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펜스를 마치면 여기저기서 축하가 쏟아집니다. 비공식적이지만 '박사'라는 호칭도 주어지지요.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이 과정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디펜스 결과가 'minor revision'이라면 한 달간 논문을 최종 수정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집니다. 저도 짝꿍도 각자 디펜스를 통과한 날부터 기산하여 한 달의 시간을 부여받았지요.
한 달 내내 수정만 거듭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수정에 쏟아부은 시간은 길어야 2주 정도였어요. 해야 할 일도 특별하게 힘들진 않습니다. 3-400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도 썼는데 마지막 수정이 뭐 그렇게 힘이 들겠습니까만은, 이 시점에서 짝꿍과 저의 정신적/물리적 에너지는 정말이지 물탱크 바닥에 물이 겨우 찰박거리는 그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몇 번의 수정을 거쳤는지도 모를 파일을 붙잡고 씨름하자니,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고요. 마지막 수정은 심사위원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논문 승인 전담팀에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각종 양식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다 맞춰야 했어요. 폰트 크기, 마진, 대소문자, 페이지 넘버, 제목/소제목, 도표 설정 등등. 게다가 한창 논문 작업 중에는 나중에 다시 하면 된다는 이유로 참고문헌 목록이나 본문 각주 처리 등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지나간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눈 질끈 감고 넘어갈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마치 점묘법으로 큰 도화지를 채색하는 심정으로 제 논문을 보고 또 보고, 눈이 빠져라 봅니다. 나중에는 중독 아닌 중독이 되어서 어디 틀린 것은 없는지 계속 체크하느라 컴퓨터에서 한시도 손을 뗄 수 없었답니다.
곰팡이가 핀 식빵을 (모르고) 먹어도 배탈 한 번 나지 않고, 코로나에 걸려도 하루면 털고 일어나는 강철 체력을 지닌 짝꿍도 이 기간에는 결국 몸살을 앓고야 말았습니다. 저도 덩달아 아플까 봐 긴장의 끈을 일부러 놓지 않았지요.
짝꿍과 저는 한 달간의 수정 기간보다 더 중요한 데드라인을 앞두고 있었는데요. 바로 졸업식과 관련된 데드라인이었습니다. 통상 논문 심사는 연중무휴로 이뤄지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중요한 타임라인이 있습니다. 학기 종료에 맞춰서 모든 절차를 끝내거나 (그래야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지 않으니까요), 혹은 봄/가을에 한 번씩 있는 졸업식 참석을 위한 데드라인 전 모든 절차를 끝내고 승인을 받는 것이지요. 짝꿍과 저는 봄 졸업식에 같이 참석한다는 목표하에 이 과정을 달려왔고 최종 논문 승인이라는 마지막(i.e., 최종_최종_최종_진짜 최종_정말 최종_진짜 끝) 관문을 앞두고 있었답니다. 웹 페이지에는 이와 관련된 지시사항이 엄청난 경고처럼 붙어있었고요. 모월 모시, 오후 XX시까지 '제출'이 아닌 '승인'을 받아야 하며, 마지막 리뷰 후 수정을 위해 제출은 데드라인 3-5일 정도에 미리 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고 합'디'다.
짝꿍과 저는 충실히 그 가이드라인을 받잡아 일찍 파일을 냈는데, 아니 이런. 데드라인 마지막 날이 되어도 승인이 오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이미 첫 리뷰를 마치고 몇 가지 수정 사항을 통보받았기에 (이건 24시간 내로 돌려받았습니다) 우리는 각각 두 번째 수정을 마치고 재빨리 제출한 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죠. 그렇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 마침내 졸업식 참석을 위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마지막 날이 와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날 며칠을 똥줄 타며 기다리던 저는, 마지막 날까지 연락이 없자 너무나 허탈하여 눈물이 찔끔 났고요 (이렇게 봄 졸업식이 물 건너 간단 말인가!!). 학과며 관련 부서에 연락을 취해봤자, 이메일 수신량이 너무 많아 답을 할 수 없고, 졸업식 참석을 위한 논문 승인에 모든 인력이 투입되어 있으니 답장을 줄 수 없다는 경고성 멘트만 떡하니 날아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저와 짝꿍 모두 늦긴 늦었어도 다행히 최종 승인은 문제없이 받았습니다. 저는 당일에 자기들 퇴근 시간 직전에 이메일이 왔고요, 짝꿍은 담당자가 일처리를 좀 늦게 했던 모양인지 휴일이었던 다음날 이메일이 왔어요. 증말이지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캐나다 일처리가 빠르거나 요령 있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은 익히 잘 알고 있고 저도 많이 겪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사는 부분도 큽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늦게 승인을 낼 거면 졸업식 참석자들에게 '논문 승인은 늦게 가겠지만 걱정 말라'는 이메일을 개별적으로 주든가. 본인들이 일처리를 시간 내에 다 못할 것 같다면 아예 '3-5일'이 아니라 '최소 1주일 전' 제출을 못 박아 두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서 제출자가 늦는 것은 칼 같이 안 되고, 본인들이 늦는 것은 "apologies" 한 마디 띡 날리면서 넘어가는 모냥새가 정말 꼴 보기 싫었어요. 담당자 외의 다른 관계자(학과, 지도교수)를 CC 하여 이메일로 정중한 항의 메일을 보냈습니다만, 어디 뭐 눈 하나 깜짝 했겠어요? 제 캐나다 생활 중 비합리적인 일처리 방식 때문에 가장 머리 뚜껑 열리는 일 중 하나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여하간 마지막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드라마를 거치며 최종 승인을 받고 공식적으로 '박사'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짝꿍은 "박사 두 번은 못하겠다"라고 했는데, 저도 일정 부분 공감했습니다. 박사 논문을 쓰는 게 힘들다기보다는, 이 모든 절차와 매 단계마다 있는 데드라인 맞추는 것, 그것도 나 혼자 맞춰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 제 때 연락이 오지 않으면 일일이 확인하고 정중하게 독촉(?) 해야 하는 것, 등등의 모든 행정 절차가 너무 진 빠지고 영혼 털리는 일이라서요.
사람들에게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으면서 "어디 제대로 여행 다녀와라", "이제는 좀 쉬겠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어요. 각종 먹고 사니즘의 무게가 정말 무겁게 와닿기 시작했거든요.
학교 기숙사에서 그동안 매우 행복하게 살았던 저는 졸업 후 1달 내로 이사를 나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졸업은 '졸업식' 기준이 아니라 '논문 승인'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제 그간 학교가 제공했던 모든 방패막이 사라집니다. 시장가격의 60%에 해당하는 저렴한 렌트비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공과금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었던 엄청난 혜택은 이제 없는 것이죠. 짝꿍과 저는 학교에서의 삶을 참 좋아했고 120% 활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시설에서 '뽕'을 뽑았는데요. 연구실 가깝고, 모든 운동 시설이 가깝고, 클리닉 가깝고, 저렴한 렌트비로 가드닝까지 할 수 있는 이런 곳은 다시 만나기 힘들 겁니다. 어디 좋다는 곳으로 이사를 간들, 캠퍼스 라이프에 많이 물들어 있던 저희가 만족할만한 지역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이겠지요.
이사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있습니다. 워킹비자 신청이지요. 이는 외국인으로서의 적법한 캐나다 라이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관문입니다. 때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학생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비자 취소 뉴스가 허다하게 들려올 때였습니다. 영주권 소지자도 음주운전 경력, 부부싸움으로 인해 경찰을 부른 기록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추방당하거나 영주권 포기 각서를 써야 했지요. 캐나다 대학이나 정부에서도 가급적 미국 여행을 자제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던 외국인 신분의 동료들은 꼼짝없이 미국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지내야 했어요. 이 때문에 캐나다의 이민 정책이 다소 묻힌 경향이 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은 파도를 겪고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 상황과 엄청나게 비싼 집값,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맞물려 이민자의 천국이라 불리던 캐나다는 이민자를 최대한 젠틀(?)하게 쫓아내기 위해 골몰하는 나라로 삽시간에 탈바꿈하였습니다. 한편, 캐나다 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면 최장 3년 동안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데요. 당장 한 해 전만 해도 서류 한 장으로 끝낼 수 있었던 이 과정도 이민정책과 맞물려 덩달아 귀찮아졌습니다. 영어 시험 점수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뭐, 난이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아까운 돈을 내고 정성껏 시험을 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소지자에게까지 영어 시험을 요구할 정도라니. 이민 장벽을 높이려는 당국의 눈물겨운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캐나다의 이민 정책이 하루아침에 강퍅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박사학위 소지자이니 나 같은 '고학력자'에게는 차별화된 정책을 제공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으면 혹은 뾰족한 수가 없었으면, 누가 봐도 주먹구구식 정책을 거의 행정예고 없이 시행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구조적 제약 앞에 한낱 개인은 무력할 뿐이니, 하나마나 한 불평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제가 조금 어려운 시기에 걸린 것이겠지요. 다만, 캐나다의 이민 정책을 보며 바람직한 정책 집행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마무리하던 마지막 1-2달은 사실 논문 작성에만 골몰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 사니즘을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따라서 구직 활동도 병행해야 했어요. 저는 포닥에 진심인 편이 아니었고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로 떠나는 편이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죠),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 때문에 당분간 이 도시에 머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빵과 지붕을 마련하기 위한 (Bread and a roof over my head -- "먹고살아야지"를 표현할 때 많이 쓰는 영어식 문구입니다)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잡마켓이 정말 얼어붙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민정책이 팍팍하다는 것은 해당 국가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내국인조차 직업을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외국인에게 문을 활짝 열어줄 리 없지요.
이런 상황이니, 와 정말, 논문 작성 및 각종 데드라인 맞추는 걸로도 마음이 바쁜데, 잡마켓도 살펴야지, 이민 정책도 살펴야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도 다른 주제가 24시간 서로 맞물려 머릿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폴더를 열어젖히니, 꿈에서조차 해당 주제가 매일같이 등장하는 등, 정신적으로 꽤 피로했어요. 제 뇌에 외장하드를 3-4개 연결해 두고 필요할 때만 접근해서 해당 정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은 순수하고도 온전하게 나를 학문의 세계에 담글 수 있는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저의 순진한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 쯤되니 "박사 졸업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아이들 장난같이 느껴졌고, "졸업 후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저를 짓누르기 시작했지요. 박사 졸업은 수 틀리면 안 하면 그만인데, 먹고사는 문제는 포기할 수 없잖아요. 이 쪽의 무게가 훠얼씬 더 무거웠습니다.
뉴스로도 보도가 많이 되어서 잘 아시겠지만,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해서 어느 대학에 턱턱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는 시대는 도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 아주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했던 -- 황금기였습니다. 저의 지도교수들이 잡마켓에 나가던 시기는 아주 쉽지는 않을지언정 교수직을 구하면 구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제 선배들이 나가던 시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또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의 시기는 영혼을 털어 넣어 구한다고 해도 구해진다는 보장이 없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뭐, 교수직뿐 아니라 거의 모든 직업이 그렇지요. 이 마당에 트럼프가 연방 예산을 삭감해서 유수의 미국 대학들이 직원/계약직 연구인력을 해고한다는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습니다. 연방 예산으로 운영되는 연구소도 많은데, 돈이 돌지 않으니 각종 프로젝트며 행사를 취소한다는 뉴스레터가 연일 메일함을 채웠답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학의 교수들이 (심지어 정년 보장을 받은) 진저리 치며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왔다는 소식도 여럿 들려옵니다. 미국의 잡마켓이 캐나다와 비교도 되지 않게 크기 때문에 다들 의례히 미국으로 갈 생각을 하던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요. 어휴, 전쟁 같은 시기에 미국에 있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입니다.
별로 신나지 않는 이야기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마침내 빨대를 통과했다'는 말로 글을 마쳐볼까 합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간략히 다시 소개해보겠습니다. 제 선생님이 묘사하신 바에 따르면, 이 길고 지난한 박사 과정은 마치 빨대처럼 좁고 가느다란 통로 같은 것이라 합니다. 사람의 체형에 따라 이 빨대를 잘 통과하는 사람이 있고, 중간중간 턱턱 걸려가며 어렵사리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네요. 이 '빨대'를 잘 통과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예민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하다거나, 이와 비슷한 특징을 지녔다고 합니다. 이들을 '빼빼로'나 '가래떡' 유형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복부비만'이 있거나 츄파츕스와 같은 체형을 지닌 사람들은 이 '빨대'를 통과하기 어려운 유형에 속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진 않습니다. 츄파츕스가 대형 빨대 혹은 고무호스를 통과하려면 알사탕이 녹거나 고무호스가 좀 늘어나거나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다. 반면, 얄쌍한 빼빼로나 가래떡은 얼마나 스무스하게 통과하겠어요.
이 '빨대'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비상구가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라 '복부비만'으로 크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언제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되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빨대'가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논하면 끝도 없지만 이 '빨대'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한 개인이 바꾸기 힘든 것이니, 열불 터지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은 오직 두 가지 - 통과 혹은 통과하지 않기 - 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 '빨대'를 통과하고 나면 넓고 넓은 바다 같은 곳이 펼쳐지는데, 그곳에서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under the sea' 생태계를 골라서 살면 된다지요. 안타깝게도 이 under the sea 생태계로 가는 방법은 '빨대'를 정해진대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빨대'에서 공간 이동을 한다거나, '빨대'를 개조해서 강 같이 넓은 수영장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take it or leave it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만두거나)'인 것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조금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일단 '빨대'를 통과하기만 하면 under the sea 생태계에서는 아무도 '복부비만'이나 츄파츕스형 몸매로 뭐라 하지 않는다는 점. 아니, 오히려 복부지방으로 인해 바다에서는 더 잘 떠 다닐지도 모르죠.
빨대이론을 재미있게 듣다가, 제가 복부비만형 (실제 복부비만과 1도 관계가 없습니다) 혹은 츄파츕스형이라는 사실에 살짝 시무룩해졌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츄파츕스는 츄파츕스인 채로 살아야지. 이 이론을 들을 당시에는 제가 '빨대'를 잘 통과하리라는 자신감이 그렇게 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이론의 주창자이신 선생님은 저의 '복부비만 체형'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제가 under the sea 생태계로 갈 수 있음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으셨죠.
선생님은 덧붙이셨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언제든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도 좋다고.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 길고 긴 '빨대'에는 항상 비상구가 존재하여 언제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막연히 '빨대' 중간에 앉아서 쉴 때면 이제 그만 저 비상구를 열어야 하나, 생각했던 적도 없지 않습니다. 빼빼로나 가래떡이 아니었던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구가 아닌 마지막 출구를 향해 열심히 몸을 앞으로 밀어냈고, 다행히 출구를 통해 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빨대'를 통과하는 동안 저를 버티게 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늘 말하듯이 대단한 사명감 --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겠다, 기후변화 저지에 일조하겠다, 한 국가의 판을 흔들어 보겠다 -- 따위는 없습니다. 설령 있었다 해도, 이 '빨대'를 통과하면서 다 없어졌습니다. '빨대' 수련은 제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고, 제가 누리고 있던 것들은 제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운이 좋았기에 저와 인연이 닿았음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겸손해질 수 있었고, 저에게 좋은 일에 생겨도 '다행이구나'하고 넘어가며 나쁜 일이 생겨도 '운이 좋지 않았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요. 모든 것을 제 노력과 제가 가진 자원의 결과값으로 생각하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반드시 원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경우, 그 원인을 개인의 노력으로 치환하게 되지요. 내가 잘해서 좋은 일이 생겼고 내가 부족해서 나쁜 일이 생겼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기 쉽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꼭 그렇진 않습니다. 세상에는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도 많고요. 정말, 그냥 아귀가 잘 안 맞아서, 그 때, 거기서, 어쩌다보니 그 일이 일어난 경우도 많습니다. 모순적이게도 현상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훈련을 오랜 시간 받아왔지만, 인간사 모든 일이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사명감도 아니고, 야망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면 뭘까. 제 지도교수조차 궁금해했습니다. 학교에서 승인해 준 기간보다 4-5개월 일찍 마쳤다는 사실을 높이 사며 묻더군요. 무엇이 동기부여가 되었냐고. 그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거창한 대답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정말 별 것 없었습니다. 그저 봄 졸업식을 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설정된 학교의 데드라인에 제 계획을 맞춘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끝을 내자'는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필드워크를 다녀오니 그 마음이 더욱 커졌고, 기억이 생생할 때 빨리 글을 써서 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그저 길었던 '빨대'수련을 끝내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는 말 외에는 답이 될 만한 것이 없네요.
그 외에는 러닝메이트의 중요성 정도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통제적인 성향이 강하고 micro-management에 능한 계획형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반복적이고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은 일상이 이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자극 추구형'입니다. 이는 짝꿍과 비교하면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인데요. 일주일에 같은 식단이 2-3일만 겹쳐도 저는 그 메뉴를 지겨워하고요, 짝꿍은 일주일 내 같은 메뉴를 먹어도 문제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정해진 요일/시간에 운동을 가야 했다면 아마 금방 지겨워서 때려치웠을 텐데, 일주일에 '3-4회는 반드시'로 유연하게 규정해 둔 덕분에 오히려 운동을 더 꾸준히 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짝꿍은, 제가 필드워크로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동안 시계와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소싯적 그의 별명은 '칸트'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스프린터입니다. 어찌 보면 시험 준비에 맞지 않았던 성향인 것이지요. 단기간에 전력질주를 하고 끝내야 하는데, 시험은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의외로 큰 변동 없이 꾸준한 매일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시험에서 강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같은 사람요). 저는 엉덩이는 무거웠지만,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오히려 예술가나 드라마 PD에 가까울 정도로 단기 프로젝트에 적합한 성향이었고, 의외로 이런 점이 저의 '빨대' 수련에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42.7km 마라톤을 처음부터 다 뛰려고 덤비면 숨이 턱 막히지만, 중간에 나타나는 언덕 구간이나 곡선 코스를 '단기 프로젝트'를 해치우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이 긴 거리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박사과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 단계마다 마감이 다가오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고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좀 퍼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목도 축이고 땀도 식히고 하다보면 금방 호기심이 생겨 다음 단계 도장깨기를 하러 가고 싶어지곤 했어요. 아마도 이런 부분이 스프린터이자 자극추구형인 제 성향과 맞았기에 '빨대'의 비상구가 아닌 출구로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러닝메이트로 '칸트'를 데리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고요.
아아, 어쨌든, '츄파츕스'인 채로 '빨대'를 통과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처럼 '복부비만'이 있어도 (실제 복부비만과 1도 관련이 없습니다!) '빨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