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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내가 한 큰일

울창한 숲이 되는 상상

by 김보영

해가 떨어지고 아빠와 삼 남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사흘이면 끝냈다는 모내기를 닷새째 이어가고 있다. 은근슬쩍 물병을 아빠 가까이에 둔다던가, 손 씻을 물을 대야에 받아두는 일을 이제는 다들 대놓고 했다. 모두 아빠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하라거나 좀 쉬라거나 우리가 하겠다는 말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뒷정리를 마친 용태와 보라는 먼저 자기들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갔다. 막둥이는 내일도 일하기로 해서 엄마 아빠 집에서 자기로 했다. 아빠는 평상에 누워있고 막둥이는 창고 문들을 잠갔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안 번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모 심을 것도 다 준비해 놨는데, 언제 말도 없이 논을 팔았대요?”


저쪽에서 남자가 뭐라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보세요, 임차인이 누구 허락받고 논 갈았겠어요. 논 주인이 벌라 해서 갈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 약속도 없이 우리 애 아빠가 뭐 한다고 고생해서 논 갈고 물 댄답니까? 말씀 참 이상하게 하시네.”


막둥이가 엄마 옆에 앉았다.


“아니, 우리는 논 주인이 바뀐 줄 몰랐다니까요. 말을 해줘야 알지. 모 심을 때 다 돼서 새 논 주인이라고, 농사짓지 말라고 하면 그게 말이에요? 속 보인다고 생각 안 해요?”


엄마 목에 핏대가 도드라졌다. 아빠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엄마 쪽으로 기울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아빠, 그냥 계세요. 제가 말할게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둥이는 엄마한테 핸드폰을 뺐다시피 했다.


“방금 뭐라 하셨어요. 경우 없는 짓이요? 시골 인심? 아저씨 같은 사람들한테 무슨 덕을 보겠다고 인심이야. 우리 부모님 이때껏 남의 등 처먹고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에요. 경우가 있고 없고, 그딴 소리 들을 분들 아니라구요. 아니, 왜 도둑놈이 큰 소리를 쳐요?”


막둥이는 차분히 말하기는 해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떻게 하늘이… 내가 죄 안 짓고 살려고 입때 아등바등했어도…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하고…”


아빠가 가슴을 치며 힘겹게 몇 마디 뱉었다. 그 말이 막둥이가 참는 걸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목소리에 더더욱 날이 섰다.


“왜 우리 아빠를 못 벌어먹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말해요. 있던 논도 팔려고 하는 마당인데,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냐고요. 직불금 받아먹으려고 이러는 거 모를 줄 알아요? 누굴 가르치려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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