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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May 20. 2024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축하를 받은 한국 예비군

#20 니즈니노브고로드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역 대합실에는 선전물의 느낌이 강한 모자이크 벽화가 마주보고 있는데, 퀄리티가 상당했다. ⓒboybeen


“볼가강을 볼까, 말까 할 땐 봐라.”

이 어이 없는 개그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장기라고 하기엔 머쓱하고, 단기라고 하기엔 왠지 억울한 한 달의 일정. 가장 고민이었던 점은 ‘대체 어디까지 계획해야 할까?’였다. 몸만 훌렁 가기에는 성격이 못 버틸 것 같고, 모~든 일정을 다 짜는 건 부담스러우면서도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절충안으로서 도시별 체류일만 정해두고, 중반인 노보시비르스크까지의 기차편 예매를 포함한 대략적인 루트를 한국에서 해결한 후 러시아에 도착했다.


이처럼 절반의 일정을 될 대로 되라며 놓아둔 이유는 ‘갑자기 가보고 싶어서’, 혹은 ‘갑자기 안 가고 싶어서’ 같은 변덕스럽고 허세 가득한 상황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러한 유연함이 멋진 배낭여행자의 미덕이라 생각해오기도 했고. 사실 뭐, 계획이 틀어지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 성격이라 대략적으로 구상해둔 일정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만 빼고!

* 23살의 저는 이렇게나 계획적이었지만, 29살의 저는 숙소만 해결되면 출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증샷을 찍은 벽의 맞은 편에 있던 다른 모자이크 벽화. 레닌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참 소련스럽다. ⓒboybeen
니즈니노브고로드 지하철. 막심 고리키의 도시답게 '고리콥스카야(고리끼의)' 역이 있다. ⓒboybeen


일정 초안에서 니즈니노브고로드는 말 그대로 환승을 위한 곳이었다. 카잔에서 황금고리(모스크바를 포함한 그 일대의 러시아 고대도시들)중 하나인 블라디미르로 가기 위해서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으니까. 니즈니노브고로드 또한 카잔보다 인구가 많을 정도로 크고, 월드컵도 개최되었던 도시이며, 대작가 막심 고리키의 도시이라지만 ‘고대도시 블라디미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다. 아쉽긴 아쉬워도 한정적인 일정 내에서 포기할 건 포기해야 했다. 라고 생각했다. 어이 없는 아재개그를 보기 전까지는.


러시아 철도청 사이트는 그리 친절하기 않다. 코레일처럼 연결편을 야무지게 찾아주지도 않으며, 각 열차별 번호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토익 지문처럼 구석구석에 적힌 정보들을 종합해서 유추해야 했다. 통설로는 1번에 가까울수록 좋은 기차라지만, 틈틈이 큰 숫자 중에서도 '프리미엄 노선'이 있어서 잘 골라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환승 할인(사실 코레일에도 이건 없다. 괜한 심술 맞다.) 같은 건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카잔~니즈니~블라디미르 구간 역시 2개의 티켓을 완전 독립적으로 사야했고, ‘이렇게 된 거 니즈니에서 스탑오버를 할까’하는 생각을 한국에서부터 했었던 참이었다. 볼가강을 볼까, 말까 했던 셈.


그렇게 오전 7시, 꽤 이른 시간에 니즈니에 도착했다. ‘어쩌다 카잔과 니즈니에 가게 되었냐’며 신기해하셨던 차장님께선 내릴 때에도 엄청 응원해주셨다. 애초에 관광지가 아닌 곳인데다가, 카잔-니즈니만 오가는 열차라 관광객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둘러본 플랫폼에도 외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평일 아침이라 역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역시나 월드컵 덕인지 역이 아주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로비 양쪽의 굉장한 소련 느낌의 모자이크 벽화가 기억에 남는데, 시민 혹은 주민 말고 동지나 인민 정도로 불러야할 것 같은 사람들이 레닌과 함께 비장하게 서있었다. 매번 새삼스럽지만 이 나라가 (구)소련이라는 걸 깨닫는다.


크레믈로 향하는 번화가.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몇몇 슈퍼들만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boybeen
크레믈 너머로 보이는 볼가강. 강변까지 내려가진 못했지만 큰 강을 낀 파노라마는 언제나 좋다. ⓒboybee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되었던 러시아군 청년들의 모습. ⓒboybeen


그래서인지 니즈니노브고로드 크레믈에서 가장 생각이 많아졌던 순간도 볼가강이나 성벽 투어, 망루 박물관이 아닌, 낡은 소련제 전차와 이름 모를 군인들의 흑백 사진을 마주했을 때였다. 사실 처음으로 러시아를 왔던 스무 살, 하바롭스크의 대조국전쟁기념비를 봤을 때도 그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돌아오지 못했던 소련 군인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무르강가에 ‘꺼지지 않는 불꽃’만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체험하지도, 배우지도 못했던 역사 속에 있는 기분이었고, 특히 한국계 성씨를 볼 때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던 기억이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소련, 사회주의, 인민’ 등의 단어는 사실상 금기였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반세기도 가지 않은 1980년에만 해도 모스크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이 파견되지 않았고, 1983년엔 소련에 의해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8년 서울 올림픽엔 소련이 참가했고, 1990년에는 한-러 수교까지 체결됐다. 지금이야 무비자로 왕래할 수도 있고, 전공자들끼리의 술자리에선 ‘수교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블루오션’이라는 덧없는 농담이 오가기도 한다. 96년생으로서 소련을 보지도 못한 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속편하게 여행까지 하고 있는 건 누군가에겐 ‘시대가 참 변했구나’ 싶은 일인 것.


크레믈 안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옛 전차들이 서 있었다. ⓒboybeen
성벽 너머로 보이는 일상의 모습들. 다른 도시들보다 차분한 느낌이 좋았던 니즈니노브고로드. ⓒboybeen


니즈니노브고로드 크레믈 앞에 있던 그 낡은 초록색 소련제 전차는 T-34라고 하는 듯 했다. 몇몇 블로그에선 ‘러시아의 대조국전쟁 승전의 상징’이라며 감탄하고 있었고, 또 다른 몇몇은 '한국전쟁 한국군을 크게 고전하게 했던 그 북한군 소련제 전차’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같은 물건이지만 이제는 관점이 다양해졌고, 그 다양한 관점을 서슴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래서 알다가도 모르는 게 역사라고 하는 걸까. 흐린 하늘 아래 볼가강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오늘날의 니즈니노브고로드 시민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무료한 화요일 오전을 흘려내고 있었다.


러시아 거리에는 이런 노점들이 많다. 나름대로 정찰제(?)로 가격이 붙어 있어서 조금 비싸지만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boybeen
러시아 월드컵 마스코트였던 자비바카. 월드컵이 끝난 직후라 곳곳에서 세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큰 인형도 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boybeen


얼마 전 러시아어 회화 수업 시간에 내가 살던 나라에는 어떤 박물관이 유명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본 기억이 나서 전쟁기념관을 추천해주었고, 혹시 부산에 올 생각이 있다면 UN평화공원도 함께 둘러보라고 말했다. 발표가 으레 그렇듯 자기 몫을 교수님께 털어내고 나면 관심이 훅 떨어져서 내 말을 제대로 들은 학생은 없었겠지만, ‘러시아에서’ ‘중국학생들도’ 듣는 수업에서 한국전쟁이라거나, UN군 같은 단어를 꺼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교수님은 내 발표에 대한 피드백으로 전쟁에 관련한 코멘트를 해주시다가, 러시아의 국경일인 ‘조국 수호의 날’은 군인들과 남자들을 위한 날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군대를 다녀온 현빈에게도 축하해주자고 했다. 그렇게 난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러시아인 교수님과 중국인 학생들에게서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모두의 덧 없기도하고, 특별하기도 한 오늘들이 모여 흘러가는 게 역사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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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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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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