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말을 글로 옮겼을 때 가장 읽기 편하고, 살아있는 글이 된다 생각하고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일상으로 하는 말들을 따져보면, 글에서 배우고 말로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한자와 배배 꼬은 글을 그저 나보다 앞선 사람이 썼으니까 맞겠거니 하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솔직하게 물어보세요. 지금 보는 책이, 논문이, 보고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바로 알겠는지. 그 내용을 곧바로 한 줄짜리 글로 정리하거나 말할 수 있는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헛된 것을 주워 담느라 귀한 시간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AI가 사람 말을 쓰고 감정을 익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말도 글도, 거기에 담아야 할 정신도 올바르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사실 이번 문장은 어머니께서 아는 분께 “내 보영이에요.” 하고 저를 소개한 말을 가져온 것입니다. ‘보영이’를 ‘오빠’로 바꿨죠.
서양 사람들은 ‘나’를 잣대로 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한국 사람은 주변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죠. 예의를 따지는 나라였으니 부모형제와 이웃을 생각해서 행동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 ‘우리 회사’, ‘우리 반’,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하죠.
그런데 서양 말법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공교롭게도 우리 말법이 못난이 취급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하면 여러 사람의 어머니이냐고 하면서 말이죠.
위에서 저는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문법도 말법이 곧 글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의 문법도 마찬가지이죠. ‘우리’ 하고 말해왔으니 ‘우리’하고 글로 옮겨 써야 옳습니다.
우리도 잣대가 있는데, 왜 남의 잣대로 우리 것을 깔보고 갈아엎어야 할까요.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던 부모가 사그라지고, ‘내 자식 귀한 줄만’ 아는 부모가 똑똑하다고 하는 사회를 그려보세요.
그들의 말과 글, 나아가 그 삶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나’만 있죠.
이렇게 쓰고 보니, 참으로 말은 힘이 크네요.
“
우리 오빠예요. 우리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