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ybeen May 11. 2024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피의 성당. 어두운 날씨 덕에 러시아 황실의 비극적인 역사를 조심스럽게나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boybeen


어정한 기분에 컨디션도 좋지 않아 서둘러 잠든 덕인지, 꽤나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의 이튿날. 이 도시를 위한 두 번의 기회 중 마지막 하루가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몸이 많이 나아졌지만, 이번엔 날씨가 문제였다. 길거리조차 엄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깊은 먹구름. 어제는 그렇게 밝고, 맑고, 화창하더니 첫 번째 기회를 허망하게 날린 대가가 꽤나 컸다. 오늘도 쉬이 흘러가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접이식 우산을 가방 옆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오늘의 목표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직원 분이 호언장담했던 호스텔 조식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열차에서 만난 장교 니콜라이 아저씨가 시식해 보라고 주신 러시아군 비상식량을 뜯었다. 호스텔을 욕하는 대신 친절했던 니콜라이 아저씨를 다시금 떠올렸다. 잘했다! 샤워실의 보일러는 웬일로 ‘immediately’하게 따뜻한 물을 쏟아내다가, 머리를 다 감았을 때쯤 나를 배신했다. 사람 몸에서 제일 중요한 머리라도 따뜻하게 감았으니 다행이다. 언제든 긴장 풀지 말라는 조언이라 생각하며 빠르게 씻었다. 이것도 잘했다!


* 러시아군 비상식량은 열심히 먹었지만.. 정말 맛이 없었다. 원래대로면 전쟁통 속에서 먹어야 할 음식일 테니까 맛을 느끼는 게 분명 사치일 것이다. 대신 열량이라도 빨리 흡수되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군인을 꿈꾸는 조카에게 줄 선물을 나에게 주신 니콜라이 아저씨와, 의경 전역자라 한국군 비상식량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를 이어줬던 소중한 한 끼.


2일 차는 날이 많이 흐렸다. 앞 표지판에는 여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거리가 적혀 있다. ⓒboybeen
이 사진을 찍고 고려인 식당에서 고려인식 국수인 국시(Кукси)를 먹었다. 보일 때마다 믿고 먹었던 메뉴 ⓒboybeen
예카테린부르크 시청과 볼셰비키들이 집결했던 공간이었던 1905년 광장. '스탈린의 일곱 자매'스러운 건축 양식이 인상적이었다. ⓒboybeen


마음을 정리한 덕인지 꿀꿀했던 날씨와 달리 하루 종일 기분이 엄청 좋았다. 사실 엉뚱한 예배당을 알렉산드르 넵스키 사원이라 착각해서 ‘생각보다 작네’하면서 돌아왔고(나중에 알았지만 결국 일정 상 다시 가지 못했다), 아점으로 공원 옆 러시아 패스트푸드점에서 치킨텐더를 시켰더니 닭날개가 나와서 당황스러웠지만. 그런데도 아무것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또 올 핑계가 생긴 거고, 닭날개도 맛있었으니까. 뜻밖의 닭날개를 뜯고 있자니 ‘어제도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지만, 내 나름대로의 최선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야무지게 콜라까지 한 모금 마셨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내 몫이었다.


예카테린부르크 정중앙에 있는 인공 호수. 1일 차에는 날씨가 좋아 카누를 타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었다. ⓒboybeen
세바스티아노프의 집. 디자인에 진심이어서 교회에만 허용되었던 지붕을 황금으로 칠하고 싶다고 청원했다가, 매일 철신을 신고 교회에 와서 죄를 비는 벌을 받았다. ⓒboybeen


체감상 예카테린부르크의 도보여행 코스인 레드라인은 이르쿠츠크의 그린라인보다는 짧은 듯했지만, 도시 규모나 역사에서 차이가 있어서인지 보다 알찬 느낌이었다. 만약 이 코스를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해야 한다면 공존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고르고 싶은데,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가 시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관광객의 하루 이틀에 그 모든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어려웠을 텐데 잘 조성되어 있어 인상 깊었던 부분.


작은 댐 덕에 생긴 도심의 인공 호수의 석판엔 현재 명칭인 예카테린부르크와 옛 명칭인 스베르들롭스크가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표트르 대제의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명이 혁명을 거치며 봉건적 색채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볼셰비키*였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으로 잠시 바뀐 것인데, 곳곳에 이러한 역사적 흐름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어 이해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점으로 도시는 옛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를 되찾았지만, 소속된 주는 스베들롭스크주라는 점이었다. 이 역시 시대의 흐름일 터.

* 볼셰비키는 '다수파'라는 의미로, 당시 레닌이 이끄는 좌익 세력을 지칭한다.


비틀즈의 벽. 러시아에서 비틀즈라니, 어색하긴 했지만 'Here Comes the Sun'을 듣자 정말 해가 떴다. ⓒboybeen


다양한 뮤지션들을 기념하는 공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점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소련 시절의 비소츠키나, 한국의 김광석과도 같은 전설적인 고려인 록스타 빅토르 최는 그렇다 쳐도, 마이클 잭슨비틀즈와 같은 비(非) 러시아 뮤지션들까지 품고 있다는 점은 의외이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명한 뮤지션들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솔직히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다고 느꼈다. 관광컨벤션학과의 문화관광자원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 지역주민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이 예산 낭비의 주된 요인이라고 배운 적이 있어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어제와 같은 행사들이 자발적으로 열리고, 평일 오전임에도 많은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음악과 함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걸 보니 제3자의 입장에서도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있어서 좋았다.


피의 성당 앞에 이 자리에서 희생되었던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의 동상이 있다. 묵념을 하는 러시아 분들도 많이 계셨다. ⓒboybeen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피의 사원이었다. 1918년, 러시아 황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된 곳이기 때문. 전제정치를 옹호했던 백군과, 혁명을 꿈꿨던 적군 사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00년대 초 러시아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가이드북에 적힌 몇 개의 문단이 전부였지만, 그날의 경험은 복학 후 <러시아역사> 과목을 수강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유독 꼼꼼히 살피던 나를 보며 관리하시던 할머니께서 외국인 학생이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칭찬도 엄청 해주셔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던 기억이 있다.


결국 핑크색으로 마무리되었던 나의 예카테린부르크 ⓒboybeen
해가 지기 전 전망대에 도착해 이틀간 들렀던 곳들을 찾아보다가 몇 시간을 서 있었다. ⓒboybeen
힘든 만큼 성장했던 나, 마침내 먹구름을 모두 걷어낸 예카테린부르크 ⓒboybeen


어제가 완벽한 실패였다면, 오늘은 나름대로 완벽한 성공이었다. 궂은 날씨에도 꿋꿋하게 웃으면서 잘 다녔고, 밥도 잘 먹었으니까. 비소츠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비틀즈의 노래처럼 하늘도 맑아졌다. 이 도시의 하루가, 나의 예카테린부르크가 핑크색으로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전망대에 올라 내가 지나온 곳들을 둘러보다가 결국에는 잘 해냈다는 생각에 살짝 울기도 했다. 시차 탓에 이른 밤이 되면 한국 친구들과 연락이 잘 닿지 않고, 한국과 달리 8월 말에 영상 8도를 찍는 시베리아의 바람을 맞으며 벌써 여행의 절반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상한 시간과 날씨 속에서 예카테린부르크의 밤을 질릴 때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 했던 하루, 조금씩이지만 성장하고 있었다.


-


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작가의 이전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