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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May 26. 2024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정확히는 수즈달에서 찍었던 인증샷. 황금고리의 하늘은 순수하고 정직해서 좋았다. ⓒboybeen
정교회 성당이야 러시아 어딜 가도 볼 수 있지만, 황금고리는 이조차도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boybeen


황금고리는 모스크바 북동쪽에 고리 모양으로 흩어져 있는 러시아의 고대도시들을 뜻한다. 지금이야 크게는 위성도시, 작게는 아기자기한 시골마을 정도지만, 왕년에는 모스크바랑 엎치락뒤치락했던 수준이었던지라 ‘한가락했던’ 시절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황금고리만 잘 둘러보아도 진정한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이니, 나 같은 전공자들에겐 특히나 더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블라디미르는 황금고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기도 하고, 모스크바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일반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근교 관광지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떠나서, 놀러 온 입장에서도 엄청 만족스러웠다. 횡단열차 여행이 바이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창문 밖으로 지나가던 작은 마을들은 어떤 곳일지 항상 궁금했기 때문. 그래서 ‘야외 박물관! 천년고도!’ 같은 표현들을 힘주어 사용하지 않더라도, 수수한 풍경만으로 이곳을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어느 것 하나 튀는 게 없었지만, 정성스레 보수해 온 흔적들과 주변 풍경이 오래도록 합을 맞춘 티가 났다. ‘진짜 옛날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여긴 그대로겠구나’ 싶었던 아기자기한 시골마을.


블라디미르역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니즈니노브고라드-블라디미르 구간은 처음으로 침대가 아닌 좌석형 기차를 탔는데, 이제 정말 수도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boybeen
블라디미르역의 전경. 왁자지껄한 여느 역들과 다르게 인공적인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좋았다. ⓒboybeen


어림잡아 12개쯤 되는 황금고리 도시 중에서 내가 선택한 곳은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이었다. 차로 1시간 거리의 두 도시가 12-13세기쯤에는 꽤 큰 공국이었던 덕에 ‘기념물군’으로 묶여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도 지나가는 덕에 접근성이 아주 좋았기 때문. 이라고 말하면 엄청 모범적인 여행자 같겠지만, 나는 전통주 때문에 여길 꼭 와야만 했다. 바로 메도부하!


러시아 전문 팟캐스트 보드카 먹은 불곰의 황금고리 편에서 메도부하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꿀로 만든 술인데’ 하시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달고 맛있다’며 웃으셨다. 표현이 직설적이어서 더 궁금해졌다. ‘두꺼운 바디감 속에 달큰한 뉘앙스가 있다’고 했다면 관심도 주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꿀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달고 맛있다는 말에 시원하게 넘어가 버렸다. 마침 수즈달이 자체 브랜드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메도부하로 유명한 도시였던지라, 꼭 직접 가서 종류 별로 마셔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나오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시골마을의 쨍한 노을이 주는 포근함이 좋다. ⓒboybeen
언젠가 다시 이 노을을 볼 수 있을까? ⓒboybeen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문물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의 재미인 것 같다. ⓒboybeen
영화 '마더'처럼은 아니지만, 버스 창문으로 비치는 노을을 담고 싶어서 오래 서 있었다. ⓒboybeen


니즈니노브고라드에서 블라디미르까지는 두 시간 남짓. 확실히 모스크바 근교까지 와서인지 침대가 아닌 좌석형 기차가 더 많았는데, 아무튼 가장 싼 티켓을 잡았더니 일반 좌석 뒤에 짐칸을 마주 보는 간이좌석에 앉게 되었다. 층층이 쌓인 캐리어를 마주 보고 있자니 구질구질해서 더 노련해 보이는 여행자가 된 기분. 창문 밖에는 한국보다는 조금 이르게 가을이 찾아온 듯, 여름 동안 각자의 색으로 짙어진 평원엔 높고 맑은 하늘이 살랑이고 있었다. 


성수기를 비켜나간 덕에 블라디미르역과 호스텔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늦은 오후의 조용한 러시아 시골 마을엔 진한 노을빛이 비스듬하게 퍼지고 있었다. 어릴 적 하굣길을 걷는 기분이라던 블로거의 표현이 딱 적절했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던 그 시절의 풍경과 노을 냄새. 러시아인들도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천천히 그네를 타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를 떠나는 날 괜히 아쉬워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다. 여느 대도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우스펜스키 성당을 따라 걸으며 1,000년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boybeen
우스펜스키 성당은 종탑과 함께 블라디미르 정중앙에 있어 오며 가며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boybeen


첫 배낭여행이었던 탓인지, 큰 도시에서 노을을 바라볼 땐 왠지 모르게 외로웠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돌아갈 곳이 없고, 나만 오늘 밤 약속이 없는 기분? 그런데 여긴 달랐다. 골목을 두 번 정도 꺾으면 나를 반겨줄 시골집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김치찌개는 아니어도 보르시는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블라디미르는 그런 따뜻함이 있는 도시였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탓에 많이 둘러보지는 못해 마지막 날 아침 산책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봐야 했다. 사실 아등바등 돌아다니면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워낙 느긋한 동네라 이 동네의 무드에 나를 맞추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랜드마크인 우스펜스키 성당이 어디 있는지, 번화가가 어디인지 대충 알아두고 뻴메니가 유명하다던 동네 식당을 찾아갔다.


우스펜스키 성당 뒤편으로 길게 뻗은 오솔길이 있었다. 멀찍이 보이는 블라디미르역과 평원을 보며 아침 산책을 했다. ⓒboybeen
한국보다 일찍 찾아온 가을 덕에 낙엽이 꽤나 쌓여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과 부서지는 햇살이 주는 편안함. ⓒboybeen


그런데 그 뻴메니 맛집에서 무려 오크통에서 바로 꺼내 마실 수 있는 생맥(맥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도부하를 팔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머니께서도 너무 친절하셨다. ‘그냥 메도부하’와 ‘꽃맛(?) 메도부하’가 있었는데, 술을 잘 못 마셔서 딱 한 잔만 마시려고 엄청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티가 났는지, 아주머니께서 고민하지 말라며 시음을 권해주셨다. 날 위해 무려 설거지 두 개를 더 감수하시다니, 소소한 듯 직접적인 호의가 너무 감사했다.


메도부하는 기대만큼 ‘일단 달고 맛있었’지만, 시음까지 한 탓인지 꽤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그 핑계로 여기저기 연락하며 술주정을 떨다가 이른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버렸는데, 얼렁뚱땅 씻고 누우니 오늘 하루 한 게 정말 없는 것 같아서 괜히 웃겼다.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은 기분? 이렇게 조바심 없이, 경계심 없이 다닌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해 왔던 게 알게 모르게 꽤나 스트레스였던 모양.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쉽지 않을 두 대도시,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쉬어갈 필요도 있었던 그런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하루동안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메도부하를 들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 중에 혼자서 맛있는 걸 먹으면 웅얼웅얼하면서 웃는 버릇이 새겼는데, 그런 나를 굉장히 신기하게 구경하시던 아저씨가 찍어주신 사진 두 장. 덕분에 몇 없는 내 사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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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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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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