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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카야 Nov 23. 2023

인생에는 다 때가 있다

울 아들이 다섯 살 때쯤인가,

아들이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신나게 가서 수영복도 잘 갈아입고 수영 선생님 따라 수영장 안으로 잘 들어갔는데 

갑자기 물에 안 들어간다며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생님도 달래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너무 심하게 우는 아이에 당황해하셨고

급기야 방송으로 날 찾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수영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으며 풀 한가운데로 등장해야 했다. 

하필 그날따라 옷도 머리도 세상 후줄근한 모습으로 

한 손으론 둘째 유모차를 밀고 다른 한 손으론 우는 큰 아이를 끌고 

외국 엄마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뒤로 느끼며 수영장을 가로질러 나왔다.

아~~ 나오는 길은 왜 그리 긴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미친년처럼 아이에게 소리소리 지르고, 

혼나 울다 잠든 아이를 보며 죄책감에 울고...

아이가 이런 것이 하루가 멀다 싸우는 남편과 나 때문인 것 같아 속상해 또 울고,

급기야 돈도 없이 이곳까지 우리를 끌고 와 고생시키는 남편에게 화살이 돌아가 

결국 그날 한바탕 부부 싸움으로 끝을 맺었다

그때의 나는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로 돈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독박 육아에 지치고

모든 것에 주눅 들어 자존감이 바닥인 때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정확히 세 달쯤 후 아이가 다시 수영을 하고 싶다고 졸라 할 수 없이 다시 레슨을 등록했다

혹시 저번처럼 또 무대(?)에 등장할 수도 있어 가볍게 화장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 웬걸 수업 내내 제일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즐거워하는 게 아닌가

너무 신나 집에 와 바로 곯아떨어진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좀 혼란스러웠다

난 그때 왜 그렇게 속상해하고 나 자신을 자책했을까

그냥 그땐.... 수영을 시작하기엔 좀 이른 때였던 것뿐 인대...


남편 유학 차 갔던 캐나다에서 경제 사정으로 인해 갑자기 한국으로 쫓기듯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 없던 돈은 유학하느라 다 써버리고 그때 우리는 진짜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였다

당장 월세방을 구하고 두 아이들은 학원으로 어린이집으로 돌리고 우리 부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 정말이지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이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사달라고 졸라 조그만 마티즈 한 마리를 입양했다

매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지쳐 집에 오면 여기저기 똥과 오줌을 싸 놓는 강아지가 너무 미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다

정말이지 그땐 사는 데 너무 지쳐 내가 키우고 잇는 게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조차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나를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난 또 한 마리의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우리 루이...

지금 네 살인 우리 루이는 나에겐 늦둥이 아들 같은 존재이다.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산책하고..

정작 아이들 키울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루이가 하루하루 크는 게 아쉽고 애틋하다

벌써부터 우리 루이가 아프면 어쩌나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러면서 예전 강아지한테 너무 미안하다 

괜한 욕심에 데려와 그 조그만 생명체에 제대로 사랑 한번 주지 못하고 보내 버린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때는 강아지를 키울만한 때가 아니었는데....


난 대학교 때 진짜 징그럽게 공부를 안 했다

과 아이들이 나를 강의실 안에서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술 먹고 노는 데 나의 온 열정을 쏟았다

당연히 제때 졸업을 못해 두 학기나 더 다닌 후에야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공부에만 매달리기엔 내가 너무 예쁘고 젊다는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로부터 20년 후,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난 캐나다에서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공부를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안 예쁘고 늙어서이기도 하지만,

난 내 아들 또래의 동급생들과 나보다도 어린 교수들 사이에서 잘 되지도 않은 영어로 

나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열정을 불 살러 열심히 공부했다

생전 처음으로 장학금이라는 것도 받아보고 나름 꽤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그 덕에 50 가까운 나이에 안정된 직장도 잡을 수 있었다

지금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하면서 계속 공부하고 있다


만약 내가 젊었던 그때 대학에서 지금처럼만 공부했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아마 더 화려하고 찬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어쩌겠나 그땐 때가 아니었던 것을...


살아보니 인생에는 다 알맞은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나이가 이만큼 먹어도 아직도 그 적절한 때를 알 수는 없지만

다만 어떤 일이 생각만큼 되지 않아도, 노력해도 내 맘 같지 않은 일에는

나를, 내 팔자를 자책하기보다

그냥 지금은 때가 아니려니 생각하고

그때를 기다리는 조금의 마음의 여유는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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