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카잔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교환학생을 다녀온 과 사람들에게 어렴풋이 들은 카잔은 조용하고 여유로워서 좋은데, ‘은근히’ 커서 ‘은근히’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가이드북이나 블로그 후기들에서도 절대 규모가 작아 보이지 않는 호수, 공원, 건물들을 보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누가 카잔에 교환학생을 갔다더라, 거기는 어떻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심할 수는 있어도 살기엔 엄청 좋겠는데..? 부자 동네가 다 그렇잖아..?’ 하며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도시가 카잔이었다.
그렇다 보니 기차역과 거리가 깨끗한 건 이미 각오가 되었던(?) 부분이라 큰 감흥이 없었다. 다만 예카테린부르크도 나름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었던 도시였음에도 여흥 비슷한 무언가도 느낄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카잔은 아직도 많은 것들이 남아 있어서 좋았다. 축구에 영 관심이 없어 일부러 월드컵 기간을 피해서 여행을 잡았는데, 그래도 내심 아쉬웠던 마음을 덕분에 채울 수 있었다. 바우만 거리 중앙에 월드컵이 크게 적힌 관광안내소도 설치되어 있었고, 나 정도 덩치의 자비바카 모형 옆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직 재고가 남은 월드컵 관련 제품들은 2+1으로 할인을 하고 있길래 덕분에 기념품으로 조금 쟁여두었다.
그럼에도 카잔을 크게 기대했던 이유는 전체 일정 중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아닌 종교를 볼 수 있었던 두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노어과 학생이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야 러시아가 연방국이고, 다민족 국가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는데, 이 덕분에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면서도 새로운 요소가 많아 지루함이 적었다. 22개나 되는 공화국에 각각의 헌법, 대통령, 의회, 그리고 문화가 존재한다고 하니, 수많은 소수민족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러시아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는 둘러보면 볼수록 볼 게 많은 나라이다.
그리고 특히 각각의 문화가 충돌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앞서 방문한 부랴티아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의 시베리아 불교가 그러했듯,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 카잔에선 곳곳에서 정교회와 공존하는 이슬람을 볼 수 있었다. 당장 크레믈만 가더라도 쿨 샤리프 모스크와 성모 수태고지 정교회 성당이 하나의 성벽 안에 있었으니까. 덕분에 카잔에서는 한국에선 쉬이 보기 힘든 코란이나 히잡 가게도 많았는데, 히잡이 그렇게 쨍한 원색일 수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컬러감을 적절히 소화할 수 있는 상하의까지 함께 DP 되어 있어서 이 역시 누군가의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곧 문화의 모습이었다.
9월을 맞이한 카잔은 월드컵이 휩쓸고 가서인지 관광객도 적었고(사실 거의 없었고), 학기도 시작되어 차분한 일상을 볼 수 있었다. 카잔연방대학교 앞 무려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대머리가 아닌 청년 레닌 동상엔 설렌 표정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학교 근처 검은색이 아닌 '검은 호수'엔 새로운 시작에 긴장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의 학생들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카잔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엔 이런 차분한 일상과 소소함이 있었다. 카반 호수를 천천히 가로지르던 오리배, 30분이 넘게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타타르스탄 마을의 플리마켓, 저녁마다 쿠키와 우유를 챙겨주던 호스텔까지도.
일정도 넉넉했고, 한국보다 빠르게 찾아온 선선한 가을바람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처럼 느긋해질 수 있었던 건 학과 단톡방에 카잔에 계신 한 선배님이 올려주신 가이드북 덕인데, 코스별로 정리해 주셔서 ‘다음엔 어디 가지’하는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카잔에 도착하자마자 그 선배님께 조심스레 연락을 드렸다. 가이드북에 대한 감사 인사도 전해드리고 싶었고, 여행 제목이 제목인지라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연락에 감사하게도 응해주셔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실 한 번도 뵙지 못한 분께 연락을 드린 것도, 해외에서 약속을 잡게 된 것도 처음인지라 꽤나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여행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유심히 들어주셔서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 아직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배님께서 러시아 문학 박사 과정 대학원생이셨던 덕에 ‘노어과’가 아닌 ‘노어노문학과’로서의 고민들도 조심스레 나눌 수 있었고, 그때의 말씀들과 이 여행에서의 몸으로 겪은 경험들이 모여 반전 없는 복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카잔연방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선배님께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올게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2020년의 2월, 아직도 길거리엔 눈이 많고, 호수도 얼어 있어 2년 전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조금은 여유나 정이 없어진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도시 곳곳에 그때의 좋았던 기억들이 남아있어 봄날이 오면 예전 코스대로 다시금 걸어볼 생각이다. 테마와 가장 잘 어울렸던 여섯 번째 도시, 카잔의 모두에게 어서 봄이 왔으면.
* 이 글의 초고는 2020년에 작성되었습니다. 당시 꽤 많은 준비 끝에 교환학생을 출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현지에서 학기를 겨우 반쯤 진행하고서 특별편으로 귀국하여 온라인 수업으로 학기를 마쳤습니다. 그때는 아쉬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5년쯤 지나니 예상치 못했기에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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