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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ul 20. 2024

내 생각을 다 믿지 않을 자유

I Might be Wrong by Bijorn Lindeblad 

** 아래는 I Might Be Wrong by Bjorn Natthiko Lindeblad를 읽고 저자에게 보내는 제 독백입니다. 닿을 길 없겠지만, 그래도 보내봅니다. 





승려님, 

아니, Natthiko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름의 뜻이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혜가 자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신의 스승님이 지어주셨다고요. 

그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속하고자 했던 곳에서 편히 영면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책 초반부에 기술되어 있는 Natthiko 당신의 삶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기에 안성맞춤일 정도로 흠잡을 데가 없더군요. 스톡홀름경제대학을 졸업 후 당시 스위스 최대 가스업체이자 다국적 기업에 단숨에 입사를 했고, 재무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훌륭한 저택과 개인 전담 비서를 제공받았다면서요. 그 이후 최연소 CFO 승진 등... 아마도 생전에 한국에서 저자 사인회를 하셨더라면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휘황찬란한 청년기를 보낼 수 있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으셨을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하버드 법학대학원 석지영 (Jeannie Suk) 교수가 <A Light Inside>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한국에서 여러 번 저자 사인회를 했을 때 일입니다. 그때도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훌륭하게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하버드 법대 첫 아시아 여성 종신교수가 될 수 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뭐, 또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제가 사는 캐나다에서 제 지인이 해준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방과 후에 뛰노는 운동장에 monkey bar라는 기구가 있다는군요. 철봉에 매달린 채로 다음칸으로 이동을 해야 되는 구조인데, 언젠가부터 몸이 많이 무거워진 성인들은 아이들의 날램을 따라갈 수가 없는 요상한 기구입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학부모들은 꼭 물어본다네요. "어떻게 하면 누구누구처럼 몽키바를 잘할 수 있냐"고.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공부를 잘하고, '어떻게' 남들이 우러러볼 직장을 잡고, '어떻게'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저 멀리 앞서나갈 수 있는지가 인생을 관통하는 질문인 듯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요. 일반화, 그것도 성급한 일반화를 지양하라는 훈련도 받고 그에 따라 부단히 노력하지만 잘 안 되나 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그곳을 삐딱하게 바라보다 이런저런 일반화를 내리는 일이 어렵지 않은 것을 보면요. 


Natthiko, 당신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지 한참만에 완독 할 수 있었습니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후루룩 읽어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서평을 좀 찾아보니, 한 장 한 장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는 글이 있더군요.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모든 페이지를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읽자고 마음먹었지요. 그러다 보니 여름이 훌쩍 가 버렸습니다. 


작년 늦가을, 도쿄에서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던 어느 날의 조금은 헐렁한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오전, 오후를 그득그득 채워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입을 더 이상 열고 싶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그 길로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밀도 있게 꽉 채워진, 그렇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담배 연기가 환풍구로 들어오는 호텔방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술집과 사람이 득실득실한 거리는 어쩜 그렇게 서울의 그것을 닮았을까요. 그 시간 고즈넉한 찻집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프랜차이즈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숨 쉴 틈 없이 북적이는 이 도시에서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인의 언어를 배경음악 삼아 당신의 책에 푹 빠져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흔히 승려라고 하면 속세의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깨달음을 얻은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쉽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런 '승려'였던 당신이 보여주신 한 개인의 방황과 좌절은 퍽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자기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는" 번민으로 가득한 중생이었다고 하셨지요. 당신이 자란 곳에서도 "가혹한 내적 비평가의 목소리"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 때조차 "비난을 던지는 목소리가 흔하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꽤 놀랐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과 언젠가 그 부족함을 남들에게 '들킬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산다"며, 당신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죠. 저도 그렇습니다. "Not good enough"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았고, 살고 있고,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계속 그렇게 살 가능성이 큰 삶의 궤적이 눈앞에 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러한 문화적 소산은 내가 나고 자란 곳, 혹은 그와 같이 침략과 전쟁 그리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은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복지정책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 나라라 할지라도 비교에서 자유롭다는 보장은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류의 힘듦은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산물이라 생각한 걸까요. 얼마나 무지의 소치인지.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이 책의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저는 이것을 꼽겠어요. 당신이 부처님의 선물이라며 아낌없이 턱턱 내어놓은 그 말들 중, 저는 단연코 "내 생각을 믿지 않을 자유"가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해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선택할 순 없지만, 그래서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도 없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라고 하셨죠. 이를 위해서는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명제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결국 자기혐오와 불안에 직면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Natthiko, 당신도 동의하리라 믿어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수련을 이어가야 했을 때, 몸이 힘든 것,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 영양가 있는 음식이 부족한 것 등등, 부족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은 다 참을 수 있다고 하셨죠. 그렇지만 쉼 없이 비난하고 비판하고 독설을 날리고 의문을 제기하고 불평을 일삼는 당신 내면의 생각과 홀로 마주하는 것. 그것만큼은 결코 참을 수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그랬어야 했다", "내가 달라졌어야 했는데", "내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와 같이 과거에의 집착이 낳은 자기혐오. 이 함정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그럴 때 쓸 수 있는 마법과 같은 한 마디를 알려주셨죠. "그래, 알겠어, 근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안타깝게도 제가 지금보다 좀 더 젊을 때, 저는 그 단 한 마디를 알지 못해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자기혐오는 저에게 매우 친숙한 단어입니다. 

남과 싸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싸워서 지는 것을 더 싫어하는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치기 어릴 때 남들에게 밑 보이고 싶지 않아 젠 체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자기혐오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의 꼬락서니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없는 것을 꾸며내야 했던 것 아닐까요. 결국, 제가 그리던 이상향과 현실의 저 사이에 간극이 컸다는 이야기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볼 줄 몰랐던 그때에는 모든 화살을 저에게 겨누었고, 곧 자기혐오로 이어졌습니다. 뭐, 양육 과정이 어땠고 경쟁이 심한 환경이었고, 그런 '변명'과 같은 이야기는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제가 만든 자기혐오였으니까요. 


자기혐오가 극에 달했던 것은 역시 자아상이 아직 채 영글지 못했던 20대였어요. 대학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끼리 미래 진로에 대해 고민해 봤자 엄청나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중 가장 잘할 자신이 있었던 시험을 골라 몇 년 간 매진했지요. 제 20대의 봄여름가을겨울은 늘 크고 작은 시험의 연속이었고,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시험이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일의 공부를 내 마음에 들게 했는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서 합격을 했는지 여부가 '나'라는 인간을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적이 과연 며칠이나 될까요. 오늘 끝내지 못한 분량을 끝내야 한답시고 지새운 새벽이 숱하게 흩뿌려집니다. 


그렇지만 결국 목표한 시점에 목표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저는 스스로를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이상향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이 그렇게나 컸다니. 그 사실이 뼈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정말로 심장이 지끈지끈 아프더군요.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시험장에서 제대로 풀지 못했던 문제와, 그 문제와 관련된 교과서의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때 그 페이지를 외웠더라면, 그때 기출 분석을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등등. 그나마 노력을 전제로 한 가정법적 생각은 겸손하기라도 하죠. '그때 3번이 아니라 4번을 찍었더라면'이라는 요행을 전제로 한 가정법적 생각으로까지 발전하다 보면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시험 합격 여부 혹은 점수로 나타난 그 결과가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단숨에 결정짓는다는 것. 찰나의 (시험) 결과 하나로 가치를 논하다니... 지금의 저라면 참으로 귀여운 생각이라고 한번 웃고 보듬어줄 수 있겠지만 (사실 100%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그토록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저에겐 이런 생각을 한쪽에 밀어놓을 선택을 할 자유가 있고 나아가 믿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주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죠. 다음을 기약하거나, 내 노력이 부족했다거나, 다른 방도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그렇게 원 없이 공부한 적은 드물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순 있어요. 매일 칼같이 꾸준하진 못 했겠지만, 또, 합격선을 넘은 누군가에 비해 노력이 부족했을지도 혹은 운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그 결정이 아니었더라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 덕분에 오늘날의 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때의 그 시간은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고 '성과'로 포함시킬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디게 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봤다"라고 뿌듯하게 내 코 앞에 들이밀 수 있는 아주 몇 안 되는 시절이랄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저 생각일 뿐,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된다."


자기혐오가 과거에 발 묶인 나의 목소리라면, 불안은 지나치게 미래에 주파수가 맞춰져서 생기는 감정인 것 같아요. 특히, 극심한 불안감을 느껴본 사람들에게 "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다. 상황이 절대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속삭임을 들려올 텐데 이를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깊이 공감했습니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두드러졌던 일,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일을 더 잘 기억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하신 당신의 말을 토대로, 나에게 감정적으로 두드러졌던 시간을 조심히 들추어 봤어요. 


어느 여름,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한 대 쳐 맞고 기력을 잃기 시작했어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경험. 날이 너무 더운데 선풍기 켤 생각도 못하고, 먹을 생각도 못하고, 그저 잠만 연달아 자고 있었어요. 사람이 그렇게도 잘 수 있더군요. 그러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살아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온 몸으로 퍼졌습니다. 상황이 전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그려보고자 하는 미래가 없다'는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죠. 그때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간에서 벗어났습니다. 차가 달리는 도로에 발을 내딛을 용기가 없었던 것도 한몫했고요. 저는 아픈 게 너무 싫습니다. 그리고 그 운전자는 무슨 죕니까. 언젠가 삶의 불씨가 꺼지는 날이 오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을 없애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부모님이 각각 큰 수술을 해야 할 때도 상황이 절대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속삭임은 제 머릿속을 지배했습니다. 당시에는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온 마음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기에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그들이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밴쿠버로 돌아온 그 해 여름, 불확실성이 주는 뿌리 깊은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질까 봐.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질까 봐. 내가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데 위험한 상태일까 봐.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상상으로만 머물던 일이 실제가 되고 난 이후에는 상상이 갖는 위력이 어마어마해집니다. 알아요. 내가 걱정하는 상황 중 단 하나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은 내 머릿속 신경전달 물질의 장난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불확실성에 대해 제가 갖는 불안은 이제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구덩이를 제 사고회로에 심어 놓았어요. 그 여파는 아직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 - 예를 들어 비행기 난기류나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배 - 에서 과호흡을 맞이하곤 합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길고 빠르다는 Zip Line을 탈 때는 괜찮았는데, 사고 확률이 지극히 낮은 비행기에서의 난기류가 과호흡을 유발하다니,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아코디언처럼 길게 늘어진 시내버스가 심하게 출렁일 때 과호흡을 맞이할 뻔한 적도 있어요.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처음과 끝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마음을 다스리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리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럴 때마다 "이 또한 지나간다 (it shall pass)"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뇝니다. Paula가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당신도 같은 말을 하시기에 반가웠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 어릴 때는 이 말이 슬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크나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압니다. 어른이 된 것 같군요. 당신도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이 "참 나쁜 소식"인 동시에 "좋은 소식"임을 강조해 주셨지요.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척해요. 당신도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일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과 예상에 집착하고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계획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아이젠하워의 말처럼, 생각한 일이, 혹은 계획한 일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그러셨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할수록 삶은 외롭고 고달프며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법이다." "고통스러웠던 일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해서 이를 토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실제 미래가 아니다.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부터 영적 성장의 결정적 도약이 이뤄진다."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음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인간은 가장 현명해진다."  


Natthiko, 당신의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하셨죠. 돌이켜보면 저도 그랬습니다. 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그저 우주의 운이 나에게 몰려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태반이었고요. In the right place at the right time이었을 뿐, 제가 무엇을 특출 나게 잘했다거나 대단히 계획을 잘 세우고 전략을 잘 짜서 탄생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인생은 늘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고 게 중에는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이 섞여있었지만, 사실 '나빴던 일'도 지나고 보면 새옹지마로 작용한 일이 많았습니다. 요즘 제 말버릇 중 "다 나쁘고 다 좋은 일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2023년의 여름.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 중에는 "의미만 찾다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조언도 있었지요. '성과' 중심으로 한 개인이 평가되는 이곳에서 너무 깊이 생각을 하다 마쳐야 할 일을 제때 마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저도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되나, 하는 두려움이 잊을만하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하지만 당신의 말씀을 읽고 나는 그 여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더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낄 필요가 있다고요. 각자의 내면에 정교하게 연마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불안과 불행에 지나치게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요.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현재에 집중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믿음을 갖고 살기 -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지요. 저는 미련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제 내면의 나침반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레쥬메에 적을 수 없는 '성과'라 해도 상관없었어요. 저에겐 필요한 시간이었고, 제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 여름의 끝에 조금 더 배우게 된 것은 내려놓음의 지혜였습니다. 내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내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조금씩 이해할 때 지혜가 싹튼다고 하셨지요. '지혜'라는 말이 아직 저에게 썩 어울리는 말같이 느껴지진 않아서, 저는 '마음의 평화'로 갈음할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에게 인간적인 온정과 너그러움을 허락할 수 있는가,라는 당신의 질문을 만났을 때 매우 반가웠습니다. 머리로 답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거든요. 의외로 당신의 답은 간단했습니다. 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랬습니다. 나는 항상, '더 잘할 수 있었는데'와 같은 가정법 수사 뒤로 숨곤 했었죠.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 보다 더 잘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섣불리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제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라고. 스스로의 능력치를 알 때도 되었고, 그 이상으로 액셀을 밟으면 곤란하다고.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동혁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더 잘할 수 있었다, 나는 건 자만이라고.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순간이 나의 최선이니 현재에 집중하고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고요." 

그래요. 매 순간 나의 모습이 '최고'는 아니었겠지만,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을 잘 준비해왔다"


Natthiko, 당신이 루게릭병을 진단받았을 때 가졌던 태도와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해두고 싶었습니다. 

공포에 잠식되기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 "지금까지 진실하게 살게끔,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끔, 당신의 몸에게 거기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당신의 몸에게 전하셨죠. 그간 바르게 살았음을 알기에 다가오는 죽음을 환한 얼굴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의 말과 함께요. 죽음을 "잘 준비해 왔다"라며 미련 없이 맞이하는 모습, 꼭 기억하겠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쓸데없는 생각을 달고 산다며 나의 어머니는 화제를 돌리곤 했었습니다.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어머니가 본인과 본인의 배우자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게 되면서 각종 행정 절차에 대한 이야기는 나눕니다만,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이야기는 잘 나누지 않아요. 저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닥칠 일이 아니라는 자세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태어난 이상 죽음이라는 피니쉬 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그렇다면 더더욱 '어떻게 살다 죽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럴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정말 오늘밤에라도 내 집 문을 부수고 들이 닥쳐올 것만 같은 존재로서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던 밤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고백이지만 그것은 나의 엄청난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낸 과대망상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저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남게 될 사람을 위한 행정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며, 그날이 예기치 못하게 빨리, 그것도 제가 혼자 있는 어느 날 찾아온다면 어떤 마음으로 맞이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겉으로는 이성적인 척, 누구나 갈 날이 한 번은 오지 않나,라며 통달한 척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무서움의 대상이 죽음 그 자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끝은 정말 끝이니까요. 다만, 저는 아픈 것이 너무 싫습니다. 정말, 아프고 싶지 않았어요.  


다가오지도 않은 죽음 혹은 신체의 고통을 상상하며 덜덜거리던 나와 달리, 당신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죽음을 환대하셨지요.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어요. 왜 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일차원적인 공포나 슬픔 때문은 아니었어요. 질병에 휘둘리지 않는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잘 준비해 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의 그 마음. 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 원망, 분노, 후회, 증오를 포함하여 -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라는 말을 하는 그 마음. 

더 이상의 걱정도 의심도 없다며, 

"당신의 존재가 햇볕처럼 따뜻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할 수 있는 그 마음. 


일상을 잃지 않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다시 밴쿠버로 돌아온 여름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을 허접한 논문이 될 지라도, 내 일상을 영위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세 번 외우라고 하셨죠.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너무 미워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대로 똑같이, 아니 더 심한 벌을 받기를 신에게 빌었습니다. 한 때는 그 사람의 안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를 올렸는데, 인간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상대를 위한 공간을 내 마음에 조금도 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을 미워한다는 것도 내 마음이 참 고되고 힘든 일이더군요. 지금도 그 마음은 유효합니다. 내가 눈 감는 날까지 다시는 그 얼굴을 마주하지 않길 바랍니다. 잘 먹고 잘 살아서 불필요하게 얼굴 마주할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것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저를 쳤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상대방의 잘못으로 이 사단이 난 것이라 생각하고 살았었거든요.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내가 봤던 것과 내가 기억하던 것들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 상대도 어쩌면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전투를 오랫동안 치뤄왔겠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저라는 사람은, 한 번 싫어하는 마음을 먹으면 때려죽여도 그 마음을 돌리기가 힘들더군요. 여전히 똑같습니다. 내가 선택해서 이어진 인연은 아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그 상대를 마주치기 않길 바랍니다. 다만, 그도 매일 누군가와 - 자기 자신, 회사, 세상, 가족, 혹은 무수히 많은 그 어떤 존재들 - 전투를 치르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은 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남에게도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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