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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스퍼트: Writing and Writing

by 너굴이

운동도 마지막에 스퍼트를 내는 것이 정말 힘들듯이, 논문 마무리도 그러하리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고요). 주변에서 이 과정을 막 끝낸 사람들을 보며 '마지막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짐작해보기도 하고, 우리의 마지막은 어때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했죠. 밥벌이 등을 논문 마지막 단계와 어떻게 병행할지, 최적의 생활루틴은 어떤 것일지 따위에 대해서요.


수영 선수들의 훈련을 곁에서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수영 코치가 현역 선수인 덕분에 선수들의 훈련에 대해 들을 기회도 있었고요. 그들이 하는 그 모든 고된 훈련은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에너지가 넘쳐나는 초반에는 당연히 힘들지 않겠지만, 마지막 100m, 50m를 전력질주해야 할 때에는 이미 팔이 내 팔이 아니고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이고, 그 힘을 낼 수 있게끔 수 년에 걸쳐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저의 PhD Journey에서 마지막 전력질주에 해당하는 기간은 당연히 writing stage였습니다. 수 년에 걸친 훈련과 다양한 트레이닝 (Coursework, comprehensive exam, proposal defence, fieldwork/data analysis)이 마무리되고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어 평가를 받아야 하는 단계이지요.






Fieldwork를 마친 후에는 성격이 아주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해야 합니다. 현지 조사 기간에는 주로 데이터를 모으는 데에 주력하기에 이론 작업이나 글쓰기를 한 구석에 밀어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data set을 마련했다고 하여 바로 분석으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날 것으로 존재하는 데이터를 분석하기 용이한 상태로 가공한 다음, 분석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가설 검정을 해야 하지요.


연구 과정 전반을 교과서에서 아름답게 서술하기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구 질문 도출, 기존 문헌 연구, 가설 도출, 데이터 수집 및 분석, 가설 검정,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고 되어 있지요. 허나, 실제로는 이 모든 과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습니다. 연구 질문은 원하는 데이터를 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고요. 기존 문헌 연구라는 것도 수동적 읽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연구들이 나의 연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기존 연구가 답하지 못한 공백을 내 연구가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답을 내놔야 하지요. 한편, 가설 도출에 앞서 얼기설기 엮은 "이론적 틀"이 나오긴 해야 하는데요, 아직까지는 귀납이 아니라 연역적 추론과정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제 아무리 허접하다 하더라도, 이 "이론적 틀"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어야 가설 꼬락서니라도 갖춘 것을 내볼 수 있습니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A가 B의 원인이다"와 비슷한 형태의 명제를 이론적 틀이라 생각하시고, 이러한 이론이 맞을 경우 내가 관찰할 수 있는 형태의 명제를 가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데이터 수집은 각종 계량화된 자료 수집, 인터뷰 (필요에 따라),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이에 대한 접근, 등 일체를 포함합니다.


저는 질적 방법론과 양적 방법론이 혼재된 mixed method를 사용했습니다. 하여 계량화된 자료를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기 위해 질적 자료들을 계량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3개국의 10년 치 정책 원문 자료를 일단 모아야죠, 타임라인 만들어야죠, 인터뷰에서 얻은 자료를 적당한 형태로 제 데이터 베이스에 포함시켜아죠, 개별 data point를 구성하는 정책 원문이나 공식 자료 등을 읽고 분석한 후 코딩에 쓰일 수 있게 분류해야죠, 이 과정을 끝내고 모든 data point를 코딩하고 제가 쓰는 방법론에 맞게끔 pre-processing을 거치는 데에 약 4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어도 이 과정을 거쳐야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미련하게 버텼습니다. 오히려 프로그래밍 언어 (저는 R을 사용합니다)를 활용하여 데이터 분석을 할 때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습니다. 그건 이미 기계가 하는 영역이지만, 기계가 그 작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판을 깔고 필요한 자료를 기계의 입맛에 맞게 갖다 주는 일은 사람의 영역입니다.


데이터 분석 결과값이 나왔다면, 이제는 귀납적 추론 작업을 할 때입니다. 위에서 연역적으로 (즉, 삼단추론처럼 일반적인 명제로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방식) 이론적 틀을 만들고 가설을 얼기설기 만들어냈다면, 이제는 제가 가진 '진짜' 데이터를 통해 그 가설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귀납적 추론 (즉, 관찰값을 가지고 일반화된 명제를 만드는 작업)을 통해 제 이론적 틀을 수정하여 보다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거칠 때입니다. 지도교수는 항상 말하곤 했죠. 연역적/귀납적 추론 과정은 절대 아름답게 일직선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숨 쉬듯이 존재하는 것이며 질서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고 말했죠.


이 '이론적 모델링' 과정에서 제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일단 데이터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에 나머지 단계가 연쇄적으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지요. 제 (이상적인) 계획대로라면 여름이 끝날 무렵 이론 파트 챕터가 완성되었어야 했는데, 가을의 절반이 지나도록 데이터 작업만 하고 있었답니다.





모델링 작업도 끝나고 이제는 정말 월병토끼처럼 글만 써 재끼면 되는 단계가 왔습니다.


글 쓰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통상 어떠하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글 쓰는 것과 별개로, 최종 디펜스 및 졸업까지 가는 행정 절차는 학교에서 정해둔 타임라인이 있습니다. 통상 5개월 정도 걸리는 이 공식 절차는 학교 소관이기에 일단 개시한 이후에는 무를 수 없습니다 (예외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일이 많이 복잡해지고 졸업이 훨씬 늦어집니다). 첫 번째 단계로, 외부 심사 위원 위촉을 위한 서류 제출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내부 커미티가 완성된 논문 초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것은 케바케입니다. 저는 이 시기에 완성된 초안을 내지는 않았습니다만, 짝꿍은 챕터 1-2개 정도는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두 번째 단계로, 서류 제출을 하고 외부 심사위원이 결정되면 그에게 최종 논문을 보내야 할 데드라인이 결정됩니다 (거스를 수 없습니다). 보통은 6주-8주 정도 소요되는 이 기간 동안 죽어라 글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물론 내부 커미티의 심사도 거쳐야 합니다. 셋째, 외부 심사 위원의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통상 4주 정도 걸립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최종 디펜스를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해야 합니다. 내부 커미티, 외부 심사위원뿐 아니라, 학교 차원의 examiner 2명과 chair를 모셔야 하죠. 이 모든 과정은 지도교수의 소관이긴 합니다만, 학생도 아주 신경을 쓰지 않을 순 없습니다. 넷째, 외부 심사위원의 긍정적 심사 결과가 온 경우, 최종 디펜스 날짜가 확정되고 진행합니다. 마지막으로, 디펜스를 잘 통과한 경우 1달 정도 최종수정할 시간이 주어지고, 정말 최종_최종_최종의 최종 제출을 한 이후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절차를 마무리하면 졸업입니다.


저와 짝꿍은 같은 시기 졸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라이팅 과정을 같이 헤쳐나갔습니다. 24/7을 같이 지내다 보니 생활, 연구, 운동 등 모든 활동을 같이 했고요. 우리 연구실은 늘 자정이 넘도록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실에 밤낮과 주말 가리지 않고 앉아 있는다고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이 연구실을 마련해 준 지도교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비단 마지막 글쓰기 단계뿐 아니라, 코스웍을 들을 때에도, 종합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아니, 아주 그냥 평생 야행성인 저는 이런 패턴이 익숙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찍 일어나는 새에 해당되었던 짝꿍은 저의 패턴에 맞추느라 애 좀 먹었을 겁니다.


저의 글쓰기 과정은 정말 한 단어로 요약가능합니다. 벼락치기. 박사를 시작하기 전, 저의 막연한 꿈은 하루 2페이지씩 쓰면서 긴 호흡으로, 후달리지 않고, 마라톤과 같은 이 과정을 완주하는 것이었는데요. 안타깝지만 그런 건 제 인생에 없나 봐요. 박사 논문 글쓰기까지 벼락치기를 해야 하다니요. 아, 물론, 석사 논문이나 다른 학술지 투고와 같은 글에 소요되는 벼락치기는 길어야 한 달이었다면, 박사 논문 글쓰기에 소요된 벼락치기는 최소 3개월이긴 했습니다. 방법론 챕터는 2.5일 만에 쓰기도 했고요. 그게 가능하긴 하냐고 물어보신다면, 예, 데이터 분석이 끝난 다음에는 가능합니다. 저도 지도교수나 선배들이 챕터 하나를 일주일만에 썼다는 둥, 그런 이야기 할 때 웃기만 할 뿐 믿지 않았습니다만, 발등에 불이 아니라 똥불이 떨어지면 생각보다 많은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 이렇게 번갯불 콩 볶아 먹는 라이팅은 데이터 분석이 완벽하게 끝나야한다는 전제를 수반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행정절차와 별개로, 제가 박사 논문 '글쓰기'만을 위해 쏟아 부은 시간이 얼마였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초안 작성을 위해 순수하게 글 쓴 시간은 3개월 남짓이었고, 추후 각종 수정에 들인 시간은 도합 약 4주 정도였습니다. 중간에 행정절차를 위한 기다림, 아파서 쉬거나 하는 기간을 모두 더하면 4-5개월까지 늘어납니다. 짝꿍의 경우는 많이 달랐습니다. 가을이 시작하면서 착실하게 하루에 2-3페이지씩 글을 써 나갔기 때문에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저는 '굵고 짧게'였다면, 짝꿍은 ''가늘고 길게였다고나 할까요. 짝꿍은 챕터를 하나씩 쓰면서, 지도교수와 커미티 멤버들의 피드백을 각각 받고 수정을 chapter by chapter로 거치면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제 지도교수나 커미티는 전체 논문을 한 번에 읽고 피드백을 주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에 맞춰 논문의 최종 초안이 나온 다음 전송했습니다. 이 방법도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필요한 자료와 아이디어, 아웃라인 등이 작업하는 기간 내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요. 뇌에서 단기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이 120% 가동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글 쓰는 과정이 길었던 짝꿍에 의하면, 이전 챕터에 뭘 썼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 보고 또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의 경우엔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읽는 사람이 큰 그림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에, 보다 거시적인 피드백을 받는 데에 용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털리다 못해 염라대왕의 눈을 정면으로 보고 온 것 같은 쫄림을 단기간에 겪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논문 완성을 위해 투자한 (혹은, 해야하는) 시간을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6개월은 되는 듯합니다. 이 기간 동안 너무도 당연히 뇌와 몸을 학대하게 됩니다.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에 준하는 writer's high 같은 건 없고요. 그저, 엉덩이 힘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살다 보면 매우 빼어난 시험 천재, 천재형 학자, 글쓰기 처돌이, 등등을 만나는데요. 그들의 공통점은 무심한 듯 쉽게 어려운 일을 빠르게 해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 '저 사람은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고득점을 받네' 하는 사람들이 꼭 한 두 명씩 있지요. 상위 5-10%를 차지하는 그들은 그냥 그런 재능을 타고난 겁니다. 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그렇게 열심히 읽고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돌아보면 글이 하나 턱 하니 나와 있고, 입에서 줄줄 나오는 말은 이론적/경험적 깊이가 심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도 그냥 타고난 겁니다. 물론, 시험에 비해서 연륜이 주는 효과가 좀 더 크게 작용하긴 합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자연과학에는 영재가 있어도 인문학/사회과학에는 영재가 없다고 하지요). 이렇게 타고나는 천재형 외의 나머지는 모두 엉덩이 힘으로 버티는 겁니다. 엉덩이로 버티고, 뇌를 학대하듯이 무자비하게 내용을 주입하거나 (수학이나 외국어를 배울 때 좋은 방법입니다), 아니면 뇌를 쥐어짜면서 뭐라도 만들어냅니다 (글을 쓸 때 좋은 방법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저는 이번에도 역시 엉덩이로 버텼습니다.


심할 때에는 하루 18시간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브런치 갈기듯 그냥 갈기면 좋겠지만 논문 쓰기는 요상하리만치 더딥니다. citation에 신경 쓰고, 데이터 visualization 하고, 앞 뒤 문장이 말이 되는지 보고, 어느 날은 데이터 분석이 이상한 것 같아 다시 데이터로 돌아가고, 어느 날은 문헌 연구가 더 필요한 것 같아 이것저것 읽고, 그러다가 길을 잃은 것 같고, 머리 쥐어 뜯다가 커피 마시러 가고, 다시 꾸역꾸역 연구실로 돌아오고, 뭐 그렇습니다. 간혹 가다 접신한 것처럼 글을 써 재끼는 날도 어쩌다 한 번씩 찾아'는'말 옵니다. 제 글이 개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면서도, 그저 그렇게 조각들을 모아 글을 채워나갑니다. 숱한 교수들이 말하죠. 가장 훌륭한 글은 완성한 글이라고.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논문은 '완성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일단 마쳐야 다음이 있으니까요.






글쓰기 단계에서 이전에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거나, 뭐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원래도 예민했는데 글쓰기 단계에서는 예민함의 극치를 달렸다는 것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예전에 라이팅이 잘 안 될 때에는 카페나 이런 곳에서 좀 더 잘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라이팅은 죄다 가짜였나 봅니다. 이번 라이팅 기간에는 사방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적막한 환경이 필요했어요. 정말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날에는 옆에서 짝꿍이 잔기침을 하거나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도 귀에 그대로 박혔고요. 벽을 맞대고 있는 옆 연구실에서 들리는 사람 말소리와 연구실 건물 위층에서 들리는 수다 소리는 종종 저의 인내심을 한계로 몰고 갔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이 프로그램에서 종종 말하길, 청각이 예민하여 타인의 말투에 민감하거나 보이지 않는 정보를 많이 알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아마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소음에 취약하다는 것과, 본인이 납득이 되지 않는 소음에 많이 괴로워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저는 연구실에서 들리는 "잡"소리에 유난히 힘들어했습니다. 즉, 연구공간에서 왜 떠드는지 이해를 못 했다는 뜻이겠지요.


제 상담가가 한 말이 있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는 쉽게 짜증이 나니 항상 내 마음의 공간을 들여다봐줘야 한다고요.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시기가 이 때 아니었을까요. 청각도 예민한데,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의 데시벨이 저에게만 유난히 크게 들린 것이 이상하진 않습니다.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뾰족한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도 저에겐 맞지 않았어요. 귀를 누르면 두통이 왔거든요. 음악도 특정 주파수의 음악을 들을 때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가사가 있는 음악, 익숙한 멜로디의 음악 (머릿속에서 멜로디를 따라가니까요), 부산스러운 바이브의 음악, 모두 효과가 없었어요. 가장 효과를 많이 봤던 사운드는 binaural beats로 이뤄진 잔잔한 배경음악이었어요. 다행히 뇌에서 이런 음악을 "일하기에 좋은 음악"으로 인식하고 이 음악이 들리면 집중력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생겼습니다.


이렇다 보니 나름 짜낸(?) 묘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에는 연구실을 나가지 않고, 제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가는 밤과 새벽을 활용하는 방법이요. 어차피 새벽까지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잠을 뒤척여 결국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바엔 아예 밤에 일하자, 싶었죠. 신데렐라 유형인 짝꿍은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연구실에서 그의 일을 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많이 고생한 날은 저도 자정 즈음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런 날보다 새벽 4-5시에 잠드는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오전에 조용한 수면을 즐기고 정오쯤 일어납니다. 그리고 운동을 가거나 연구실로 출근하여 자정이 넘도록 있다 오는 것이죠. 짝꿍은 잠자리에 들고 저는 나머지 작업을 새벽 내내 이어갑니다.


저도 잘 압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제 상담가가 알면 한 소리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하루의 3-4시간 만이라도 평온을 찾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잠든 고요함이 선사하는 그 자유가 좋았습니다. 낮 시간의 부산스러움이 땅 밑으로 가라앉아 아무런 흔적도 떠오르지 않는 그 적막함에 평안을 느꼈습니다. 캐나다의 겨울은 밤이 깁니다.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원래도 밤에 얼마간 혼자 깨어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논문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새벽 시간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옆집 신생아가 2시간마다 깨어 우는 소리와 아기 먹일 분유를 데우기 위해 전자레인지 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벽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를 벗 삼아 글을 썼습니다 (이상하게 이 소리는 또 싫지 않습니다). 뜨는 해를 보며 잠드는 일상이 매일 이어졌고, 어쩌다 밤에 자는 날에도 낮 시간엔 출근을 하지 않고 해가 진 다음에야 출근하는 날이 늘었습니다. 정말 급할 때 (혹은 글쓰기 신이 오신 날)에는 낮 시간 동안 적막한 집을 독차지하고 글을 썼습니다.


이런 와중이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치였지요. 여름부터 바쁜 척을 하긴 했지만, 겨울에 비교하니 여름은 숨 쉴 구멍이 있던 시기였구나 싶어요. 가을/겨울 거의 6개월 동안은 연구실, 운동, 장보기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아주 이사를 가게 된 친한 친구네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억지로 날을 쥐어짠 것 말고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한정된 에너지를 오롯이 글쓰기에만 투입하고 싶어 휴대폰을 갖고 다니지 않았던 기간도 두 계절 정도 됩니다 (의외로 매우 편했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발목 삐고, 계절성 독감 앓고 하긴 했어도, 그나마 잘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이 막바지에는 그동안 해왔던 운동 덕분에 체력이나 허리 건강 측면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영장을 가는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일찌감치 미쳤을 것이고, 제 허리랑 목은 애초에 출타했을 겁니다.






미친 듯이 휘갈긴 글을 꼭꼭 뭉쳐 내부 커미티 3인에게 드디어 제출합니다. 이들이 보내준 코멘트를 보고 1차 수정을 거칩니다. 3명에게서 이런저런 피드백이 오다 보니 수정에도 만만찮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첫 major revision이기 때문에 상당량을 고쳐야 했지요. 2주 남짓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한 글을 커미티 멤버들에게 보냅니다. 그들의 승인이 떨어져야, '외부 심사를 위해 학교로 제출할 수 있다/없다'가 결정됩니다. 다행히 OK 사인이 떨어졌네요. 학교에서 '외부 심사를 위해 논문이 전송되었다'는 confirmation email을 받고서야, 몇 달 만에 비로소 밤에 통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제가 해야 할 일은 마쳤습니다. 외부 심사위원의 리뷰가 올 때까지 (보통 한 달 걸립니다) 조금 숨 쉴 틈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았죠. 학위논문에 집중하느라 미뤄둔 다른 프로젝트도 들여다봐야 하고, 졸업 후 먹고살아야 하니 이것저것 job market 지원서도 만들어야 하고, 그간 몸을 학대했으니 의사도 좀 만나고, 사람들에게 살아있다고 생존신고도 하고, 이곳에서의 삶을 위한 여러 가지 처리를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가고, 어느덧 최종 디펜스를 준비해야 할 때가 옵니다.


아 참, 외부 심사위원의 보고서가 긍정적이어야 최종 디펜스를 할 수 있습니다. 내부 심사를 거쳐서 외부로 나간 것이니 어느 정도 통과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일이 있지요. 제 주변만 해도 내부 심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외부 심사에서 빨간 불이 켜져 논문을 전면 수정하거나 최종 디펜스가 3개월 이상 지연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케이스를 몰랐다면 순진하게 웃고 있겠지만, 아는 것이 독이라고, 나에게 그런 일이 없길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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