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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May 12. 2024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8 카잔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전 일정을 통틀어 가장 아이코닉했던 건축물, 쿨 샤리프 사원. 처음 방문한 이슬람 사원이기도 했다. ⓒboybeen


… 그래서 다신 가기 싫은 나라가 내 전공이 되어버린다면, 과감히 저는 그만두려구요.
과연 저는 수능특강과 전공서적 중 어떤 걸 펴게 될까요?
아니, 무사히 한국에 돌아갈 수나 있을까요? 이런 저의 생존기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


1박 2일이지만 별 일이 다 있었던 예카테린부르크를 마무리하고, 카잔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서 이 여행기의 프롤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여행 초반에(늦어도 바이칼 즈음) 주변에 알리려 했지만, 워낙 제목이 자극적이기도 하고 여행도 생각보다 쉽지 않아 미뤘던 게 중후반까지 와버린 것. 10,000자 가까이나 되는 분량의 초고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아마 버릇 같은 구구절절함을 적당히 덜어내면 반절까지는 줄어들 것이고, 거기서 이성을 조금만 더 차리면 다른 분들도 편히 읽을 수 있는 호흡이 잡힐 것이다. 감정적으로 쓰였던 글들은 대개 그랬으니까. 일단 대충은 적어냈으니 덜어내는 것은 금방이라 생각하며 누운 채 팔다리를 쭉 뻗었다. 창밖엔 보름달이 떠 있었고, 가끔씩 수면등보다 밝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 숲이 지나가곤 했다. 무슨 영문인지 4명밖에 타지 않았던 조용한 객차에도 시퍼런 달빛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쿨 샤리프 사원은 카잔 크레믈 안에 있다. 크레믈 안에는 타타르스탄 공화국 대통령 관저, 슈움비케 탑 등이 있으며,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boybeen
카잔 크레믈의 입구. 노란색 별만 잘 찾아오면 편하게 찾을 수 있다. ⓒboybeen


비현실적이었다. ‘조용한 밤기차의 흔들리는 달빛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뻔하고도 감상적인 서사가 아니라, 내가 이 공간에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혼자서, 이렇게 길게, 러시아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러시아에 가는 건 프랑스어라던가 중국어 전공자보다는 훨씬 말이 되긴 하지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러시아어 전공 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스물세 살의 나에겐 충분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사실 이 글을 다시 리마스터링 하고 있는 스물아홉에도 내 삶에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게 낯설긴 하니,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싶다.


어쩌다 보니 카잔에서야 첫 소식을 전하게 되었지만, 가장 여행 제목과 충돌하는(?) 도시여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학과에서 카잔연방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올 수 있어서, 아무 반전 없이 복학한다면 다시 마주하게 될 도시이기 때문. 그래서 카잔에서는 집 보러 다니는 자취생 같은 마음가짐으로 구석구석 살펴보고자 일정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수준인 3박 4일로 길게 잡았다. '장기여행자에겐 자신만의 일요일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20일 가까이 여행을 하다 보니 몸소 느끼고 있기도 했고.


카잔 크레믈의 노을. 쿨 샤리프 사원과 크레믈 성벽이 흰색은 매 시간 달라지는 하늘의 색도 품고 있었다. ⓒboybeen
크레믈 부지에 살았다던 용. 사실 얼굴만 용이고, 뱀의 꼬리와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귀여운 사이즈여서 최대한 위압감이 있게 찍어보았다. ⓒboybeen
쿨 샤리프 사원과 카잔 크레믈의 밤. 동화 속 마법사가 살 것만 같은 뾰족한 탑들. ⓒboybeen
또 가도 될까 고민하면서도 4일 내내 쿨 샤리프 성당을 찾은 덕에 다양한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boybeen


늦은 오후, 나지막한 햇살 아래 도착한 카잔역은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었던 지역들인 만큼, 다른 도시들보다 정비된 느낌이 훨씬 강했다. 월드컵 폐막이 1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카잔이 목적지인 사람도 몇 없었고,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역 곳곳에 붙어 있던 경기 일정표와 자비바카(늑대 캐릭터 마스코트)만이 ‘얼마 전엔 그렇게 난리였는데 껄껄’하며 정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줄줄이 탈락하는 대이변이 있었던 도시, 무려 한국이 '카잔의 기적'으로 독일을 꺾었던 곳이니 여러모로 난리가 났다는 건 사실이기도 하다.

* 예카테린부르크 아레나에서도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었지만, 조별 1-2차전 4경기로 많지는 않았다.


카잔의 첫인상은 꽤나 특이했다. 기차역 앞엔 으레 이것저것 사 먹을 무언가가 있고, 끈질긴 택시 호객꾼도 있기 마련인데, 여긴 너무 평화로웠다. 커다란 주차장이라거나 정류장 대신 깔끔한 공원이 있었고, 택시조차 한 대 없는 풍경에 할머니 한 분이 햇볕을 쬐고 계셨다. 도시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예상치 못한 이 그림, 너무 좋았다. 비스듬한 저물어가는 여름의 햇빛만 가득했던 거리는 오랜 시간을 거쳐 구석구석을 다듬은 흔적이 보였고, 사람들의 표정에도 늦은 오후와 닮은 여유가 묻어 있었다.


카잔의 최대 번화가 바우만 거리, 최대 쇼핑몰 깔쪼(반지라는 뜻)로 향하는 길. 늘 사람이 많다. ⓒboybeen
바우만 거리의 상징인 종탑. 100루블(당시 약 2,000원)을 내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뷰는 나쁘지 않다. ⓒboybeen
바우만 거리의 교차로. 여기서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에 당시 카잔에서 유일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가 있었다. 교환학생 때 정말 자주 갔다. ⓒboybeen


숙소에 대충 짐을 던져두고 교환학생을 다녀온 학과 선배들의 SNS 너머로 볼 수 있었던 쿨 샤리프 사원으로 직행했다. ‘러시아에도 이슬람 사원이 있구나’ 하고 신기해하기도 전에, 사진만으로도 ‘어떻게 저런 게 존재할까’ 싶었던 그것. 실제로 마주하니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특히 절제된 흰색과 하늘색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원 그 자체로도 아주 깔끔하게 아름다웠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깔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어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건축물의 인공적인 면을 최소화하는 데에 의미를 두고 절제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런 추측을 얹어볼 뿐.


그런데 쿨 샤리프 사원은 ‘카잔 크레믈’의 일부였다. 쿨 샤리프 사원 옆에는 박물관도 몇 개 있고, 슈움비케 탑도 있고, 타타르스탄 대통령 관저와 성모수태 정교회 성당(놀랍게도 이슬람 사원과 정교회 사원이 바로 옆에 있다)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쿨 샤리프처럼 새하얀 카잔 크레믈이 감싸고 있었다. 이걸 언제 다 봐야 하나 아찔해할 때쯤, 크레믈이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는 게 생각났다. 이미 카잔에서 좀 잘 나간다는 힙하고 젊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잔디밭에 누워있었다. 이 좋은 걸 얘네만 보고 있었다. 결국 난 카잔에서의 4일 내내 이곳을 찾았는데, 밤기차를 앞두고 마지막을 찾았을 때에도 더 눈에 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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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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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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