤 약속이 없는 기분? 그런데 여긴 달랐다. 골목을 두 번 정도 꺾으면 나를 반겨줄 시골집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김치찌개는 아니어도 보르시는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블라디미르는 그런 따뜻함이 있는 도시였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탓에 많이 둘러보지는 못해 마지막 날 아침 산책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봐야 했다. 사실 아등바등 돌아다니면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워낙 느긋한 동네라 이 동네의 무드에 나를 맞추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랜드마크인 우스펜스키 성당이 어디 있는지, 번화가가 어디인지 대충 알아두고 뻴메니가 유명하다던 동네 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뻴메니 맛집에서 무려 오크통에서 바로 꺼내 마실 수 있는 생맥(맥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도부하를 팔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머니께서도 너무 친절하셨다. ‘그냥 메도부하’와 ‘꽃맛(?) 메도부하’가 있었는데, 술을 잘 못 마셔서 딱 한 잔만 마시려고 엄청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티가 났는지, 아주머니께서 고민하지 말라며 시음을 권해주셨다. 날 위해 무려 설거지 두 개를 더 감수하시다니, 소소한 듯 직접적인 호의가 너무 감사했다.
메도부하는 기대만큼 ‘일단 달고 맛있었’지만, 시음까지 한 탓인지 꽤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그 핑계로 여기저기 연락하며 술주정을 떨다가 이른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버렸는데, 얼렁뚱땅 씻고 누우니 오늘 하루 한 게 정말 없는 것 같아서 괜히 웃겼다.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은 기분? 이렇게 조바심 없이, 경계심 없이 다닌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해 왔던 게 알게 모르게 꽤나 스트레스였던 모양.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쉽지 않을 두 대도시,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쉬어갈 필요도 있었던 그런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하루동안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메도부하를 들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 중에 혼자서 맛있는 걸 먹으면 웅얼웅얼하면서 웃는 버릇이 새겼는데, 그런 나를 굉장히 신기하게 구경하시던 아저씨가 찍어주신 사진 두 장. 덕분에 몇 없는 내 사진이 생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