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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Jun 06. 2024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무려 1225년에 지어진, 수즈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로젠스트벤스키 성당. 파란색 돔과 노란색 별이 귀엽다. ⓒboybeen


황금고리에서의 두 번째 날엔 블라디미르에서도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수즈달에 다녀왔다. 작정하고 첫차를 탈 계획으로 알람을 맞췄지만, 시원하게 실패하고서 이 시골 동네의 아침이 꽤 달큰하니 좋다는 합리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긴 9시 수업마다 출결로 점수가 깎이곤 했던 사람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허둥지둥 버스 터미널로 뛰어갔더니 다음 차까지는 약 30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매표소 줄이 너무 길었다. 터미널에 이렇게 줄이 긴 걸 오랜만에 봤다. 키오스크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터미널 밖까지 줄이 삐져나올 정도였는데 창구를 단 1개만 운영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직원은 손님마다 싱글벙글 수다를 떨었다. 처음엔 오히려 반성을 했다. 모든 러시아인이 쌀쌀맞다는 편견을 아직도 갖고 있었구나! 이번 기회에 나도 느긋하게 안부나 나누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27분을 서 있다가 출발을 3분 앞두고 겨우 창구 앞에 섰을 땐 ‘수즈달!!!’이라는 말만 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수즈달행 버스는 한국의 마을버스처럼 작고 귀여웠다. 가로등도 없이 자작나무와 평원이 길게 뻗은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이 좋았다. ⓒboybeen
버스에 추가금을 내면 터미널에서 거리가 꽤 있는 시내까지 데려다주는데, 난 그걸 몰랐던 덕에 혼자 내려 시골길을 걸었다. 탓이 아니고 덕이었다. 좋았다. ⓒboybeen
30분을 족히 걸어 수즈달 시내에 도착하니 차들은 드문드문, 오히려 걷는 사람과 말이 더 많았다. ⓒboybeen


그렇게 입석표를 낚아채고 냅다 뛰었다. 출발까지 이제 1-2분 남짓. 그런데 승강장이 너무 평화로웠다. 출발하려고 폼을 잡는 버스가 한 대도 없었다. '너도 이 버스 탈 거니? 말거니?'하고 보채는 기사님도 없었다. 사람들도 온화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심지어 가을 아침의 깨끗한 햇살과 바람이 그 분위기를 더 평화롭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깨달았다. 아, 나름 1분이나 일찍 왔는데 버스를 놓친 거구나.


일단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하여 강아지와 함께 계시던 러시아 할머니와 평온하게 앉아 있었더니,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들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그들도 나처럼 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황당해하더니, 이내 마음을 놓은 듯했다. 사실은 러시아도 인도처럼 마음을 비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인 건 아닐까?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기사님도 오늘만큼은 느긋해지기로 한 건 아닐까? 그렇게 기사님은 무려 40분을 느긋해지시고 오셨다. 내가 버스를 놓친 건지, 오기로 한 버스가 늦게 온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덕분에 내가 강아지와도 친해졌고, 할머니와는 근황을 여쭙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즈달 시장에서 엄청 고민했던 자석들. 특산품이 오이라서 왼쪽 아래에 오이 모양의 자석도 있다. ⓒboybeen
마침 방문했던 날이 장날인지 주민 분들이 이런저런 작물을 팔고 계셨다. 자석에서 본 오이도 있어서 귀여웠다. ⓒboybeen
수즈달의 풍경화를 전시해 두신 화가 분도 계셨다. 비라도 오면 어쩌나 싶다가도, 이 동네는 빗물조차도 맑고 깨끗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oybeen


수즈달에 들어서자 색이 바랜 흰색 건물들이 보였고, 그 앞에선 소박한 장터가 진행 중이었다. 방금 딴 것 같은 채소와 꿀, 어제 담근 것 같은 장아찌 정도가 좌판에 있었는데, 각자 집에서, 텃밭에서 자랑할 만한 걸 하나씩 챙겨 온 느낌이었다. 판매의 목적보다는 저녁쯤에 겸사겸사 다 같이 나눠드시려던 건 아닐까. 수즈달의 첫인상은 그렇게 소박하고 귀여웠다. 그 옆에 있던 낡은 상가에서 메도부하만 무려 종류 별로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서 엄청 구경하다가, 버스 타기 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길을 나섰다.

* 해봤자 병당 2-3,000원 하는 술을 뭐 이리 신기해하나 보던 가게 아주머니와, 그걸 3-4병 사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세관 신고서를 자진해서 꺼낸 당당한 나를 보며 신기해하던 인천공항 세관 아저씨가 생각난다. "이게 무슨 술이에요?"라는 질문에 "어.. 꿀로 만들었대요!" 하고 두 병을 양손에 잡고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수즈달 크레믈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비록 놓쳤지만) 첫 차를 탈까 고민했던 이유도 수즈달이 꽤나 큰데도 도보로 구석구석을 둘러보아야 했기 때문인데, 막상 도착해 보니 서두를 수가 없었다. 어떤 물감을 써야 할지 오랜 고민을 거친 유화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꽃도, 나무도, 하늘도 아닌 색깔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건 푸르고, 노란 건 노랬다. 그냥 그게 전부여서, 화려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수즈달은 화려한 도시였다. 그런 동네에서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휴대폰이 아닌 풍경을 읽고 있었으니, 쉬이 잊고 살아왔던 평범하고, 평화롭고, 일상적인,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오후를 수즈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즈달 크레믈 안의 풍경. 수즈달 크레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티켓에도 인증 마크가 있다. ⓒboybeen
로젠스트벤스키 성당은 규모가 꽤 큰데, 성벽 아래에 지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boybeen


수즈달 크레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거창한 수식어를 빼더라도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노란색 별이 박힌 파란 지붕의 성당이 그 귀여운 조합과 달리 정말 크고 웅장한 것도 놀라웠지만, 가장 신기했던 건 선베드였다. 러시아 곳곳을 다니며 '이런 데에 누워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은 많았지만 실천은 못 했었는데, 그런 사람들 위해 선베드를 놔 둘 생각은 누가 한 걸까? 그것도 이런 천년고도의 요새에, 심지어 이렇게나 많이. 웨이팅 할 필요도 없이 여유롭게 남은 선베드는 마치 ‘내가 하나하나 누워보고 놓은 건데, 다 괜찮아~’하는 느낌으로 일렬로 쭉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보다 더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천년고도의 성채에 이제는 선베드가 들어섰다. 물을 앞에 두고 언덕과 성채라니, 방어가 잘 되었던 이유를 알겠다. ⓒboybeen
이 성당의 이름을 찾아볼까, 하다가 마음 속에 이미지로 남은 이름 모를 성당도 하나쯤 갖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boybeen
러시아 아저씨 한 분과 언덕길을 따라 걸었다. 오랜 기억을 가진 도시는 이제는 초연해진 것처럼 평온했다. ⓒboybeen
같은 피사체를 1,000년 간 많은 사람들이 그려왔을 텐데, 각자가 해석한 그 풍경이 궁금해졌다. ⓒboybeen


다들 홀린 듯 선베드로 향하기에 나도 서둘러 언덕을 올랐는데, 순간 언덕 너머의 풍경이 확 다가와서 깜짝 놀랐다. 특별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또 화려했다. 황금고리의 풍경은 항상 모든 게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느 스케치북에나 있을 것 같은 하늘, 그런 하늘을 그대로 담은 내울, 소가 딱 한 마리만 서있던 푸른 들판을 보며 내 역할은 이런 평화를 즐기는 것이겠거니 하며 잠시 누워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즈달 크레믈은 대릉원 같은 곳이었다. 대릉원이야 지금은 커플과 찍덕의 성지이고, 예전엔 그 높은 언덕에서 눈썰매까지 탔다지만 사실은 ‘1000년 전의 무덤군’이지 않은가. 크레믈의 언덕도 일부러 쌓은 것처럼 일정한 높이로 반듯하게 솟아 있었는데, 예전에는 방어용 성벽(=러시아어로 크레믈)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함이니 강을 낀 높은 언덕을 골랐을 것이고, 공국을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피가 흐르고 스며들길 반복해 온 자리가 이젠 선베드 명당이 되어 있었다. 1000년 후의 사람인 나는 이 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갔을지 상상하며, 흘러가는 구름을 숙연히 헤아려 볼 뿐이었다.


종탑 전망대 앞에 계셨던 할머니. 별다른 티켓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 찰나의 '허락'이 할머니의 일상이자 소일거리였다. ⓒboybeen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즈달. 오밀조밀 시골길이 소박해서 좋다. 지평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 다녀온 수즈달 크레믈과 로젠스트벤스키 성당이 보인다.  ⓒboybeen
전망대 우측 방면에 일정이 촉박해서 둘러보지 못했던 크레믈이 한채 더 보였다. 저긴 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할 땐 그 핑계로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boybeen


결국 도시를 다 둘러보진 못했다. 천 년이 넘은 도시를 반나절 만에 다 이해하려 했던 건 스물셋의 치기가 아니었을까. 아쉬운 마음에 이 완벽한 도시가 변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들었지만, 황금고리에서만은 괜한 걱정이란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되었다. 훗날 이 도시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또 이해하고 싶어질 때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블라디미르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메도부하 전문점은 꾸역꾸역 들러서 종류별로 몇 병을 사서 돌아왔는데, 남은 여행 중간중간에 하나씩 까먹었다. 아직도 그 달큰한 꿀 냄새가 기억난다.


* 17 루블(300-400원)만 더 내면 수즈달 시내까지 데려다주는데, 터미널에서 시내가 꽤 멀어서 꼭 내도록 하자. 나는 아예 모르고 있다가 아무도 내리지 않자 내가 솔선수범해야겠다며 '수즈달?'이라고 물어보고 멋지게 내렸는데,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수즈달(터미널?)'은 맞았지만, '수즈달(시내)?'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시내까지 걸어서 한 30분 걸리는 묘한 터미널에 덜렁 내려졌고, 풀이 무성한 갓길을 걸어야 했다. 다행히 날씨도, 공기도 좋아서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감성이 있었다. 저 끝에서 뜬금없는 말 한 마리가 풀을 뜯는 건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친해 보이는 러시아 아저씨 두 분이 털레털레 걷는 건 나름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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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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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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