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6개월 만에 부모님 댁을 다녀왔다.
내가 태어난 도시는 항상 봄이 없는 도시라, 서울에서는 쌀쌀함이 느껴질 법한 옷차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은근히 더웠다.
부모님 생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내려가는 일정이라, 무엇을 해 드려야 잘 해드렸다고
소문이 날까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좋아하시는 음식점에서 식사나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뵈어서 더 크게 와 닿는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뵙는 아빠의 뒷모습은 예전보다도 조금 작아져 있었다.
내 눈에는 지금 아빠의 모습이나 젊은 시절 내가 기억하는 풍채 좋은 아빠의 모습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간혹 가다가 이렇게 아빠가 작아지셨다는 느낌이
준비도 안 되어 있는 내 마음속을 훅 치고 들어올 때면,
안타까움, 아쉬움,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이유모를 원망 등이 내 마음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다.
아이는 부모의 눈물을 먹고 큰다고 했던 글귀가 떠올랐다.
그래서 아이가 클수록 부모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어릴 적,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실현해주고 해결해주시던 부모님이
이제는 모르시는 것도 많아지고, 나에게 조금씩 의지하시는 그 모습에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서글픔을 느꼈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살아도, 바쁘다는 핑계 아래 나는 부모님을 1년에 2-3번 밖에 찾아뵙지 못했다.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되어서 이사를 하던 날,
툭하면 내려오는 거 아니냐는 아빠의 농담에 그럴 일 없을 거라던 내 말을
이렇게 잘 실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을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나는 문자 그대로 정말 바빴고, 또 바빴고, 계속 바빴다.
가슴 한 구석에 불편함이 남아있으면서도 젊은 날 바쁘게 사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말로,
부모님을 살갑게 챙기지 못하는 나를 합리화시켰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연락조차 잘 드리지 못했던 내 모습은,
가끔씩 말 없는 부모님이 내비치시던 걱정과 한숨,
자기 자식에게서 차마 눈길을 떼지 못하던 그 그림자로 인해 정당화될 수 없었다.
아니, 정당화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얼음장같이 차갑고 매사 이성적이어서 눈물 따위 흘리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는
내가 서울로 떠난 뒤,
내가 쓰던, 그렇지만 휑 하니 비어버린 그 방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1달이 넘게 방문을 열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새내기 시절, 몇 번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집에 전화드리자마자 울려 퍼진
엄마의 노기 어린 목소리는
타지에서 지내는 딸이 밤늦게 연락이 되지 않자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긴장이 풀리면서 표출된 걱정이었다.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서울에 오신 아빠와 식사를 하다가
다 큰 딸 잘 지내니 걱정 마시라는 말 끝에,
저녁 시간이 되어 식탁에 앉을 때면 항상 네 생각이 난다며,
따뜻한 국 한 대접과 좋아하는 반찬 지금 당장 서울로 보내주면 맛있게 잘 먹을 텐데,
늘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하신다는 당신의 그 대답에
눈물이 넘어와서 밥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적도 있었다.
매번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가득 채워 보내주던 택배 상자는
내 자식 타지에서 배 곪지 말고 아프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
미어터질 것 같았다.
[응답하라 1988]이 인기리에 방영되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극 중 인물 중, 박보검이 연기한 '최택' 캐릭터에 열광했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아리따운 박보검의 얼굴에 집중하다 보니
드라마는 어느덧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15,16화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눈물샘 터진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무뚝뚝한 아빠, 그리고 그런 아빠를 제일 많이 닮은 큰딸 보라.
아빠 셔츠 사이즈도 모르고 구두 사이즈도 모르고
표현할 줄은 더더욱 몰랐던 보라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신림동 고시촌으로 공부하러 떠나던 날,
회사에 일이 있어 떠나는 보라를 보러 집에 오지 못할 줄 알았던 아빠는
보라가 운전하는 길목에 서서 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있는 약 없는 약 약국에서 다 쓸어와서 담았을 것이 분명한
아빠의 검은 비닐봉지를 열어보는 보라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나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반틈 열린 차 창문 사이로 식사 거르지 말라며 몇 번 접은 지폐 뭉치를 건네주는 아빠의 손을 보고
울지 않을 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차를 운전해서 골목을 빠져나가는 보라는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아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어져 가는 딸의 차를 보는 아빠도 딸에게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물 때문에 장면이 보이지도 않았으면서.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서부터 이상한 책임감이 더 생기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신세 지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
'신세'라는 단어를 듣고 서운함을 감출 수 있는 부모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자식 입장에서는
내 앞가림 내가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볼 때마다 조금씩 챙겨주려 하는 그 정성이
부담스럽고, 미안하고, 아직도 내가 어린것만 같아 스스로가 작아 보일 때가 많았다.
늘 그랬듯이 아빠 차를 타고 기차역을 가던 아침,
뒷좌석으로 불쑥 들어온 따뜻한 손을 보고
결국은 꼴사납게 아빠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껍게 말린 그 종이들은
금방 서울로 돌아가야 했던 딸에게 전해주고 싶은 아빠의 걱정이었고,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다.
결국 넘치게 주는 만큼 받아올 자신이 없어서,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생색을 내며 받아가는 형국으로
아빠의 마음을 받아왔다.
해가 일찍 떠서 빨리 더워지는 그 도시에서,
아침 해를 이마로 받으며
빨개진 눈을 감추지 못한 채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뒤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식을 키우는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걸 확인받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두라고.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나는 보라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그렇지만 딸이 걱정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서 불쑥 나타나버린
성동일 아빠의 긴 그림자와
무뚝뚝하고 경상도 남자의 표본인 우리 아빠의 뒷모습이
묘하게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