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굴이 Apr 28. 2023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서

April 2023

저녁에 Paula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지난 한 주 동안, 운동을 재개하고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살아 있음'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말할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조금은 전반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고 옆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먹는 일에 소홀했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Paula 역시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신호이며 내가 아주 깊이 침잠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다행히 나의 지도 교수는 한국식 교육방식 하에서라면 절대 불가능한 철학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지금 내가 겪는 이 모든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인정하고 나의 휴식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다. 이곳이라 해서 모든 교수가 이렇진 않을 텐데, 이런 사람이 나의 지도교수인 것은 정말로 큰 행운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나는 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오늘은 그 찝찝함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내가 계획한 바가 흐트러지는 것이 싫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1달에서 1달 반 정도 완전한 휴식기를 가져야 함에 동의했고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5월 말과 6월 중순에 워크숍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6월 중순 워크숍은 날짜 변동의 여지가 있었지만 5월 말 워크숍은 이미 모든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고 내가 참석하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다. 참석을 위해서는 5월 중순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 작성 및 발표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동의한 '완전한 휴식'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5월 워크숍을 안 간다고 하면 내가 잃는 것이 뭘까? 아니, 애초에 나는 이 워크숍을 왜 가고 싶었던 것일까? 비슷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 캘리포니아로의 여행? Resume에 추가되는 한 줄? 


Paula는 그 어느 것도 크게 매력적이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5년 뒤, 지금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뤘다고 가정할 때, 2023년 5월의 워크숍에 가지 않는 것을 후회할까? 아니 기억이나 할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집착'하는 이유는 꽤 사소하다는 의미이다. 건강과 맞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진 않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래, 가지 말지 뭐'라는 말이 단번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허공을 응시하는 침묵이 이어지고 어렵게 입을 뗐다. 아마도, 내가 계획한 바가 어그러지는 것을 보기 싫어서, 그 계획이 나의 성과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 스스로에게 실망하기 싫어서 아닐까. Paula는 이 '실망'을 최근에 또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매우 익숙한 감정이었다. 24/7 (24시간, 7일 동안) 마주하는 나의 분신 같은 존재랄까. 매일 내가 세운 계획을 번번이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늦은 밤 퇴근할 때. 밤을 새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잠자리에 들 때. 한 주, 한 달을 보내며 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낄 때. 2년 내 수업 시간 동안 준비한 말과 생각을 제대로 내뱉지 못해 스스로에게 답답해하면서 교실을 나설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나는 이토록 재능이 없는 것인가 하는 자조를 내뱉고 지낼 때, 시험으로 점철되었던 그 세월 동안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시험 점수에 일희일비할 때,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인 비교와 자기 증명의 시간들. 


지나간 먼 과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1년에 350일 가까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매일 내가 세운 계획이 너무 비현실적이니 내 능력에 맞게 조정해 볼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일 실망을 느끼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성취를 이루며 소소하게 뿌듯함과 자기 효능감을 축적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세월이 너무 오래되었다. 실망은 나를 작게 만든다. 지금의 무기력, 무능감이 놀랍지 않은 이유다. 


머리로는 '실망'이 주는 물질적, 정서적 이득이 하나도 없음을 잘 알면서, 이러한 패턴을 끊어내지 못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도 모를 감정과 어딘가에 갇혀 버린 내 상태를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서 투자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 않나. 


Paula가 물었다. 스스로에 대한 그 실망은 진정한 나의 목소리냐고. 

저렇게 묻는 것을 보니 내 목소리가 아닌가 보다. 내 안에서 질문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나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이고 어디까지가 외부 환경에 의해 주입된 목소리일까? 혼재되기 쉬운 그 두 영역 사이 경계선은 어떻게 긋는 것일까? 무조건 나를 향한 비판은 외부에서 주입된 목소리이고,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목소리가 나의 진정한 목소리인가? 내가 나 편하자고 영양가 있는 쓴소리를 '내 목소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면 어쩌나? 아니 애초에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길을 잃은 느낌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인가? 


실망을 하면 나를 더 채찍질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증명해 보일 원동력을 얻었다. 그리고 증명해 보였다. 모두가 비관적일 때 나는 해 냈다. 십 수 년도 더 지난 그날이 어쩌면 이 도시로 온 날보다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힘들었고 막막했고 예상치 못한 계획 변경에 대처하느라 마지막에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해냈다. 그 이후에도 최종적으로는 내가 원한 결과라 아닐지언정 '나를 극한으로 몰아붙였고, 해냈다'는 그 자긍심을 맛보며 안심했다. 그러다가 일찍 늙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에너지를 너무 가불 해서 썼던 것일까. 최근 몇 년 사이 더 이상 채찍질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에 내심 '실망'했다. 마치 내 안의 독기가 다 빠져버린 것 같아서. 더 이상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달려 나갈 수 있는 몸과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나 문제는 '독기'가 있고 없고 가 아니었다. 더 이상 '실망과 증명'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이 길을 잘 걷기 위해서는, 아니 내 인생을 좀 더 풍요롭고 내가 바라듯이 마음의 평화를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실망과 증명' 전략을 버려야 했다. 이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부여잡고 있었고, 더 이상은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왜 예전 같지 않냐'며 나를 몰아붙인 것이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작정이었나. 그 일들을 다 겪고도 슬그머니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는 관성에 감탄을 해야 하나 개탄을 해야 하나. 


3년 반을 만나면서 Paula가 감정적으로 변한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5월 워크숍을 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중한 휴식과 돌봄의 기회를 날려 버리지 말라고 간곡히 말했다 (그것은 거의 부탁 혹은 애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몸의 상처보다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배가 찢어진 상처가 나을 시간에는 관대하면서 마음이 곪아터진 상처에는 인색하다고 했다. 가까스로 고름이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할 때 과도한 욕심으로 몸을 움직여서 그 상처를 다시 벌리지 말라고 했다. 워크숍에 가겠다고 나를 밀어붙이면 그 상처는 곧 다시 벌어지고 제대로 아물지 않을 것이라 했다. Paula는 본인이 훨씬 젊었을 때,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에게 아무도 '멈춰도 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혹은 괜찮아졌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자신을 무대에 몰아세웠고 결국은 공황장애를 심하게 앓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는 Paula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방이 어두워 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는지는 잘 보지 못했다. 다만, 내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깊은 상처를 공유하며 입술을 미세하게 떨던 또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20년이 지났음에도 그 상처는 눈물 없이 꺼내볼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상처를 내보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는 것은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 상처받은 몸과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아서, 그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안타까워 기차 안에서 남몰래 울었다. Paula는 내가 워크숍에 가도 잃을 것이 없고 가지 않아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온 마음을 담아 호소하면 그 순수한 진심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 나는 워크숍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크면서 성별에 따른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는 정말로 큰 행운 중 하나였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는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곳이며 지금도 그 지역에 만연한 남아선호사상과 흑백논리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이 맞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들 정도이기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을 겪지 않았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만 성과에 따른 차별은 존재했던 것 같다. '차별'은 이 상황을 묘사하기에 어쩌면 너무 센 단어일지 모르겠다. '차별'이라기보다는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두자 (그게 그건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대학입학 후 생애 주기별로 따라붙는다는 '취업해라', '결혼해라', '애 낳아라'는 그 흔한 3종 세트도 내 인생에는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자유로웠고, 자유로운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게끔 컸다. 하지만 비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도 대놓고 비교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비교를 했다. 이에 Paula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놓고 공부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좋은 성과가 있을 때 기뻐하고 실망스러운 결과에 찌푸러지는 얼굴이 있다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성과와 연결시킬 수밖에 없다고. 


병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밤이 있었다. 

한 번도 남자아이를 선호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고,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는 엄마의 사과가 들렸다. 그 사과가 별로 반갑지 않았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나는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가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치 물건을 내 발등에 떨어뜨렸는데 "뜨거운 물을 끼얹어 미안합니다"와 같은 이상한 사과를 받는 형국이었다. 아니, 포인트는 그게 아니야 엄마...


나는 화제를 조금 돌렸다. 

자식 중 하나가 특출 났고 매우 만족스럽지 않았냐고. 왜 안 그랬겠는가. 자식이 없는 나도, 내 배로 낳은 새끼가 어디 가서 알아서 잘해오면 참으로 뿌듯하고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내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엄마는 늘, 오렌지와 수박은 맛도 쓰임새도 다르니 각자의 맛에 집중하라는 훌륭한 말을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오렌지와 수박(사과였던가)이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 말이 아직도 문자 그대로 기억에 남는다. 나 말고 하나 더 있는 자식은 "믿음직스러웠다"라고 했다. 알아서 잘 해오니까. 큰 재능을 보이니까. 한글도 가르친 적이 없는데 혼자 알아서 뗐다며, 대학 입시 성적이 큰 광역시의 1등이었다며, 뿌듯해서 어쩔 줄 모르는 두 얼굴이 떠올랐다. 그 정도라면 "믿음직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지. 나라도 그럴 것이다. 


Paula를 앞에 두고 조용히 읊조렸다. 

알아서 잘하는 자식이 퍽 믿음직스러웠다는 말이, 나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리더라. 아니, 그런 뜻이었을 거야. 내가 부모라도 그랬을 것 같아. 근데, 그 오랜 세월 지나고 이제 와서 내 인생이 더 풍요롭다는 둥, 더 올곧은 인간이 되었다는 둥, 오렌지랑 수박은 다르다는 둥의 말은 사실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어. 그 말 역시 비교를 내포하고 있잖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순 없었을까.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Soul Ache, agai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