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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산일기 Dec 04. 2015

너는 글을 써라, 나도 글을 쓸 터이니

新한석봉 엄마 시대를 맞은 엄마의 자세

“자, 이제부터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써 보거라.”

이 유명한 대사의 주인공은 아시다시피 조선 최고의 서예가 한석봉의 어머니이다. 이 한 마디로 우리는 그녀가 아들을 조선 최고의 명필가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엄격하게 교육했는 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역시 한석봉의 어머니 못지않게 그야말로 자식의 ‘열성 팬’으로 삶의 전부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엄마도 꿈을 키워야 하는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자녀는 그들의 인생을,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나의 엄마는 미술학도였다. 단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것뿐 아니라, 10대 때부터 이미 유명한 대학 교수에게 그림 교습을 받았다.  요즘에야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유치원 들어갈 무렵부터 사교육을 받는 것이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술공부에 오랜 시간과 재화를 투자한 셈이다. 하지만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빠와 결혼을 했고, 나와 남동생을 낳아 키우며 붓 대신 밥주걱을 잡았다. 엄마는 여타 전업주부들 중에서도 유독 가정적인 타입이었는데, 이를테면 나는 학창시절 단 한 번도 열쇠로 집 대문을 열어보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늘, 엄마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있었다.

때때로 엄마는 우리 가족의 5분 대기조 같았다. 아빠가 중요한 서류를 잊고 출근하거나 내가 준비물을 빠뜨린 채 등교했을 때, 동생이 돌연 친구와 다툰 날에도 엄마는 번개처럼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녀가 결혼 전 무려 10여 년이나 그림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엄마가 된 후 그녀의 일상 중 그 어떤 부분에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언젠가, 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수업 자료로 활용할 그림을 부탁한 기억이 있다. 엄마가 그린 그림은 꽤 인기를 끌어서 다른 반까지 소문이 퍼졌고, 덕분에 나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내게,  “바른생활시간에 쓰는 그림, 그거 너희 엄마가 직접 그리신 거라며?” 하고 물어 올 때에는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일을 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지인이 사정상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가 미술학원의 원장이 되는 것보다 지금처럼 우리 남매를 키우고 당신을 내조하는 ‘현모양처’로 남아주길 바랐다. 아빠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엄마는 결국 제 자리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우리 남매와 아빠의 뒷바라지에 다시금 온힘을 쏟았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실은 나도 그 당시 집에 있는 엄마를 당연히 여겼다. 심지어 엄마의 사회활동에 대한 욕구를 못마땅히 여기기까지 했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가끔 그때의 엄마를 돌이켜본다. 식구들을 위해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접어야 했던 그녀의 젊은 시절을 말이다.만약에 나의 엄마가 아빠의 의견에 맞서 끝내 미술학원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엄마가 그린 그림 교재로 수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년 생일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열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는 당신의 일을 통해 보람과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물론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과 관심 속에 우리 남매는 이토록 어엿하게 잘 자랐고, 엄마 또한 당신의 결정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행복하므로, 당시의 엄마도 행복했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아이가 커갈수록 주변의 워킹맘 동지들이 하나씩 줄어가는 것을 느낀다. 결혼 전만 해도 승승장구 커리어를 쌓던 친구들도 어느 해  하나둘씩 일터에서 멀어져 간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서, 육아휴직을 맘 편히 사용할 수 없어서, 그동안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학부모가 되면서...... 그녀들은 자신의 앞에 붙던 직함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엄마로만 돌아기기로 선택한다.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엄마들 중에는 “저도 예전에는 일을 했었어요.”를 시작으로 일터를 떠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다. 비로소 아이들을 믿고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시기가 찾아와 다시금 사화로 돌아가려 시도해 보았지만 남편과 시댁의 반대에 부딪힌 엄마들도 있다.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월 500만 원 이상씩 받아올 것 아니면 밖에서 일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이에요.”

엄마가 직장에 나가게 되면 당연히 육아와 가사 일을 도와줄 이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차피 집에 있으나, 돈을 버나, 남는 게 없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계에 큰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닐 바에는, 되도록 육아에 전념하라는 뜻 이리라. 가족들의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완전히 동의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설사 내가 버는 돈이 모조리 도우미 비용으로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일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는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따라오는 성취감은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워킹맘의 입장을 좀 더 대변하자면, 일은 나의 일부이자 때때로 전부가 되기도 한다. 벌이냐 얼마인지, 전문직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책 <대한민국 대표 엄마 11인의 자녀교육법>을 쓰면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알 수 있다. 엄마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만큼 현실적이고 절실한 교육은 없다.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딸을 보며 생각한다. 이 아이들도 언젠가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훗날 아이들이 제 삶을 마음껏 누릴 때, 허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나 역시 나의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참고로, 당신은 알고 있었는가? 한석봉의 어머니는, 실은 워킹맘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도 손을 걷어붙이고 떡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하여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들의 글 솜씨에 대적해 예쁘고 고른 모양으로 떡을 썰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이력서를 쓰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 곧 직업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든, 취미든 목표를 세워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시대는 저물었다. 각자의 인생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모습임을, 진정한 행복임을 인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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