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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May 11. 2024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비소츠키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카테린부르크의 전경. 러시아의 도시엔 보통 큰 산이 없어 지평선이 보였다. ⓒboybeen
노을이 지고, 해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몇 시간을 전망대에 있었다. 별 다른 시설은 없었지만 풍경이 있었다. ⓒboybeen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만으로 3살. 주변에서 청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걱정하셨을 정도로, 또래에 비해 말이 늦었던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던 나이이기도 하다. 그러니 뭐. ‘밀레니얼 쇼크’ 정도 되는 단어들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지만, ‘글쎄요’ 말고는 별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 순간은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소중해 두고두고 우려먹고 싶은 순간일 수도, 또 다른 세기의 닷새 정도만 데쳐 먹을 찰나였을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니, 어떤 방식이든 자기 입맛에만 맞으면 그게 정답이지 않을까. 그렇게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하고 새 천년을 맞이했던 내가 1999와 2000에서 숫자 두 개를 뗀 19살과 20살의 사이에 섰을 때부터 나는 ‘징글징글한 의미부여충(실제로 누가 이렇게 놀렸다)’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카테린부르크역. 커스터드 같은 색깔의 건물에 '유럽-예카테린부르크-아시아'가 적혀 있다. ⓒboybeen
현대적인 건물 사이로 정교회 성당의 황금색 지붕이 반짝이는 게 러시아 도시의 매력인 것 같다. ⓒboybeen
중앙 백화점 쭘은 웬만한 도시엔 모두 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따뜻한 첫인상을 담아 보정했다. ⓒboybeen


그래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를 일정에 넣은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무려 대륙을 넘는 순간이니까. 포항에서 시작해, 동해에서 배를 타고, 몇 천 킬로미터를 달려 이젠 유럽까지 왔다는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갈 순 없었다. 그 험준한 산맥이 ‘유럽으로 향할 준비는 되었냐’고 으스댈 때, 지금까지의 여정처럼 예카테린부르크에서의 일정도 잘 이겨내서 유럽으로 넘어갈 자격이라도 얻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여기서 예카테린부르크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지정학 위치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우랄 산맥의 각종 천연자원이 모두 모여 있었던 만큼 광산업으로 시작해 금융업, 제조업, 상업 등이 골고루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이렇게 원래부터 돈이 모이고 있었던 도시였는데, 스탈린 시절에 우랄 산맥 인근 지역의 공업과 군수 산업을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며 현재까지도 대도시로 남아 있다. 그 덕인지 알록달록하지만 깔끔한 풍경, 널찍한 인공 호수에서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의 안정적인 모습이 지금까지의 일정과는 대비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근데 그 중요한 순간을 만끽할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바이칼에 ‘퐁당’한 이후 시작된 몸살이 거의 일주일가량 낫지 않았다. 다행히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날 때는 몸이 괜찮았던 것도 같은데, 오락가락하나 싶었다. 사실 이쯤 되니 아파서 서러운 것보다는 컨디션 때문에 여행이 망가지는 게 더 큰 걱정이었다. 스물아홉이나 된 지금에야 여행은 또 오면 되고, 오늘 하루의 내 건강과 컨디션을 먼저 챙길 수 있게 되었지만 스물셋 때는 그러지 못했다. 첫 배낭여행이라 하루하루가 아쉬웠고, 또 아까웠다. 아무튼 도미토리가 아닌 싱글룸에서 푹 쉬고, 첫 번째 날에는 바이네르 거리를 조금만 둘러보며 맛만 보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지만 걱정은 그치지 않았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최대 번화가인 바이네르 거리. 괜찮은 카페나 식당이 많아 여행하기 좋았다. ⓒboybeen
바이네르 거리 마이클 잭슨 동상에서 진행되었던 추모 이벤트. 도시 곳곳에 비틀즈의 흔적도 있어 신기했다. ⓒboybeen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잘 모르는 세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 이 시기까지도 전 세계인의 마음에 있는 삶은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boybeen


그런데 혹시 여행기 분량이 부족할 걸 걱정이라도 했는지, 잘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유럽 - 예카테린부르크 - 아시아’가 차례대로 적힌 기차역을 뒤로하고 곧바로 향한 숙소는 꽤나 많이 으슥한 골목에 있어 한참을 헤맸고, 엘리베이터도 없이 그 큰 배낭을 앞뒤로 메고 4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4일 만에 마주한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헐벗은 채 뻘쭘하게 서 있다가 물어보려 나가려던 순간 문고리까지 고장나버리니 뭔가 '핑' 도는 느낌도 들었다.


약 10분 가까이를 끙끙대다 겨우 문을 열었다. 화낼 재간도 없이 지쳐버린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보일러 켜는 법을 물었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스태프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가끔은 ‘not immediately’하더라”였다. 그 가끔이 왜 지금일까? 결국 몸살로 깨질 것 같은 머리에 얼음장 같은 찬물을 들이붓는 맞불을 질러야 했다. 그러고 꿋꿋하게 밖으로 나갔지만 아무래도 흥이 나지 않아 시내를 정처 없이 헤매다 쉴 곳을 찾아 앉아 있길 반복했다. 푸근한 노을빛 거리의 사람들은 나만 빼고 알록달록했다. 확실히 나만 회색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왜 그리 심술 났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는 날. 그래서 나 자신이 더 싫어지는 그런 날들이 있지 않은가.


예카테린부르크의 노을. 유독 핑크색이 돌아 여느 유럽 도시 못지않게 로맨틱하고, 비현실적이었다. ⓒboybeen
바이네르 거리의 끝의 대로변, 퇴근 시간대가 되어 모두가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풍경 ⓒboybeen


심지어 사람들이 다 친절해서 더 비참했다. 바이네르 거리에는 다소 뜬금없지만 마이클 잭슨 동상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꽤 큰 규모의 기념행사가 진행이었다. 내가 유일한 아시아인으로서 기웃거렸던 건 전혀 연관이 없었겠지만 주최자는 다음 곡으로 ‘We are the world'를 재생했고, 참가자들은 굉장히 시의적절한 선곡이라 생각했는지 감동받은 표정으로 세계평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순간은 꽤나 뭉클했지만, 어느새 내 손에 쥐어진 하얀 풍선이 나풀대는 걸 보니 괜히 심술이 났다. 오늘 밤 숙소에 돌아갔을 때 immediately 하게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게 나 자신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는 더 중요한 일이라 그랬던 걸까?


예카테린부르크 지하철역. 한국에서는 더 이상 보기 힘든 역무원과 시민의 대화도 정겹게 느껴졌다. ⓒboybeen


결국 입술만 툭 튀어나온 채, 굳이 오늘 하루의 불운과 재수 없음을 곱씹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전히 ‘Not Immediately’했던 찬물을 몸에 끼얹는 순간 깨달았다. 오늘 하루를 망쳐 버린 건 뭔가 엉성했던 숙소 때문도 아니었고, 몸살 때문도 아니었다. 밝고 순수한 누군가의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꼬일 이유도 없었는데 꼬여버린 내 심보와 유달리 안 따라줬던 컨디션이 문제였다. 어쩌면 더 솔직했고, 어쩌면 더 어리기도 했던 여행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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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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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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