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나는 겁이 많다. 키라도 컸다면 덩칫값 못한다고 욕먹을 수준으로 쫄보라서, 어쩌면 덩칫값을 잘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특히 첫 해외 배낭여행이었던지라 항상 여러모로 경계가 심했는데, 네 번째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행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한 밤 중에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러했다.
웬만하면 기차역 앞은 번화가니까 건물이 많든 주변이 밝은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역은 뭔가 이상했다. 음산한 조명이 앙가라강의 밤안개에 부딪혀 흩어지고 있었고(강 옆이니까 당연함), 역 앞에는 그 무섭다던 러시아 10대 남자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우던 담배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다(10대가 아닐 수도 있음). 택시기사들은 초점 잃은 눈으로 바가지 씌울 여행객들을 찾고 있었으니(이건 상상이 맞음), 어서 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았고, 모두가 일상을 보내는 것뿐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쫄아 있었다.
열차가 도착했다는 방송을 듣고 플랫폼으로 나섰는데, 내 칸(러시아어로는 바곤)이 없었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눈치 없이 온 사람처럼 멀뚱멀뚱 서있었는데, 저 멀리서 무려 6개 칸이 오더니 꽝! 하고 붙어버렸다. 이 상황이 나만 신기한 걸까?라고 생각하며 돌아보니 러시아인들도 모두 소소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짝짝.
사실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경험 삼아 3등석 대신 2등석 2층 티켓을 끊었는데, 가방을 3층 짐칸으로 올리는 것도 문제였고 모르는 사람들과 ‘안에서 잠기는’ 방 하나를 써야 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밀폐된 공간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큰일이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우리 칸에는 나밖에 없었고, 기차가 덜컹거리고 나도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1시간쯤 후에 젊고 마른 러시아 남자가 한 명이 큰 짐을 들고 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빠르게 진도를 나가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블라디슬라프와 만난 순간.
임관한 후 1년 만에 첫 휴가를 명 받았다고 소개한 블라디슬라프는 나를 만나자마자 아주 격하게 반가워했고, 각종 간식을 건네며 본인의 전화번호까지 내 폰에 정성스레 찍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수료식 사진(늠름하게 정복을 입고 있었다)과 가족사진, 마라톤 대회에서 은메달 따고 찍은 기념사진 등등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사진도 찍고, 나도 엽서를 주었으니 정말 진도가 빨랐다.
짧은 러시아어로 힘겹게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니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적어달라고 했는데, 마땅한 펜이 없자 차장한테 직접 뛰어가서 가져오기까지 했다. 이 모든 과정이 15분 정도 걸렸으니 실행력 하나는 굉장한 사람이었던 것. 이렇게 텐션이 높은 러시아인은 처음 만나봐서 순수한 모습이 귀엽기도, 고맙기도 했다.
전날 꽤나 고된 일정으로 다녔던지라 웬만하면 깨지 않을 심산으로 잠에 들었는데, 아침에 열차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깨웠다. 치킨이랑 생선 중에서 고르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상황인고 하니 대충 넘긴 기내식 안내가 떠올랐다. 잠에 들 때까지 비어 있었던 맞은편 칸에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타고 있었는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이 나고 있는(?) 나를 보고 무언가 먹는 연기를 엄청 열심히 해주셨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함께 물어보길래 '강매당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치킨으로 요청드렸는데, 알고 보니 무료에다가 양도, 맛도 꽤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아까 기내식을 몸으로 열심히 설명해 준 부부의 이름은 니콜라이와 스베틀라나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혼나고 있었던 덕에 나를 상당히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나를 도와주시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편인 니콜라이는 블라디슬라프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이는 러시아군 장교였다. 여행을 다녔던 2018년 당시 횡단열차에서 잘생긴 군인과 친해졌다는 내용의 영상이 유튜브에서 아주 화제였는데, 나도 그런 트렌드에 걸맞은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달달하던 유튜브 영상들과는 느낌이 정말 많이 달랐다. 세 분 모두 국제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으셨기 때문. 압박면접받는 기분으로 처참한 러시아어와 영어, 손짓과 발짓을 모두 활용하여 질문들을 쳐내기(?) 시작했는데.. 평창 올림픽을 잘 봤다는 대화는(러시아 국적으로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개방적이셨다) 북한과의 관계, 탄핵 정국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가버렸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서로의 아주 짧은 영어와 러시아어로, 1:3으로 이루어졌으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던 순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 되자, 내가 너무 긴장해 보였는지 한국에서 유명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차마 블랙핑크의 불장난 같은 걸 부를 수도 없고 해서 뭐라도 틀어드리려 폰을 켰는데, 하필이면 내 폰에 가득하던 몇 곡의 K-POP을 제외하면 인디밴드와 80-90년대 노래들 밖에 없었으니 이 상황에선 실로 극단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다 한국도 징병제라서 입대를 앞둔 심경을 표현하는 노래가 있다며 ‘이등병의 편지’를 들려 드리며, 매우 엉성한 러시아어로라도 가사를 해석해 드리니 무슨 느낌인지 아시겠다며 웃으셨다.
이상하고, 또 신기한 밤이었다. 주황색 등이 켜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2등석, 4인실에는 한국인 대학생과 러시아인 셋이 타고 있었다. 우리 넷은 그렇게 꿀렁꿀렁하는 밤기차를 타고 김광석의 옛 노래를 들으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아주 짙은 어둠으로 덮인 바깥엔 간혹 무언가 달빛에 반짝였다. 어쩌면 일평생 한 번도 스쳐가지 않았을 사람들, 지금이 지나면 다시 만나기도 힘들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던 그 순간들이 간혹 떠오르곤 한다. 겁만큼이나 운도 많은 내게 횡단열차의 밤은 항상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