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최종안을 학교로 제출했고, 외부 심사위원의 검토를 받기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약 한 달 남짓 걸리는 이 단계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아주 오랜만에 밤잠을 좀 잤던 것 같네요. 마지막 논문 챕터 작성 단계에서는 매일이 깔딱 고개를 넘는 것 같았습니다. 살기 위해 먹었고, 버티기 위해 운동을 하고, 연구실에서 자정이 넘도록 일을 하다가 머리에 오른 열을 내릴 겸 다운타운으로 달려가 생각 없이 걷던 날도 많았지요. '이 시기만 버티면 된다' 혹은 '이것도 못하면 죽는다'는 류의 비장한 생각은 의외로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해야 하니 했고, 힘이 들면 조금씩 목을 축여가며 묵묵히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거나 여행지에서 '100미터를 15초 내로 뛰어야지'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잖아요. 다만, 오래 걸으니 발과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긴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걷는, 뭐 그런 것이랄까요.
다소 벅찬 시간을 수개월 보내고 났더니 한 달 남짓 주어진 "자유"가 휴식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엔진이 꺼지지 않아 기계의 어딘가가 계속 뜨끈하게 열이 올라있는 그런 상태 같았지요. 지도교수는 '이제 정말로 좀 쉬어라'라고 했지만, 제 마음의 프로그래밍이 '휴식'이라는 인풋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명령어가 입력되기만을 기다리며 커서를 깜빡이는 화면 같은 상태라고 하면 이해가 좀 되실까요.
논문은 제출했다지만 그 외의 신경 써야 할 행정절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Final defense를 위해선, 지도교수를 포함한 논문 커미티 멤버 (supervisory committee) 3명, 학교 차원의 심사위원 (University examiners) 2명, 그리고 Chair가 필요합니다. University examiners와 Chair는 지도교수가 구해야 합니다만, 그는 디펜스 당사자인 저의 의견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지도교수의 성향에 따라 다릅니다. 학생 선호도 상관없이 본인이 원하는 사람으로 넣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학교 심사위원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해당 논문의 이론과 케이스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냐 여부이지요. 그렇지만, 디펜스 당사자가 평소에 리뷰를 받아보고 싶었던 교수가 있다거나, 이 기회를 통해 학술적으로 교류를 하고 싶은 교수가 있다면 심사위원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해관계가 없어야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같이 공저로 작업한 적이 있다거나, 디펜스 당사자의 지도교수와 학술적/사적으로 깊이 얽혀있으면 안 됩니다.
University examiners 및 Chair가 정해지면 디펜스 날짜와 장소를 정해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Zoom으로 디펜스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저도 몇몇 교수님들을 온라인으로 초청하기 위해 hybrid로 하고 싶었습니다만 (대면 + Zoom), 학교 측의 사정으로 인해 대면으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디펜스가 Zoom으로 이뤄질 경우 발생가능한 기술적 오류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학교 관련 부서에서 각 디펜스마다 필요 인력을 배치합니다. 인력에 한계가 있으니 하루에 가능한 디펜스의 수가 정해져 있지요. 제가 디펜스를 했던 시점은 한 해 중에서도 디펜스가 몰리는 시점이었기에 인력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면으로 진행해야 했어요. 상황에 따라 외부 심사위원 (external reviewer) 1인이 직접 참석하기도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고, 제 디펜스에도 외부 심사위원이 온라인으로 참석하진 않았습니다 (시차가 애매했거든요). 외부 심사위원의 불참석은 보통 흔한 일이라 그/그녀의 final report로 대체하곤 합니다.
숱한 서류와 이메일이 오간 후, University examiners 2인과 Chair도 다 구해졌고 디펜스 날짜가 드디어 정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외부 심사위원의 보고서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전 화에서 말씀드렸듯이, 디펜스는 외부 심사위원의 'OK' 사인이 있어야 진행 가능합니다. 아무리 논문 커미티 멤버의 검토를 마쳐서 외부로 보냈더라도, 세상은 다양하고 사람도 제각각이라 누군가에겐 맞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틀린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외부 심사위원의 역할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커미티 멤버나 학교 심사위원에게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디펜스를 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의 지도교수 및 커미티 멤버와 아무런 학술적/개인적 관련이 없는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합니다 (학교 심사위원을 위촉할 때 보다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따릅니다). 이를 통해 내부 심사에서 다소 부족했을지 모를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외부 심사위원의 평가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내부 심사위원이 승인해서 내보낸 논문도 외부 심사위원이 'NO'를 외쳐 버리면, 논문을 전면 수정해야 하고 그렇게 수정한 논문은 내부 심사를 다시 거쳐야 합니다. 디펜스 날짜도 당연히 다시 처음부터 잡아야 하니 그에 수반되는 행정절차에 걸리는 시간은 덤입니다. 외부 심사위원도 한 명 더 모셔야 합니다. 이미 전체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타협할 수 없을 만큼 이견이 생긴 상태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 객관성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 심사위원을 한 명 더 위촉하는 것이지요. 이전에, '내부 심사 - 외부 심사위원 위촉 및 리뷰 - 디펜스 그리고 졸업'까지 걸리는 기간이 5-6개월이라 설명드린 바 있는데요. 외부 심사위원을 한 명 더 위촉하면 이 과정의 80%를 다시 거쳐야 합니다.
외부 심사위원의 리뷰 내용은 디펜스를 하는 당사자가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디펜스 날짜까지 외부 심사위원에게 따로 연락을 취해서도 안 되고요. 지도교수는 외부 심사위원의 보고서가 도착하면, '디펜스를 할 수 있다/없다'만 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외부 심사를 위해 논문을 제출하고 4주가 지났는데도 보고서가 오지 않네요. 흔한 일입니다. 교수들은 연구뿐 아니라 각종 일로 공사다망하니 데드라인에 맞춰서 무언가가 오지 않는 일은 허다합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쫄리지요. 아아, 이 기나긴 여정에서 이제 마지막, 그것도 극 마지막 단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마다 pass or fail을 거쳐야 하는 느낌입니다. 디펜스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 판다곰 선생에게서 이메일이 옵니다.
"External report arrived - EXCELLENT."
제목만 보고도 안도감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외부 심사 결과가 좋았나 봅니다. 늘 과장을 많이 보태서 칭찬하길 좋아하는 지도교수는 이번에도 멋진 말 투성이입니다. 실제로 외부 심사에서 뒤집히는 경우를 몇 건 봐온 저로서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디펜스만 잘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디펜스가 치러질 장소에서 실전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네요. 기기도 점검해 보고, 방의 크기, 관객과의 눈 맞춤, 목소리 크기, 방의 온도, 등을 다양하게 점검합니다. 제 짝꿍은 저보다 1주일 먼저 디펜스를 진행하게끔 일정이 잡혀서 디펜스 준비도 그와 같이 해 나갑니다.
이미 내가 쓴 논문을 잘 추려서 발표하는 것이니 -- 그것도 내 논문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왔을 사람들 앞에서 -- 준비가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습니다 (맨날 '오산'의 연속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준비가 어렵다기보다, 준비를 하기가 너어무 싫었어요... 정말 마른 걸레를 쥐어짜서 물 한 방울 겨우겨우 얻는 심정으로 매일의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데드라인만큼 효과적인 채찍은 없지요. 짝꿍과 저는 "아악, 하기 싫다"를 염불 외우며 디펜스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시간은 무럭무럭 흘러서 짝꿍의 디펜스 날이 되었고 그는 무사히 디펜스를 잘 통과했습니다 (본인보다 기다리는 제가 더 긴장을 했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제 디펜스가 이제 일주일 남았다는 뜻이기에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저의 피날레 쇼 준비를 합니다. 결국 그는 디펜스 통과 후 'semi-축하'만 받고 제대로 된 축하는 제 디펜스가 끝난 다음에 같이 할 수 있었답니다 (ㅎㅎ).
제 디펜스는 다행히 순조로웠습니다. 발표 중간에 컴퓨터와 스크린 연결이 잘 안 되었던 것을 빼고는 모두 무난했습니다. 참석한 교수 6명 (지도교수, 커미티 멤버 2, 학교 심사위원 2, 체어) 모두 제 논문을 읽고 들어왔기 때문에 스크린 없이 오럴 발표만 해도 괜찮다고 해 주었어요. 30분 정도 발표를 마치고 2시간 정도 Q&A 시간이 시작됩니다. 체어를 담당한 교수님은 신사 정신이 몸에 배어 있기로 유명하신 분이라, 이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서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주셨습니다.
제가 적당한 표현이 없어 "Q&A"라고는 했지만, 사실 이 시간이야말로 "방어 (defense)"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체어의 임무는 디펜스의 원활한 진행이기 때문에 그는 질문을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물론, 질문해도 됩니다. 제 디펜스의 체어도 2-3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5명의 교수(지도교수 포함)들은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앉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논문에서 발견한 허점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합니다. 다행히 '내가 네 인생을 망가뜨리겠다'는 자세로 임하진 않고요, '이런 허점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니/어떻게 보완할 거니'에 해당하는 질문이 대다수입니다. 웃으면서 던지는 말이지만, 이 자들은 오랜 경력과 짬밥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에 통찰력을 뚝뚝 묻혀서 질문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 이제 막 디펜스를 하는 저 같은 머글에게는 모든 질문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하나씩 답해봅니다. 디펜스가 오전에 이뤄져서 아직 머리가 좀 덜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디펜스가 한참 지나고 생각하니, 머리가 덜 돌아간다기 보다는 나름 긴장을 해서 쉽게 답할 수 있던 부분도 어렵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 엄수를 칼 같이 하는 Chair 덕분에, 끝날 것 같지 않던 질문이 잦아들었습니다. 이제 평가를 위해 디펜스 당사자는 시험장 밖에서 대기해야 합니다. 디펜스에 찾아와 준 학과 내 다른 학생과 잠시 잡담을 나누며 문 안에서 들리는 희미한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짝꿍의 디펜스날에는 그가 밖에서 대기할 것 같은 시간에 맞춰 시험장 앞으로 찾아가 짝꿍의 대기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서로의 디펜스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deal을 했지요ㅎㅎ). 제 느낌으로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짝꿍은 다시 불려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리고 먼저 졸업한 제 동료들의 디펜스에서도 다시 시험장으로 소환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는 줄잡아 20분은 기다린 것 같습니다.
지도교수의 트레이드마크인 화통한 웃음이 문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별의별 이야기도 다 들립니다. 제 짝꿍이 일주일 전에 디펜스를 했다는 둥, 뭐 제가 필드워크를 갔을 때 어땠다는 둥, 그랬다가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소리도 들립니다. 아, 나 좀 그냥 빨리 불러주지, 싶었지만 별 수 있나요 ㅎㅎ
영국 신사 같은 Chair가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네요. 어서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심사위원들의 결론과 (pass or fail) 수정의 범위를 말해줍니다 (minor revision or major revision). 그리고 "Congratulations, Dr. 너굴"이라는 말이 들려오네요. 웃음으로 답합니다.
왁자지껄했던 -- 어쩌면 저에게만 왁자지껄했던 -- 시간이 지나가고, 교수들은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문 밖으로 바삐 나섭니다. 지도교수와 같이 걸어나오면서 "시험장 밖에서 결과를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했다" 라고 했더니, 정말로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있었더군요. "쟤는 졸업 후에 어디로 가냐", "이건 저널 아티클로 낼거냐, 책으로 낼거냐", "그러고 보니 요즘 학과에서는 어쩌고 저쩌고", "XX교수는 오랜만에 보는데 그간 어떻게 지냈어", 등등. 정말 잡담 집합소였습니다. 아, 저기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짝꿍의 얼굴이 보이네요. 덩달아 제 짝꿍도 제 심사위원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건물을 나섰습니다.
이상하죠. 연구실로 돌아와 구두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데, 디펜스가 끝났다는 것이 크게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저 달력에 표시된 주요 데드라인 중 하나를 속 시원한 마음으로 지울 뿐이었어요.
짝꿍과 점심을 먹으러 가서 음식을 우걱우걱 입에 넣는 제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네요.
이로서 이 PhD journey의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