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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y 09. 2023

MRI 찍기

그것도 두 번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해서 이런 불편함이 지속될 것 같진 않았다. 

약 2년 가까이 Physio therapy, massage therapy, 한국식 한의원에서 하는 도수치료, clinical pilates 등등을 돌아가며 시도해 봤지만 시큰하고 묵직한, 그리고 가끔은 날카로운 통증이 있는 고관절을 더 이상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의사에게 연락했더니 처음에는 X-ray를 찍자고 했고, 스캔 상으로 약간의 석회화가 보인다며 여전히 통증이 있다면 MRI를 찍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참고로 이 모든 과정은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의사 화상진료 초진, 클리닉 방문, X-ray scan, 의사 재진을 거쳐 총 2주 정도 걸린 결과를 한 줄로 요약한 것이다). 아직 MRI는 한 번도 찍어본 적 없는데, 그걸 캐나다에서 찍네... 한국이었으면 환자 부담 금액이며 실비 보험 등등 복잡하겠지만, 이곳은 단순하다. 치료를 요하는 자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 시스템.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지라, 돈을 내지 않는 값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염없는 기다림은 캐나다 의료 시스템을 (잘) 이용하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다. 처음 의사가 MRI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한 것이 3월 중순이었고, 실제 연락을 받은 것은 4월 말이었으니 1달 반의 기다림이면 꽤 빠른 셈이다. 나 같은 경우는 응급이 아니기 때문에 2-3개월은 기다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취소건이 생겨서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도시에서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코로나를 거치면서 의료진 인력 수급 난항은 기하급수적으로 심각해졌었다. 게다가 CT/MRI와 같은 방사선과는 엄청난 업무 과중에 시달리게 되어 언론 보도에서도 비중 있게 다룬 바 있다. CBC 뉴스에서는 지나치게 오랜 대기 시간과 노후화된 장비를 문제점으로 꼽았으며, 2022년 11월 기준으로 평균 대기 시간은 3개월을 초과한다고 밝히고 있다 (https://www.cbc.ca/news/canada/british-columbia/wait-times-for-medical-and-have-gotten-progressively-worse-1.6643844). 나도 처음에는 3개월까지 각오했는데 1달 반 만에 연락이 왔으니 만사를 제쳐두고 예스를 외쳐야 했다. 


집에서 Vancouver General Hospital이 엄청 가깝지는 않은 편이라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갔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임을 자랑하듯 진료 분과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무슨 센터도 꽤 많다. 게다가 주변에 전문의들이 클리닉을 요새처럼 구축하고 있기에 거대한 병원 밀림에 들어온 기분. MRI station을 찾아 삼만리 하다 보니 몇 겹의 철옹성 같은 문을, 신원 확인을 매번 거치며 지나치고 나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볼 법한 백인 의사/간호사들이 바글바글한 곳이 나타났다. 이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부분. "전산화 작업 중이니 여러모로 시간이 지연됨을 양해해 달라"는 접수부 문구가 귀여웠다. 언제 적 전산화를 이제 시작하고 있냐 싶겠지만, 이곳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의사들 클리닉에 가면 여전히 종이 차트를 활용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가 찾아가는 할머니 의사는 초진 때 대형 저울 한쪽에 나를 올려놓고 반대편에 추를 올려가며 내 몸무게를 쟀었더랬다... 그때의 문화 충격이란. 그 할머니 의사가 유별났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 도시의 보편적인 관행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내 주변의 임산부들이 산과 의사를 방문할 때 배 둘레를 줄자로 잰다거나, 몸무게를 저울추를 이용해서 잴 때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할 때였다. 


각종 수술병력, 알러지 반응, 폐소공포증 여부 등을 작성한 양식을 제출하고, 지시사항대로 옷을 모두 갈아입고 소지한 금속이 없음을 확인한 후 하얀색 튜브가 펼쳐진 침대로 안내를 받았다. 나는 분명 폐소공포증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고, 방금 제출한 양식에도 폐소공포증 없음으로 기재해서 냈는데, 하얀색 대형 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눈앞에 내려온 튜브의 표면을 인식하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싶어졌다. 문제는 MRI 스캔을 하는 동안 최대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 큰 들숨 날숨도 안 되고, 기침도 안 되고, 발가락 꼼지락도 안 되고, 들썩들썩도 안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다시 찍어야 할 수도 있다니 꼼짝없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소리가 너무 커서 불편했다고 한다. 일단 소리가 매우 시끄러운 것은 맞다. 미니 당근같이 생긴 주황색 이어 플러그를 하고 헤드폰을 뒤집어썼는데도 소리는 아주 선명하다 못해 내 고막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데시벨을 자랑했다. 개인적으로 차라리 좀 시끄럽더라도 다양한 종류로 바꿔가면서 소리가 들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만약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하얀 튜브 내부만 눈앞에 떠 있는데 나는 명백히 좁은 관 안에 들어와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다면 그 편이 훨씬 더 숨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튜브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숨 막힐 것 같은 느낌에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폐소공포증이 없는 사람도 이거 몇 번만 더 하다가는 없던 폐소공포증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관절 스캔이라 그런지 굉장히 빨리 끝났다. 체감상으로는 15-20분 남짓이었는데, 간호사가 15분짜리였다고 설명해 주었다. 튜브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괜히 어깨도 한 번 돌려주고, 발가락도 움직여보고, 무엇보다 흉곽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굳이 여러 번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긴 한데, 문제는 내가 찍어야 할 MRI 스캔이 하나 더 남았다는 것. 


의료진에게 물어봤다. 뇌 MRI를 찍을 때에도 비슷한 시간이 걸리냐고. 

안타깝게도 30분에서 1시간 가까이 걸릴 수 있다는 대답과, 특수 헤드기어까지 보여준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헬멧같이 생겼는데 누가 봐도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해 보였다. 다음 MRI는 어디서 찍냐고 묻길래 학교 병원에서 찍는다고 했더니, 거기는 튜브가 이 병원보다 좀 더 좁단다. 쳇...




MRI가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요즘 번아웃을 겪고 있는 상태라 그런지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쓸데없이 숨을 참거나, 자기 직전 공기 중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이 들어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잦아졌다. Paula에게 물었더니 일종의 panic 현상이라며, 몇 가지 해결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한 세션을 채웠다. 얌전히 말을 듣고 있다가 물었다. "MRI 찍을 때에도 도움이 될까?"


인생 경험치가 많은 상담사를 만난다는 것은 때로 길 가다 돈을 줍는 것 같은 행운과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Paula는 panic disorder를 겪은 적이 있어 내가 요즘 겪고 있는 부분을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할 수 있었고, 본인도 뇌 MRI를 찍어본 적이 있어서 나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서 먹고 찍으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 심신이 여러모로 지친 상태이고 없던 폐소공포증도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을 이전 MRI에서 받고 왔는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등급이 높은 약물이 아니니 일반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바로 처방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다음날 바로 의사에게 연락을 했더니, 흔쾌히 처방해 준 약은 Lorazepam 계열의 Ativan. 내 키나 몸무게에 맞게끔 최소 용량으로 처방하였는데, 혹시 몰라 2알을 더 넣었단다. 당일날 이상한 부작용이라고 생기면 곤란하니까 한 알을 먹고 잠들어 보기로 했다. 


신경안정제 계열의 약을 먹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몸이 노곤해지고 정신이 밋밋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 자는지도 모르고 잠에 들었던 기억이 났고, 다음날도 약간은 가라앉은, 그렇지만 우울한 것은 아닌데 과하게 불안하거나 생각이 이리저리 튀거나 호흡을 참거나, 하는 증상이 완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이밍도 정말 좋았던 것이, 상담을 한 이후에 스스로 호흡이슈가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되니까 호흡이 조금씩 더 불편해졌다. 심지어 평생을 아무 문제 없이 다니던 수영장에서 매번 물속에 얼굴을 담그기 직전에 '나는 괜찮다'는 주문을 외우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으니. 그다음 날 먹은 약물은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었고, 마법사의 돌을 얻은 것 마냥 자신감이 생겨 다가올 MRI 스캔이 두렵지 않아 졌다. 


대망의 뇌 MRI는 UBC 병원에서 오전 7시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쫄래쫄래 걸어가고 싶지만, 이미 신경안정제를 한 알 먹은 터라 안전하게 조수석에 실려 가기로 했다. 일주일 전에 다른 병원에서 봤던 헤드기어에 머리를 넣고 몸을 뉘인 채 좁은 튜브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폐소공포증 우려가 있어 약을 미리 먹고 왔다고 했더니 의료진이 친절하게 "10분 남았어요", "5분 남았어요"를 알려줘서 잘 버틸 수 있었다. 지난번 스캔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 머릿속으로 500에서 7씩 빼기, 미드 대사 따라 하기 등을 하면서 놀다(?) 나왔다. 


현대 의학의 힘은 대단하여 나는 아무 문제 없이 MRI를 찍고, 호흡 이슈도 진정되었으며, 아직까지 약기운이 덜 빠져서 하루종일 조금은 헤벌레 하면서 지내고 있다. 



[몇 가지 정보 공유]

1. Lorazepam

제가 먹은 신경안정제는 로라제팜 계열의 브랜드네임 Ativan이라는 약물입니다. 불안장애, 수면장애, 초조함 등을 다스리기 위해 단기로 쓰이는 약물이라는 설명을 의료진에게 들었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약이 좋다, 어떤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혹시 MRI를 앞두고 계신데 폐소공포증 혹은 그와 유사한 불안증을 앓고 계신다면 담당 의사에게 적절한 약물을 처방해 달라고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일회성으로 먹는 것이고, 환자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MRI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2. 병원비교: Vancouver General Hospital vs. UBC Hospital

물론 MRI를 찍을 일이 있어서 해당 병원에서 연락을 받을 때, 어떤 병원을 갈지 환자가 고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기도 길어서 어디든 빨리 자리 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장땡이에요. 다만 제 경험에 의하면 VGH 기계가 조금 더 넓었고 UBC가 미묘하게 좁았습니다. 어차피 안대를 쓰거나 눈을 감고 계실 거라면 큰 차이 없긴 합니다. 기계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는 둘 다 비슷한 데시벨이었고요. 


의료진은 둘 다 비슷하게 친절합니다. 과한 친절은 아니지만 환자의 상태를 말하면 최대한 그에 맞춰서 도와주려고 하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예약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시는 편을 추천드립니다. VGH는 기계가 1대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대기실에서 45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UBC는 기계가 1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약을 타이트하게 잡지는 않지만 같은 시간대에 2명이 걸리면 앞사람이 끝날 때까지 최소 15분에서 30분 정도 기다려야 하니, 본인 예약시간 보다 5-10분 정도 일찍 가시길 권장드립니다. 물론... 이 도시는 예약이 크게 의미는 없는 곳이라 운이 나쁘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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