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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지훈련장: Fieldwork

by 너굴이

촛불이 꺼지듯 기력과 열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며 찾아왔던 번아웃은, 여름의 열기에 조금씩 녹았습니다.


편두통과 그에 따른 시야 왜곡이 가끔 일어나도, 물속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막힐 것 같아 오밤중에도 벌떡 일어나야 했던 날이 이어져도, 심장이 흉곽을 뚫고 나올 것 같이 뛰어도, 파열된 부분이 욱신거려도 애써 무시하며 쉼 없이 앉아 있느라 고관절이 잘 펴지지 않아도, 발을 동동거리기만 할 뿐 잠시 쉰다는 '호사'를 누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듯이, 잘 쉬는 것도 연습을 해야 몸에 익는 법인데 '쉼'을 죄악시하는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쉼'은 곧 '약해짐'의 동의어였습니다. 캐나다에 와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제 DNA에 각인된 것이 먼저 튀어나오게 마련이니까요.


진심을 다해 각자의 위치에서 도와준 사람들과 이 도시의 청아한 여름 덕분에,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사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약 1달 정도 완전히 학교 및 업무와 관련된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었지요. 그놈의 데이터와 연구주제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애써 무시하며, 운동하고, 산과 바다로 떠나고, 가드닝에 힘쓰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연구를 업으로 하는 박사과정생이 이렇게 쉬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단 한순간도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여기서 부러지면 내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없다는 상담가와 짝꿍의 말을 붙들며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애써 밀어냈습니다. 그렇지만 연구에서 아주 손을 놓아버리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다시 불안을 야기할 것 같아 조금씩 하루 업무 시간을 늘리며 제 몸을 테스트하기도 했어요. 학술 워크샵 준비를 하거나, 조금은 가볍게 쓸 수 있는 정책 리포트 따위의 글을 쓰며 제 상태를 가늠했습니다.


여전히 해는 저녁 8-9시가 되어야 넘어가던 어느 여름날, 다시 일에 100% 몰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서울에서 예정된 9월 학회가 가시처럼 박혀있기도 했고요. 상담가는 저의 회복을 매우 고무적으로 바라보았고,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해 보자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참석한 학회는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써낸 글이었지만, 제 박사 논문의 방향이 담겨 있었고 워킹 페이퍼의 형태로 발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해당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었고, 비경제학자인 저의 연구에 살을 붙여주었습니다. 정치학이 아닌 다른 분과의 학회에서 발표한 적이 많지 않기에 꽤 긴장했지만, 원로 교수들의 특성(?)상 (그들은 대체로 젊은 교수들보다 온화하고 따뜻한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덜 냉철하지는 않습니다), 따스한 지지와 격려가 날아들었습니다. 지도교수도 함께한 자리였지요. 무언가 생경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로 경제학자들이 정치학에서나 다룰 법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고 그 자리에 숫자와 통계가 그렇게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생소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정치학은 꽤나 숫자 놀음이었는데 말이죠. 또한 제가 속한 학과에서 접하기 힘든 '따뜻한 피드백' 역시 낯설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지도교수와 한참이나 이 유의미한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지도교수와 인사동을 걸었고, 석사 지도교수님과 셋이서 식사를 나눴습니다. 석사 지도교수님과는 따로, 학회가 열리던 호텔 로비에서 새벽 2시까지 수다를 이어나갔지요. 지난봄부터 그 해 여름까지 겪었던 일이 절로 입에서 흘러 나갔습니다. 힘들면 다 짊어지고 살지 말고 모른척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통통하던 볼살이 다 빠진 것 같다고도 하셨네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든다고 웃으며 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제 마음에 맺혀있던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왜 유학 준비를 먼저 권하셨냐고. 캐나다만 가도 훌륭한 학생이 기라성 같이 진을 치고 있는데, 나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공부를 더 권하셨냐고. "네 인생인데 내 대답이 중요하니?" 하실 것 같아 서둘러 말을 덧붙였습니다. "가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옅어질 때, 나를 믿어준 사람의 말을 붙들고 싶을 때가 있기에" 여쭤본다고. 내 입에서 나가는 몇 번의 우물거림 끝에 "그냥 네가 잘할 것 같았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는 대답도, 아니, 그 어떤 대답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아무 말하지 못한 채 계속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서울 방문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컸습니다. 학회 참석과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은 것도 그중 하나이고, 저를 오래 봐오신 선생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저를 좀 더 보듬어 줄 수 있는 기억을 하나 더할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이 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필드워크에 돌입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는 예의와 신중함보다 적극적인 태도 및 약간의 무대뽀 정신을 곁들여 마구 들이대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학회를 주관했던 기관의 몇몇 학자들에게 이번 일을 인연 삼아 인터뷰를 요청했고, 예전부터 저를 도와주신 경제학 교수님께도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덕분에 짧은 서울 방문 동안 아주 중요한 인터뷰를 몇 건이나 성사시킬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성사된 인터뷰는 추후의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다른 중요한 인터뷰로 귀결됩니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한 달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갑니다. 지도교수의 일본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나라든 연구를 위한 인터뷰에는 인맥이 필요합니다. 특히 저처럼 만나야 하는 대상이 정부관계자인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한국인인 제가 한국에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캐나다인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도 했지요. 지도교수가 글로벌 인맥을 갖고 있어 다행이었습니다만, 약간은 현타가 오기도 했습니다. 한국도 그러한데, 일본에서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좀 더 폐쇄적인 경향이 짙어서 첫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외국인이지만 아시아인 여성이고,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은 저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도교수의 인맥을 동원하여 소중한 인터뷰를 여러건 해냅니다. 한 번의 기회도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아 발바닥에 불이 나게끔 뛰어다녔습니다. 저를 들여다보는 지도교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옵니다. 그도 여름 내내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필드워크를 다니다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과 논문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던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좀 더 진취적으로 들이대도 좋다고, 조언을 이어나갔습니다. 그의 말대로, 스크린과 종이, 그리고 숫자로만 파악하던 세상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세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왜 교수들이 '필드워크를 나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고 약 두 달 뒤, 오타와에서 열리는 워크숍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2주 뒤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대만으로 날아갑니다. 이번에는 3개월짜리 필드워크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3개월이라는 숫자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나, 제 연구에서는 절대적인 부스터샷 역할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머물던 기간 동안 한국을 2번이나 오가며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고, 시차가 1시간 밖에 나지 않았기에 한국이나 일본에 있는 사람들과 온라인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훨씬 수월했습니다.


대만 생활은 예상치 못하게 다사다난했습니다. 100년도 더 된 것 같은 기숙사 건물은 매일 괴담이 들려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음산함을 자아냈고요. 습한 날씨와 오래된 건물의 콜라보로 각종 열대 곤충, 새끼 바퀴벌레와의 동거, 그리고 대왕 바선생의 습격을 겪었습니다 (바선생의 습격: https://brunch.co.kr/@boyish-aaron/69). 25년 만의 강진이 대만을 후려쳤을 때 저는 운 좋게 서울에 있었지만,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간 후에는 2주간 꼼짝없이 여진을 겪어야 했습니다. 여진은 왜 굳이 새벽 2-3시에 발생하는 걸까요. 좀 큰 여진이 발생할 때에는 책상 밑으로 몸을 구겨 넣어야 했는데, 나중에는 이조차 익숙해져 바닥이 흔들린다 싶으면 자동적으로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퍼먹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타이베이 생활기로 엮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taipeiraccoon).






지도교수가 어느 날 물었습니다. 필드워크를 한 나라 중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저는 일말의 의심 없이 대만을 꼽았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곳에서 지낼 때 제 마음가짐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죠.


늘 조금은 조심스럽고, 너무 들이대진 말자, 혹은 너무 튀지는 말자는 생각을 10-20% 정도는 하고 살았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둥,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둥, 모난 돌 정 맞는다는 등, 한국에서 내려오는 속담과 유행어를 잘 살펴보면 결국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거나 (나대거나) 하는 것과 거리가 멀지요. 집단에 잘 융화되어야 한다는 미덕은 튀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로 연결되고, 알게 모르게 도전의식을 꺾어 놓습니다.


저 역시 그런 "미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도 없지만, 20대 학부생 시절에 다양한 길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외교관이라는 길 하나만 보고 시험을 향해 매진하다 보니 다른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 같았고 시험에 집중하는 것만이 하루라도 빨리 내 꿈에 다가가는 길 같았거든요. 실제로 다들 그런 조언을 많이 했고, 심지어 운동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여하간 시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그 모든 행위에 조금은 부정적인 눈초리가 따라붙었으니, 할 말 다 한 것 아니겠어요.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요. 대학원생의 삶을 선택한 이후에도 시험준비를 할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살았습니다. 석사 논문, 박사 유학을 위해 필요한 것에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겠다는, 어쩌면 많이 편협하고 경직된 마음이었지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너는 왜 칼같이 부지런하지 않니", "너는 왜 예민하여 불안해하기만 하고 꾸준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루를 보내지 못하니" 따위의 망발을 스스로에게 퍼부었습니다. 아, 사람이 어떻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루를 보냅니까. 그때의 저에게, 미친년 널뛰는 것 같은 삶을 살아도 박사 학위 받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니, 그깟 박사학위 없어도 안 죽는다고 말한들, 그게 들릴 리가 없겠지요. 그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캐나다에 와서 보니 중/고등학생 때부터 다양한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스토리에 은근슬쩍 부러움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대학 입시에 필요한 부분이니 역동적인 학교생활을 보내는 것이 권장되고, 한국과는 구조적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원하는 대학 입학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도 각종 예체능 활동을 놓지 않았고, 지역 사회와의 끈도 놓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시간이 남아돌아야 겨우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봉사활동이나 단체장 같은 활동은 이곳에서 거의 필수로 인식되지요.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바라본 이곳 학부생들의 삶은 제가 살아왔던 그 삶에 비해 꽤나 다채로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도움을 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던 그들. 뭐든 다양하게 시도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던 그들. 그 아이들의 얼굴 위로 내가 그 아이들 나이였을 때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신림동 독서실, 복학 이후로는 학교 고시촌에 틀어박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던 나는, 다시 돌아간대도 그 길을 선택할까요. 아니,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나라 - 최소한 하나의 길을 향해 온몸의 세포를 불태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는 않는 나라 - 에서 태어나길 바라냐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한 질문 아닐까요.


근데, 사실 이렇게 주어진 여건 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것도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길에서 원 없이 도전해봐 놓고 말이예요. 아무래도 제가 과하게 센치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10대와 20대, 다양한 것을 시도하고 넘어져도 하등 문제없을 나이의 제가, 막상 그 자유를 부여받았던 나이에는 충분히 그 자유를 누릴 용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부러움의 형태로 겨우 풀어내는 것을 보면요.






왜 대만에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는지, 어떻게 여기저기 들이댈 용기가 하늘 높이 솟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역시, 필요가 가능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닐까요. 캐나다에서도 조심성을 다 버리진 못하고 살던 제가, 한국에서 인터뷰 요청을 할 때에도 이메일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말까 고민하던 제가, 대만에서는 정말 마구잡이로 들이댔습니다. 연구소 웹페이지를 샅샅이 훑어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연구를 하는 학자가 쓴 논문을 읽고 그들에게 연락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를 도와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연락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어쩌겠어요. 대만에서의 제 시간은 짧았습니다. 무려 3개국을 다뤄야 했고, 대만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지요. 주어진 기한 내에 데이터를 구해야 했고, 데이터를 구하는 방법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없으면, 제 연구는 진척되지 않을 거고요, 그러면 졸업을 못하거나, 또 굴욕적으로 학과의 '선처'를 바라는 구구절절한 이메일을 써야 하겠지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노력을 기울여도 결과가 없는 허무한 상황이었을까요, 아님, 제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을 봐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눈에 불을 켜고 내가 성과를 낼 지 아니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지 지켜보고 있는 대상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밀려오는 상황이었을까요.


뭐가 되었든, 필드워크를 수행하던 기간 동안 저는 매우 진취적이었습니다. 시간, 거리, 민망함 등은 장애물이 될 수 없었지요. 한국에서 조직검사를 하던 날까지도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만), 중요한 인터뷰를 해냈습니다. 인터뷰이가 원하면 몇 시간이 걸리든 그 곳으로 갔고, 아는 인맥을 동원해 다음 인터뷰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만에 머물 동안 두 번째로 강한 여진이 도시를 흔들던 날, 차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도시를 왕복으로 다녀왔습니다. 차를 타고 있는데 고가도로가 휘영청 흔들립니다만, 할 일은 해야죠. 또한, 누군가로부터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예전처럼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어느 Think Tank가 대만에서 특별 행사를 여는데, 이를 위해 한영/영한 동시통역사를 구한다는 광고가 우연히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동시통역 경험은 없지만 그 주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통역에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연락했어요. 대신, 나는 경험 있는 동시통역사가 아니니 무보수로 일을 하되, 초청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그 행사에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행사는 내가 연이 닿고자 노력해도 번번이 거절당하는 한 정부 기관이었거든요. 내 연구 주제를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을 만나야 했으나, 당시로서는 방법이 없어 애만 끓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인연이 닿으려면 이렇게도 닿는지, 행사 주최 측에서는 무보수로 일을 하되 1박 2일 일정 전체에 동행해도 좋다는 연락을 주었습니다. 저는 입이 마르다 못해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두 언어를 옮겼고, 행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대만 관계자들의 연락처를 따 냈습니다. 추후 인터뷰를 위함이었죠. 거절당해도 상관없었어요. 뭐라도 했어야 했으니까. 나름 사회 각계각층에서 주요 포지션을 맡고 있던 행사 참가자들은 저의 격정적인 노력을 좋게 봐주었습니다. 저도 제가 놀라웠어요.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맺어 추후 중요한 인터뷰를 여러 건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박사 첫 해, 혹은 뉴욕에서 인턴쉽, 혹은 학부 첫 해 등에서만 강렬하고도 짧게 나타났던, '진취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너굴이'가 다시 나타난 것 같아 흐뭇했습니다.


짝꿍이 대만 여행을 왔던 그 1주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심한 날은 하루 4건의 인터뷰를 뛰었고요. 오전/오후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여행자 모드로 돌아가 짝꿍과 대만의 밤거리를 누볐습니다. 대만의 우버값이 캐나다보다 훨씬 싸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교수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말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필드워크는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니 어느 문이 언제, 어디로 열릴지 모른다고. 조금은 random luck에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더군요. 첫 문을 여는 데에 있어 지도교수는 또 톡톡히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 문을 성공적으로 열고 난 후, 더 이상 지도교수에게 기댈 필요 없이 우연의 연속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때로는 불안했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한 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어 저의 나날을 채워주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선뜻 연구에 도움을 주었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제 논문은 한 장도 이어나가기 어려웠을 겁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들의 다양한 경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재료가 되어주었습니다. 시계가 0인 바닷속에서 나침반 하나 없이 헤엄치는 느낌을 오랫동안 받았었는데, 필드워크를 통해 조금씩 나아갈 연구방향을 잡게 된 것이 가장 고무적이었습니다. 또한, 내가 받은 도움을 어떤 형태로든 타인을 위해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제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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