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카잔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 그래서 다신 가기 싫은 나라가 내 전공이 되어버린다면, 과감히 저는 그만두려구요.
과연 저는 수능특강과 전공서적 중 어떤 걸 펴게 될까요?
아니, 무사히 한국에 돌아갈 수나 있을까요? 이런 저의 생존기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
1박 2일이지만 별 일이 다 있었던 예카테린부르크를 마무리하고, 카잔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서 이 여행기의 프롤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여행 초반에(늦어도 바이칼 즈음) 주변에 알리려 했지만, 워낙 제목이 자극적이기도 하고 여행도 생각보다 쉽지 않아 미뤘던 게 중후반까지 와버린 것. 10,000자 가까이나 되는 분량의 초고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아마 버릇 같은 구구절절함을 적당히 덜어내면 반절까지는 줄어들 것이고, 거기서 이성을 조금만 더 차리면 다른 분들도 편히 읽을 수 있는 호흡이 잡힐 것이다. 감정적으로 쓰였던 글들은 대개 그랬으니까. 일단 대충은 적어냈으니 덜어내는 것은 금방이라 생각하며 누운 채 팔다리를 쭉 뻗었다. 창밖엔 보름달이 떠 있었고, 가끔씩 수면등보다 밝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 숲이 지나가곤 했다. 무슨 영문인지 4명밖에 타지 않았던 조용한 객차에도 시퍼런 달빛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이었다. ‘조용한 밤기차의 흔들리는 달빛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뻔하고도 감상적인 서사가 아니라, 내가 이 공간에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혼자서, 이렇게 길게, 러시아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러시아에 가는 건 프랑스어라던가 중국어 전공자보다는 훨씬 말이 되긴 하지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러시아어 전공 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스물세 살의 나에겐 충분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사실 이 글을 다시 리마스터링 하고 있는 스물아홉에도 내 삶에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게 낯설긴 하니,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싶다.
어쩌다 보니 카잔에서야 첫 소식을 전하게 되었지만, 가장 여행 제목과 충돌하는(?) 도시여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학과에서 카잔연방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올 수 있어서, 아무 반전 없이 복학한다면 다시 마주하게 될 도시이기 때문. 그래서 카잔에서는 집 보러 다니는 자취생 같은 마음가짐으로 구석구석 살펴보고자 일정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수준인 3박 4일로 길게 잡았다. '장기여행자에겐 자신만의 일요일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20일 가까이 여행을 하다 보니 몸소 느끼고 있기도 했고.
늦은 오후, 나지막한 햇살 아래 도착한 카잔역은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었던 지역들인 만큼, 다른 도시들보다 정비된 느낌이 훨씬 강했다. 월드컵 폐막이 1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카잔이 목적지인 사람도 몇 없었고,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역 곳곳에 붙어 있던 경기 일정표와 자비바카(늑대 캐릭터 마스코트)만이 ‘얼마 전엔 그렇게 난리였는데 껄껄’하며 정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줄줄이 탈락하는 대이변이 있었던 도시, 무려 한국이 '카잔의 기적'으로 독일을 꺾었던 곳이니 여러모로 난리가 났다는 건 사실이기도 하다.
* 예카테린부르크 아레나에서도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었지만, 조별 1-2차전 4경기로 많지는 않았다.
카잔의 첫인상은 꽤나 특이했다. 기차역 앞엔 으레 이것저것 사 먹을 무언가가 있고, 끈질긴 택시 호객꾼도 있기 마련인데, 여긴 너무 평화로웠다. 커다란 주차장이라거나 정류장 대신 깔끔한 공원이 있었고, 택시조차 한 대 없는 풍경에 할머니 한 분이 햇볕을 쬐고 계셨다. 도시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예상치 못한 이 그림, 너무 좋았다. 비스듬한 저물어가는 여름의 햇빛만 가득했던 거리는 오랜 시간을 거쳐 구석구석을 다듬은 흔적이 보였고, 사람들의 표정에도 늦은 오후와 닮은 여유가 묻어 있었다.
숙소에 대충 짐을 던져두고 교환학생을 다녀온 학과 선배들의 SNS 너머로 볼 수 있었던 쿨 샤리프 사원으로 직행했다. ‘러시아에도 이슬람 사원이 있구나’ 하고 신기해하기도 전에, 사진만으로도 ‘어떻게 저런 게 존재할까’ 싶었던 그것. 실제로 마주하니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특히 절제된 흰색과 하늘색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원 그 자체로도 아주 깔끔하게 아름다웠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깔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어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건축물의 인공적인 면을 최소화하는 데에 의미를 두고 절제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런 추측을 얹어볼 뿐.
그런데 쿨 샤리프 사원은 ‘카잔 크레믈’의 일부였다. 쿨 샤리프 사원 옆에는 박물관도 몇 개 있고, 슈움비케 탑도 있고, 타타르스탄 대통령 관저와 성모수태 정교회 성당(놀랍게도 이슬람 사원과 정교회 사원이 바로 옆에 있다)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쿨 샤리프처럼 새하얀 카잔 크레믈이 감싸고 있었다. 이걸 언제 다 봐야 하나 아찔해할 때쯤, 크레믈이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는 게 생각났다. 이미 카잔에서 좀 잘 나간다는 힙하고 젊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잔디밭에 누워있었다. 이 좋은 걸 얘네만 보고 있었다. 결국 난 카잔에서의 4일 내내 이곳을 찾았는데, 밤기차를 앞두고 마지막을 찾았을 때에도 더 눈에 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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