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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있는 임산부의 미니멀 임신

다른 임산부 말고 나라는 임산부

by 애기곰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언제 알리지?

준비해야 할 건 뭐지?

조리원 예약은 언제 할까?

출산준비(육아용품) 리스트는?

곧 열린다는 베이비페어라도 가봐야 할까?

...


나 역시 아기 둘의 심장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각종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의 종류와 길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다른 이들이 말하는 필수 육아템 목록을 자주 기웃거렸다. 고작 심장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는 그렇게 바쁘게 내달렸다.


분주했던 나를 멈춘 건 다음 산부인과 검진이었다. 임신 8, 9주에 아기를 하나씩 잃으면서 모든 것이 멈췄다.

이후 반년도 안 되어 다시 한번 임신이 되었지만, 심장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화학적 유산으로 떠나보냈다.




2년 후, 쌍둥이를 다시 임신했을 때 조금은 담담할 수 있었다.

유산 경험자로서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미리 학습했기 때문인 걸까. 외벌이로 시험관을 아홉 차례나 진행하느라, 여유를 부릴만한 형편이 아니었던 덕분일까. 결혼 12년 만에 맞이한 임산부는 꽤 해탈한 모습이었다.


임부복이라고는 동생이 물려준 원피스 몇 벌과, 5천 원에 구매한 중고 레깅스 두 벌 뿐이었고, 임산부 속옷이 없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적도 있다. 만삭 쌍둥이 임산부에게 가장 편한 옷은 남편 옷이었는데, 아직도 커다란 남편 옷을 편안하게 휘감았던 그 시절 기억이 애틋하다.


나는 그저 소비를 통한 순간의 행복을 좇기보다, 곧 만나게 될 아이들을 위해 내면이 좀 단단해지고 싶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행렬에 줄 서기보다, '희미하더라도 나만의 줄'을 긋고 싶었다. 일시적인 이벤트보다 장기적인 변화의 출발선에 서고 싶었다. 다른 임산부 말고 '나라는 임산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베이비샤워, 베이비페어, 태교여행, 산전마사지, 전문 만삭사진 촬영, 태아보험 가입...

이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나를 건너갔다.


임신이라고 특별한 지출을 해서 행복했던 것도 아니고, 출산 준비를 넉넉하게 해서 안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뒤돌아보니 임신 기간만큼 나를 단련시켰던 것도 없는 것 같다. 좋은 물건을 사기보다 (육아 퇴직 예정인) 남편과 함께 육아할 생각에, 벌이가 없을 육아 기간을 무사히 견딜 수 있도록 담금질을 하는 시간이었다.


삶에서 약간의 제'약'은 정말로 '약'이 되었다.

조금은 더 튼튼해진 마음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산후우울감을 막아내는 데 열심이었고, 한층 소박해진 삶의 스타일은 잠시 불어났던 육아용품에도 끝내 자리를 지켰다. 벌이는 없었지만 누구 하나 불행하지 않았고, 적은 돈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장착하게 된 시간이었다.




저마다의 삶,

저마다의 임신,

저마다의 육아다.


다른 이들의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산만해지지 않는 것.

열 달이면 연습하기에 너끈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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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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