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적
발목 염좌가 생긴 지 어언 한 달.
ChatGPT에게 일반적인 염좌 치료과정과 재활에 대해 물어보며, "다 낫는 데에 얼마나 걸리니?"라고 물었더랬다. "가벼운 염좌라면 1-2주, 그보다 중등도 염좌라면 2-4주, 더 심각한 염좌라면 4-6주 혹은 그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라는 무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엔 2주도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4주가 지나버렸다. 첫 1주는 걸음을 걷지 못했고, 그다음 1주는 발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겨우 화장실을 다닐 정도였으며, 3주 차가 되어서야 겨우 조금씩 바깥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사고는 한순간, 후유증은 오래도록.
응급실 의사와 물리치료사 2명 - 도합 3명의 전문가를 만났고 1달이 넘도록 클리닉을 돌아가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무도, 왜, 염좌가 발생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추론만 할 뿐.
가장 흔하게 겪는 발목 염좌는 외측인대 염좌라고 하며, 발목 염좌의 약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발목 염좌 자체가 꽤 흔한 부상인데, "전체 스포츠 손상의 10-30%를 차지한다" (질병관리청: https://health.kdca.go.kr/healthinfo/biz/health/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View.do?cntnts_sn=5441).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디거나 높은 구두를 신다가 발목이 꺾였을 때 생길 수 있고, 발이 안쪽으로 꺾이기 때문에 바깥쪽 복숭아뼈와 그 주변 발등 인대를 다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에 반해 내측인대 염좌는 발을 바깥으로 꺾었을 때 발생하는데, 내측인대가 외측인대보다 10배가량 두껍고 질긴 탓에 부상이 생길 확률이 현저히 낮다고 한다 (그런데 저는 왜... 그 낮은 확률에...?) 대신 한 번 다치면 낫는 데에도 오래 걸리고 재활에도 시일이 많이 소요된단다 (https://m.blog.naver.com/kimpulse/220649603133).
처음 응급실에서 x-ray를 찍을 때만 해도 외관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치고 4일 후 지연된 부종과 열감이 생기고 나서야 물리치료사는 중족부 염좌를 의심했다. 그러다 복사뼈 아래로 멍이 들기 시작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통증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내측 인대 중 삼각인대를 다친 것 같다고 했다.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추론이었다. 심증이 있어도 정형외과를 달려가 바로 초음파를 찍어볼 수 있는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는 것에 안도할 뿐. 실제로 GP를 만나서 정형외과 의사한테 referral을 넣고, 그 의사가 나를 만나 초진을 한 후 초음파든 뭐든 image scanning referral을 넣은 뒤 내가 실제로 사진을 찍어볼 수 있을 때엔, 이미 내 발목은 다 낫다 못해 다른 운동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몸의 한 구석이 불편해지자 온몸의 관절이 얼마나 종잇장 같은지, 그리고 자기들끼리 그동안 얼마나 말없이 친하게 지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보조장치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나타난 불편함은 족저근막염이었다. 약 2년 반 전, 눈 오는 토론토에서 살아남아 보겠다고 겨울부츠를 신고 여행을 다녔는데, 신발 바닥이 딱딱하던 탓에 결국 발바닥에 탈이 났다. 그 이후 한국에서 매우 충격적인 체외충격파 치료도 받아보고, 보조용 깔창도 써보고 했지만 쉬이 낫지 않다가, 잊을만하니 증상이 사라졌다. 옛날 옛날에는 모양이 이쁘다는 이유만으로 밑창 딱딱한 컨버스라든지, 앞코 다 트여있는 샌들이나 플립플랍을 겁도 없이 신고 다녔었는데. 심지어 그걸로 유럽여행도 다녔었는데. 앞코 터진 샌들 신고 다니다가 엄지발톱 뽑혀, 납작한 신발 신다가 족저근막염 생겨. 그때 몸에게 빚진 걸 지금 갚고 있나 보다. 요즘은 무조건 밑창 통통한 신발만 신는데, 내 노력을 봐서라도 부채 상환기간이 빨리 줄어들면 좋겠다.
체중을 "even"하게 실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화르륵 불타던 어느 날, 과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던 허리가 뻐근하다. 고관절도 더 틀어지는 것 같다. 얼마 못 가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에라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 수영을 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동네 사람들, 나 발목 다쳐서 수영을 못 가요!' 라며 광고하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지만 뭐 어쩌겠는가. 대신 2명의 물리 치료사를 번갈아가며 만날 때마다 언제 수영하러 가도 되냐고 뻔질나게 묻긴 했다. 아주 쪼금 민망해서 "나 전문 수영선수는 아냐"라는 말을 덧붙이며.
썩 시원한 답을 주지 않더니 3주 차가 지나자 이제 재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멀쩡한 오른쪽에 비해 현저히 가동범위가 떨어진다. 내 얕은 생각으론 발목 하나 2주 정도 묶어놨다고 이렇게 몸이 약해지나 싶었지만, 관절의 운동을 완전히 제한했을 때 빠르면 24시간 길면 48시간 내에 근육 경직과 소실이 발생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발로 버티기 따위는 운동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왼 발로는 1초도 버틸 수 없었다.
발등을 누르는 스트레칭을 하다 이 사달이 난 것으로 추정되던 탓에, 발목이 뻣뻣할지라도 이걸 억지로 눌러볼 엄두를 못 냈다. 오직 물리치료사를 만날 때에만 용기가 났는데, 그는 꽤 힘을 주어 내 발목을 아래로 누르고 나는 힘을 주어 그걸 버텨내야 했다.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던, 난쟁이를 널빤지에 맞춰서 늘리는 형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른 물리치료사는 왜 아직 가동범위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작정하고 복숭아뼈 아래 삼각인대를 힘주어 누른다. 으악, 다친 뒤로 한 번도 건드려본 적 없는 부위인데. 긴장해서 몸이 굳었다. 통증인지 뭔지 모를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도, 염증이 다시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맞아요. 쫄보예요 ㅠ).
2명의 물리 치료사 모두 수영을 조금씩 해봐도 좋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수영장으로 갔다. 어언 3주 반이 지나있었다. 살금살금 다니자고 마음 먹었지만, 나도 모르게 옛날(?) 생각을 하며 물에 점프하다가 발등이 물을 잔뜩 누르면서 들어가는 바람에 발등이 펴졌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찝히는 느낌에 감각이 집중되었다. 우엥 아프잖아 ㅠ
어차피 첫날은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감 잡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속에서 킥을 못하니까 꽤 당황스러웠다. 발등에 힘이 없으니 물을 전혀 감아내지 못했고, 발등 어딘가 안 쪽에서 계속 찝히는 느낌이 났다. 결국 풀부이를 끼고 상체 드릴만 하고 끝냈다. 물속에서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니, 매우 생경했다.
여전히 가동범위는 안 나오지만 또 상체 드릴만 하기로 하고 수영장을 간다. 아주 쪼끔 나아졌지만 여전히 발은 무용지물이었다. 순간 굉장히...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태로는 어디 물에 빠져도 살아나기 어렵겠다. 수영을 할 줄 아는데, 수영을 못하다니. 아하하 ㅠ
다친 지 4주 차가 되니 조금 더 빨리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swim club을 빠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주 1회 있는 세션인데 이미 2번 빠졌고, 1주는 원래 휴강이었으니, 약 1달 만에 다시 수업을 가는 셈이다.
오랜만에 보는 독일병정 코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동안 왜 안 나왔냐고 물었다. 답이 궁금한 것 같진 않지만 발목을 삐었다고 답했다. 선수들은 발목 하나 삐었다고 운동을 쉴 수 없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코치가 알지 않을까 기대하며 물었다. any suggestions?
안타깝지만 별다른 suggestion은 없고 쿨내 이역만리까지 퍼지는 답이 들려온다.
"오늘 우리 평영 할 건데 풀부이 끼고 상체만 따라 하든가. 뭐, 겁나 힘들겠지만."
그룹 운동을 하면 항상 오버페이스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늘은 기필코 많이 많이 쉬면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번 허우적거리는 걸 지켜보더니, 독일병정 코치가 날 부른다. 돌핀킥(i.e., 접영킥)을 해볼 수 있겠냐고. 힘줘서 할 필요 없고 가볍게 웨이브만 타란다. 구.. 구래... 말이 쉽지... 한 번 해볼게...
풀부이는 보통 상체 동작을 교정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하체를 고정시키는 보조도구이다. 그래서 풀부이를 끼고 있으면 킥을 할 필요없이 상체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상체 드릴은 늘 하던거라 문제가 되지 않는데, 풀부이 없이 물에 떠 있되 하체에서 전혀 추진력을 낼 수 없는 상황은 처음 겪는 생경함이었다. 다행히 큰 통증은 없어서 현저히 느리지만 앞으로 나가는 데에 만족하며 한 바퀴, 두 바퀴, 나아간다.
아프냐고 묻길래, 안 아프다고 해더니, 그럼 이제 평영 발차기를 해보자고 한다. 평영 발차기야 말로 4개 영법 중 발목에 가장 많이 회전을 걸어야 하는 킥이다. 그리고 발목이 외측으로 회전한다. 즉, 내측인대를 다치던 각도란 뜻이다. 내가 자신이 없어 조금 주저하자, 오늘 처음으로 독일병정 코치가 나한테 말을 길게 한다.
"부상을 당해도 회복을 해야 하잖아. 회복에 가장 좋은 건 움직여서 혈류량을 늘려주는 거야. 통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조직에 손상이 생긴 건 아냐 (pain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the tissue's damaged). 종종 뻣뻣해진 인대나 주변 조직이 불편하다는 시그널을 뇌에 보냄으로써 동작을 더 제한하는 경우가 많아."
우왕. 운동선수의 마인드셋이란 저런 것인가.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래 뭐, 쟤는 나보다 부상을 10배, 100배 더 많이 겪었겠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보다 훨씬 잘 알 테고,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겁내지 말고 해 봐도 되지 않을까.
다행히 평영킥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되긴 했다.
아직 추진력을 많이 낼 순 없다고 했더니,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고 코치가 먼저 선을 그어줬다.
신체적으로 될 때가 되어서 된 것이겠지만, 하다 보니 찝히는 느낌도 사라진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뇌의 농간(?)인가. 괜찮으리라 생각해서 정말 괜찮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또 신나서 오버하지 않으려고 벽에 붙어서 굳이 많이 쉬었다. 마지막엔 2비트 킥으로 자유형까지 하는 나를 보며, 멀리서 보던 짝꿍이 '쟤 또 오버하네'라고 생각했단다. 흥.
그나저나.
왜 다쳤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당분간 더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물리치료사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니까 나 왜 다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