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쉬어가는(?) 코너로, 전공불문하고 박사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테마인 Publication을 짚어볼까 합니다.
제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라 주로 사회과학 계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자연과학이나 순수학문에서는 다른 관행이 적용될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Publication이라고 할 때 보통은 peer-reviewed journals articles, short articles, books or book chapters 등을 일컫는데요. 물론, 위의 목록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계에서의 '공식기록'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부분은 'peer-reviewed process'를 거쳤느냐 여부가 될 것이고, 이러한 기준을 따른다면 주로 위의 4가지 형태로 publication이 좁혀지게 됩니다.
Peer-reviewed process 개념의 핵심은 상호검증입니다. Two-way blinded review가 있고 one-way가 있는데요. Two-way를 따를 경우, 원고를 제출한 쪽도 원고를 읽고 리뷰를 해주는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리뷰를 하는 쪽도 원고 제출자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One-way의 경우, 원고 제출자는 리뷰어의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리뷰어는 원고 제출자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방식입니다. 어느 방식을 택하든 핵심 아이디어는 같습니다. 어차피 글과 주장이란 주관적인 생각을 담고 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객관성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상호 검증을 택한 것입니다. 학계란 넓은 듯 하지만 대단히 지엽적이라 특정 주제에 대해 리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모아보면 그다지 많지 않음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학회다 워크샵이다, 서로 알고 지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요. 따라서 어느 대학의 교수 A가 쓴 글이 그와 친한 교수 B의 우호적인(그리고 편향적인) 평가를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통은 two-way blinded review 과정을 거칩니다.
저널 아티클이든 책이든 어떤 형태로든 peer-review process를 거치는 과정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작해야 합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2년까지, 그리고 책 출판의 경우에는 최소 3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오늘 당장 벌어지는 사회과학적 현상에 대한 심층 연구가 하루아침에 저널 논문이나 책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책은 일반 시중 출판사가 아니라 university press를 통해 출판되는데 (e.g., Oxford University Press, Cornell University Press 등등), 첫 원고 투고 후 몇 차례에 걸친 리뷰 과정은 "최소 3년"이라는 기간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내부적 검토를 마치고 책 계약이 성사된 후부터 원고 수정, 끊임없는 리뷰와 또 수정, 편집을 거치는 기간만 최소 3년이지요. 따라서 보다 최신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접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빠르게" 나오는 저널 아티클이 낫고, 책은 보다 많은 사례연구와 거시적인 분석을 위해 많이 찾아봅니다.
보통 원고를 처음 제출하면 desk에서 1차로 거릅니다. 여기서 'desk'라 함은, editor 수준에서 '이 논문은 우리 저널과 어느 정도 잘 맞겠다" 혹은 '이 논문은 우리 저널에 게재할 수준이 된다'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고퀄리티의 글이라 하여 모든 저널에서 받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원 프로그램이든 잡마켓이든 어디서든 그렇듯이, 결국은 "fit"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와 잘 맞느냐, 결을 같이 하느냐, 가 중요한 것이죠. Desk review 단계에서 8-90%에 해당하는 원고가 reject 됩니다. Desk rejection을 빨리 해주는 저널도 있고 이 단계에서만 1-2달을 잡아끄는 저널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경험자들만 알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저널 투고 전 주변 교수나 동료들의 경험을 귀담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reject은 학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학생이라 하여 리젝이 더 되고 교수라 하여 리젝이 덜 되는 것도 아닙니다), desk에서 빨리 판단해 주면 다른 저널에 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Desk에서 통과가 된다면 해당 저널이 보유하고 있는 reviewers들에게 선별적으로 원고를 보냅니다. 리뷰를 거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저널은 reviewer pool을 갖고 있습니다. 지역 중심으로 나누기도 하고 방법론, 이론, 연구 주제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눠서 해당하는 원고가 들어올 경우 이를 가장 잘 심사해 줄 수 있는 전문가에게 리뷰를 의뢰합니다.
리뷰 결과는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Acceptance (통과), Revise and resubmit (R&R, 수정 후 통과), Rejection (거절)이 그것입니다. Desk review에서 살아 남아도 실제 리뷰 과정에서 리젝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R&R은 가장 흔한 형태의 '긍정적인' 리뷰 결과입니다. 제 경험과 제 주변의 모든 경험을 통틀어서 단 한 번의 수정 요청 없이 "통과"를 받은 사례는 단언컨대 한 건도 없습니다. 맨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어차피 주장이란 주관적이게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나름 각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음, 그래, 자네 말이 다 맞네"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을 턱이 없습니다. 어떤 논리든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요. 리뷰어들의 시각을 통해 최대한 그 허점을 메꾸고자 하는 것이 peer-reviewed process'의 목적입니다.
다음으로 어떤 저널에 투고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요. 정답은 없습니다만, 몇 가지 고려사항은 있습니다. Journal Impact Factor(JIF, 저널 영향력 지수)라는 인덱스도 하나의 고려사항이 될 수 있지요. 이는 해당 저널에 게재된 논문이 특정 연도 동안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를 측정함으로써, 논문의 영향력을 계량화한 것입니다. 당연히 많이 인용될수록 높은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디나 trade-off가 있기에 높은 JIF 지수의 논문은 리젝션 비율이 95%에 달할 정도로 높고, 논문이 최종 게재되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각 분야에서 top 10에 속하는 저널에 투고한다면 본인의 논문이 세상의 빛을 보는 데에 짧으면 1.5년, 길면 2년 정도 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논문 하나 게재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다니! 그럼 나는 대충 영향력 지수가 낮은 저널에 빨리 투고할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지요. 목에 칼을 들이대고 논문을 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은 이상, 소중한 지적재산권인 논문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은 곤란합니다 (놀랍게도, 논문을 해당 저널에 낸다는 것은 그 논문에 대한 나의 지적재산권을 해당 저널에 넘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2년씩 걸리는, 리젝률 95%에 달하는 탑급 저널 논문에 목매달고 있을 순 없죠. 이럴 때 지도교수나 주변 교수, 그리고 동료들의 경험담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옵니다. 세상의 많은 일은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미 투고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소중한 내부 정보를 얻을 수 있지요. 영향력 지수는 아주 탑급이 아니더라도 내부 editor들의 수준이 높다든지, reviewer pool이 상당하여 수준 높은 리뷰를 받을 수 있다든지, 각종 계량화되지 않은 이점이 존재한다면 해당 저널에 투고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오히려 빨리 연구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나의 인용지수가 올라가는 장점을 취하는 편이 나을 수 있어요. 또한 상황에 따라 빨리 실적을 내야 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럴 경우에도 영향력 지수가 아주 높진 않지만 어느 정도 중상급이고, review process도 지나치게 느리지 않으며, 좋은 리뷰를 받을 수 있는 저널이 있다면 이를 선택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Final defense를 하던 날, 그리고 그 이후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학위 논문을 저널 논문 혹은 책으로 낼 것이냐"에 관한 것이었어요. 보통은 졸업 후 첫 1-2년 동안 박사 학위 논문을 쪼개서 2-3개의 저널 아티클을 내고요. 그 과정에서 연구를 보완하여 3-4년 내 university press와 계약 및 지루한 리뷰 과정을 거쳐 책을 내게 됩니다. 정치학에서 흔한 패턴이라고 알고 있는데, 다른 인문/사회과학 계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저희 지도교수님들 세대만 봐도 학위 과정 중에 publication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졸업 후 얼마든지 저널 아티클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그렇게 해도 포닥이나 테뉴어 트랙 교수직에 안착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무럭무럭 시간이 지나, 사회는 초경쟁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고 학계도 비슷한 트렌드를 목도합니다. 이제는 학위 과정 중에 publication을 내는 것이 전혀 드물지 않고 오히려 필수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publication이라는 공식기록을 갖고 있어야 포닥 지원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고, 좋은 포닥 자리에서 publication을 몇 건 추가해야 겨우 정년보장이 되는 교수직에 지원이나마 해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노교수님들 중에서는 "박사 논문만 잘 쓰면 먹고 사는 데에 지장 없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아직 계신데, 이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다"와 같은 무력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고도의 경쟁 사회에서 "개룡남"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박사 학위 논문을 찾아서 보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저널 아티클이나 책의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면 학술적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publication을 경험해 볼 수 있느냐의 여부는 상당 부분 지도교수의 도움에 달려 있습니다. 보통은 지도교수랑 공저(co-authoring)를 하게 되는데요. 이때 논문 작성 공헌도에 따라 주 저자 그리고 공동저자로 나눕니다. 주 저자는 크게 제1 저자 (first author) 그리고 교신저자 (corresponding author)로 다시 나뉘고요. 공동저자는 제2 저자, 3 저자, 등이 있습니다. 공중보건학, 의학, 심리학, 실험결과를 도출하는 자연과학 논문 등을 보면 공동저자만 5-7명 붙어있는 경우를 보실 수 있는데요. 이들 모두 해당 논문에서 다루는 연구에 크고 작게 기여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사회과학 -- 특히 정치학, 정책학, 사회학, 인류학 등 --의 영역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입니다. 공저 논문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많아야 3명이고 보통은 2명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Publication을 "공식기록"의 관점에서 보자면, 많은 경우 단독저자 (single-author) 혹은 1 저자까지만 인정해 줍니다. "인정"이라는 단어를 쓰니 조금 어폐가 있는 듯합니다만, 실제 교수 임용 과정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지 교신저자나 공동저자들의 공헌도를 무시하는 발언은 절대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publication machine이라고 불리던 교수가 정년 심사에서 탈락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수많은 논문들이 90% 이상 공저였기 때문이었죠). 단독저자는 자기 논문 자기가 100% 책임지고 쓰는 것이고요. 공저 논문의 경우 1 저자는 논문에서 다루는 연구, 아이디어, 데이터 분석 등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저자입니다. 교신저자는 말 그대로 해당 저널 및 리뷰어들과의 소통을 담당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학생(혹은 주니어 학자들)의 아이디어로 공저 논문을 쓸 때 학생을 제1 저자로 올리고 지도교수(혹은 시니어 교수)가 교신저자로 앉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학생 혼자 논문 작성해서 저널에 낸다면 아주 훌륭하겠으나 대부분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지요. 아이디어는 학생에게서 나왔을지언정, 어떤 형태로든 지도교수의 도움, 검증,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교신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1 저자의 이름값은 그냥 굴러오지 않습니다. 논문의 핵심 아이디어, 데이터 분석, 라이팅의 85% 이상이 본인에게서 나와야 1 저자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애로운 지도교수 혹은 마음 넓은 동료가 "1 저자 시켜줄게, 나랑 논문 쓰자" 하더라도 덥석 물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아무리 1 저자가 탐난다 하더라도 세상에 공짜는 없고요. 요즘같이 클릭 한 번으로 살아온 인생을 다 털어볼 수 있는 시대일수록,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편이 대대손손 이롭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지도교수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석사 때부터 1 저자로 영문 저널에 투고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한국어 북챕터 작성도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학계에서는 single author로서 작성한 연구 논문을 가장 높이 쳐주기 때문에, 특히 석사 때 공저 형태로 출판한 논문은 아무리 1 저자로 작성했다 하더라도 내세우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이력서의 한 줄 채우는 용도로는 쓸 만합니다). 물론 탑급 저널에 게재했다거나,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거나, 혹은 내로라하는 학회에서 상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만, 아직까진 그런 사례를 듣지 못했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지도교수가 1 저자일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봅니다).
그럼 이름을 드높이지도 못하고, 그저 그런 논문으로 썩힐 일을 왜 사서 고생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결과로만 해석될 필요는 없지요. 저는 publication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지도교수님과 첫 공저를 하면서 박사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키웠기 때문인데요. 교수님과 새벽 3시가 넘도록 통화를 주고받으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출산의 고통'을 느끼면서 뜨는 해를 마주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 연구하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해봐도 좋겠구나,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 자석처럼 이끌리게 되었지요. 그 이후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졸업하기까지 숱하게 머리를 쥐어뜯고 본인의 아둔함을 한탄하는 밤을 보냈습니다만, 첫 공저가 논문으로 나올 때의 기억은 아직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날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아직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나름 "생산적인" 석사생이었는데, 박사과정에서는 꽤 오랜 시간 publication으로 내세울만한 "공식기록"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당시에는 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지표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 적도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박사 과정 중 논문 게재를 하는 일이 흔해졌고 이것이 능력의 척도로 여겨지는 풍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Publication이 늦어진(?)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내세울 연구 결과가 없기 때문이었죠. 첫 4년까지는 코스웍에 종합시험, 그리고 연구계획서 승인으로 바빴기 때문에 논문에 투고할 만한 연구 실적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가다 이 시기에 논문 게재를 하는 똘똘이 스머프들도 있는데요. 석사 때부터 끌고 온 연구를 마침내 세상에 내놓거나 코스웍을 하면서도 본인의 학위 논문 주제를 1-2년 차 때부터 미리 잡아서 일찌감치 끌고 오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북미식 코스웍 학제를 따르는 경우라면 후자의 사례는 그렇게 흔한 유형이 아닙니다. 학위 과정 중에 publication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필드워크를 다녀왔거나 혹은 데이터 분석을 마쳤거나 한 경우이다 보니 대부분 후반기에 일어납니다. 학위논문 작성 1년 전 즈음이면 어느 정도 연구 방향도 뚜렷하고 데이터 분석값도 나왔을 시점이니까요. 연구 주제, 연구 질문, 그리고 데이터 분석 없이는 학술 논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가 publication에 대해 가끔 조급한 마음을 드러낼 때면, 박사 지도교수인 판다곰 선생은 저를 진정시키기 바빴습니다. 어차피 내놓을 것이 있어야 출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놓을 것이 생겼을 때 공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면 되니 너무 미리 조급해하지 말라고요. 게다가 학과의 다른 교수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사 과정부터는 어느 정도 예비 '사회인'인데, 석사 때야 그저 그런 수준의 논문을 귀엽게 봐줬을지 몰라도 박사 때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으니 자신 없으면 publication이든 학회발표든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말도 했지요. 교수마다 입장은 다르겠습니다만, 박사과정생으로서의 책임/무게를 보여주는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박사 과정 후반기, 어느 정도 연구 주제에 대한 큰 그림이 잡히면서 다양한 형태의 publication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Journal article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는데요. Policy report, book chapter, working paper와 같은 경로는 "승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진 모르지만 저에겐 각자 나름의 재미로 자리매김 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번아웃이 오거나 아이디어가 막혔을 때 간단한 publication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연구의 방향을 잡을 수도 있었고요. Policy report를 작성하면서 정책결정자들이 진정 듣고 보고 싶어하는 내용을 잘 정리해서 알려주되 학술적 깊이를 어떻게 후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고양이 떼를 몰고가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 것 처럼 북챕터 과정은 정말 지난하고 오래 걸리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명, 20명이 넘는 집필진이 모여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의 현상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시간도 뜻 깊었습니다.
박사생의 publication이 journal article의 형태로 쏟아져나오는 시기는 주로 졸업 직후입니다. 포닥의 의미가 여기에 있지요. 1-2년 동안 미친듯이 publication을 세상에 내놓으라는 뜻입니다. 보통은 학위 논문을 쪼개서 3개 많게는 4개까지 저널 논문으로 변환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디펜스를 하던 날 "논문으로 낼 거야, 책으로 낼 거야"라는 질문을 들은 것이고요. 실제로 디펜스 이후 마지막 수정은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도 있지만 차후에 있을 publication을 염두에 두고 수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자들의 CV를 보면 대체로 박사 졸업 연도부터 공격적으로 publish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산성'의 척도로 꼽히는 publication은 학자들의 삶을 그대로 축약해서 보여주는 이력서입니다. 물론, 학자의 삶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에 publication을 많이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journal article보다는 magazine article이나 policy report에 집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정치학이라는 과목의 특성상 상당수의 교수들이 현실 정치판 혹은 정책결정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유형의 교수들은 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기 때문에 academic publication에 할애할 시간이 적다는 것도 잘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로서 본인의 연구를 -- 어떤 형태로든 -- 세상에 내놓은 것들을 망라해 보면 한 사람의 학술적 지도가 그려집니다. 그래서 publication을 올림피언의 공식기록에 비유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연구를 말과 글의 형태로 내놓고 싶다는 마음이 저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는 점을 반추해 본다면, 이제는 공격적으로 기록 경신에 힘써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