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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y 04. 2023

Buntzen Lake에서 만난 귀인

April 2023

외부 활동을 좋아하는 동시에 삶을 '미션 수행하기'처럼 살고 있는 나에게 Paula는 5월 동안 '수행'할 몇 가지 미션을 던졌는데, 그중 하나가 Vancouver의 산과 호수 그리고 바다를 탐방할 것,이었다. 


이미 이 도시에 온 세월도 꽤 되었고, 야외 활동을 매우 좋아하는 짝꿍과 이리저리 쏘다닌 세월도 짧지 않았지만 이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뒤덮인 도시를 빠짐없이 누린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전거로 몇 가지 코스 정복하기, 유명한 호수 몇 군데 클리어하기 (참고로 호수가 평지에 잘 없다... 최소 편도 3-4시간 걸어 올라가서 호수 보고 또 내려와야 한다), 아예 비행기 타고 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있는 중부 지방 여행하기, 힘들게 등산하기 등으로 여름 활동을 꾸린다. 이 중에서 우리는 Grouse Mountain이라는 곳을 자주 가는데, 단시간에 빠르고 강력하게 운동하기를 선호하는 나에게 맞춤인 곳이며, 곤돌라를 타고 내려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산의 부담도 없다. 게다가 산 정상에 도착하면 Beaver Tail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어서 빨리 정상을 오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 모두 2023년 5월은 거룩한 휴식의 달로 삼을 것에 이견이 없었으며 Grouse Mountain부터 오랜만에 정복하려는 가벼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미션 수행하기로 인식하는 나의 성향을 파악한 Paula는 강력하고 힘든 활동 대신 쉽고 가벼운 하이킹으로 시작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하이킹 코스를 추천해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Buntzen Lake였다. 


차로 1시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고, 우리가 자주 가던 동네 근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길 이제야 왔지라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물에 뛰어들어가는 강아지를 보고 행복해하기도 했고 거대한 맛챠롤 같은 삼림을 보며 자유로운 들숨 날숨을 반복했다. 호수는 제법 커서 전체를 다 돌려면 3-4시간은 잡아야 했는데, 족저근막염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관계로 호수의 절반 지점에 있는 suspension bridge 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돌아오는 길에 농장에 들러서 올해 여름 채소를 책임질 깻잎과 오이, 고추 모종도 사고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식사도 할 생각에 신나 있었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발 밑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에 번쩍 잠이 깼다. 


이 도시는 겨울에도 눈이 드물다. 그런데 기후변화의 탓인지 최근 4-5년 사이 (어쩌면 그 이전부터) 겨울에 내리는 폭설이 심심찮게 관찰된다. 문제는 폭설이 지나가면 염화칼슘 녹은 물 때문에 아스팔트가 부식되고, 무거운 제설차가 그 위를 여러 번 밟으면서 도로 상태가 걸레가 된다는 것이다. 웅덩이처럼 꺼져버린 아스팔트 위를 무심결에 지나다가 타이어가 터진 것 같은 소리에 기겁을 한 적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엉망인 도로 상태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 이 도시의 느긋함을 욕하며 가던 길을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조수석 내 발 밑에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여전히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깔끔한 도로가 펼쳐졌음에도 뭔가가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결국 고속도로가 아님을 확인하고 길 옆에 차를 세운 뒤 차문을 열었는데, 아이고... 이미 내 쪽 차체가 많이 내려앉아 있었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불쌍한 우리 차의 오른쪽 앞발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다. 덜거덕 거리는 소리의 정체는 자동차 바퀴 휠이 도로를 긁는 소리였다. 


아놔, 우리가 사는 곳 근처도 아니고, Langley 망망대해 같은 길에서 바퀴가 터지다니... 

급하게 근처 오토샵을 구글링 했지만 가장 가까운 곳은 예약만 받는다 하고,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은 drop-in이 가능하단다. 덜거덕 거리는 바퀴로 가도 되냐고 물으니, 30-40km/h로 천천히 오라네. 그 말에 오케이를 외치고 다시 시동을 걸었는데, 아뿔싸, 고속도로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경고등을 켜고 달려도 고속도로를 30-40km/h로 달릴 수는 없다. 우리의 생명도 위험하지만 다른 차들끼리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최대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가는 방향을 선택했지만, 1분 가다 뒤에 줄줄이 소시지처럼 늘어진 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갓길에 정차하기를 5-6번 반복하고 나니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구글링 결과 타이어가 터진 상태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을 경우 차가 전복되거나 스핀 하는 경우가 있으니 최대한 휠을 꽉 잡고 직진을 한 다음 안전한 곳에 세워서 다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나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브레이크를 몇 번을 밟았더라... 족히 20번은 되는 것 같은데... 순간 아찔해지면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판단이 들었다. 주말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잘 알고 지내는 mechanic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차가 덜거덕 거리면서 굴러간다는 내 말에 기겁을 하시며 일단은 예비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오토샵을 가든 뭘 하든 해야 한단다. 


차가 이렇게 복잡한 물건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차를 들어 올리는 장비가 뒷좌석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예비 타이어가 일반 타이어의 1/2 두께 밖에 안 되는, 그야말로 '예비용' 타이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장비를 보물찾기 하듯이 끄집어내는 것까지는 여차저차 유선 상의 조언을 들으며 했는데, 얘를 어떻게 들어 올린담? 


하필 오랜만에 날씨가 맑아서 햇빛은 뜨겁게 내리쬐고, 우리 둘 다 구슬땀을 흘리다가 내 짝꿍은 닭똥 같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갈밭에서 공터로 차를 옮겨야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데에 조금이나마 나을 것 같아서, 차를 옮긴 후 바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공터에 우리 말고 차가 한 대 더 있었다는 것을 몰랐는데, 동양인 커플이 애꿎은 바퀴만 보고 한숨을 쉬고 있으니, 공터를 빠져나가려던 픽업트럭의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덩치 큰 백인 아저씨가 "도와주랴"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설명했더니 덩치 큰 몸으로 가벼이 뛰어내려 아주 능숙하게 장비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맨바닥에 아랑곳 않고 드러누워 차체 밑을 살펴본 다음, 리프팅 장비를 놓고, 바퀴의 나사를 풀고...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가 마치 신이 보낸 천사 같았다. 바퀴를 만지며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짝꿍이 닭똥 같은 땀을 흘리며 리프팅 장비로 가라앉은 차의 앞부분을 들어 올릴 때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둘이 이걸 붙들고 있었으면 제대로 된 곳에 리프팅 장비를 위치시키지도 못했을뿐더러 1-2시간은 족히 걸려 타이어를 교체했을 것이다. 아니 교체 못 했을지도 모르겠다. 


외양은 바이킹의 후예 혹은 슬라브족 전사 같았던 벽안의 천사는 쿨하게 우리를 도와주고 일어나서 갈 채비를 했다. 나는 이 자에게 어떻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할지 계속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지갑에 있는 레스토랑 기프트 카드라도 줄까. 아니, 지갑을 꺼내면 무례하게 보이지 않을까. 현금을 줄 수도 없잖아. 번호를 달라고 해서 기프트 카드라도 보낸다고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삽시간에 들었다. 


떠나려는 그를 붙잡고 정중하게 연락처를 물었다. 꼭 사례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 뭘 그런 걸 하냐고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 지금 저희 목숨을 살려주신 거나 다를 바 없어요... 귀인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늘 이 바닥에서 견인차를 부르거나 햇빛에 구워지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는 거절하지 마시라고 했지만, 이 아저씨는 나에게 감명 깊은 말을 남기고 총총 떠났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친절히 도와주라고, 그거면 된다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로만 듣던 착한 캐네디언인 것인가. 

예비 타이어로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타인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아니, 남에게 친절한 적은 있었나?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한국에서처럼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마치 따스한 햇볕에 알아서 외투를 벗는 나그네처럼 나도 굳은 얼굴 표정을 풀고 길 가는 사람에게 웃음을 보낼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툭하면 이 느려터진 나라의 행정에 대해 짜증을 내고, 2-3번 참다가 닦달을 하면서 얼굴을 굳힌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코로나를 겪으며 착하디 착한 사람들로 넘쳐나던 이 도시도 각박함을 한 스푼 더 할 수밖에 없었다. 다운타운에서 대낮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지나가는 사람이 마체테로 공격받는 등의 뉴스를 접하며, 나도 모르게 내 옷깃을 더 여며맸다. 물론 안전과 관련된 경우 쓸데없이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남들에게 친절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한 주의 근황을 묻는 Paula에게 마침내 Buntzen Lake를 갔고,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졌지만 큰 사고 없이 귀인 덕분에 타이어도 잘 갈아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과연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각자의 사정이 다 다르고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사정은 타인이 세세하게 알기 힘든데,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남을 함부로 평가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보게 되었다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30km로 달리는 차를 봤다면 우리는 분명 "쟤 왜 저래" 하고 넘어가지 "도움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바로 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2배는 더 걸려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긴장으로 움츠러 든 어깨를 조금 펼 수 있었다. 착한 mechanic 사장님 덕분에 타이어도 빨리 교체할 수 있었고. 


더 큰일이 벌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서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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