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석조(石造) 뒤에 숨은 삶의 자리

by 온지정원

강원도 평창에 혼자 계시던 할아버지가 서울 우리 집으로 이사 오시면서, 돌벽 집의 평화는 묘한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방 세 개에 이미 다섯 식구가 꽉 들어찬 집에서 할아버지의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낮에는 집을 지키시다 밤이면 동네 양로원으로 잠을 자러 가시는 외출이 시작되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노인들의 식사와 간식을 대접해야 했던 양로원의 규칙은, 융자를 끼고 무리하게 이사 온 우리 집 형편상 녹록지 않았고 결국 할아버지는 양로원에서의 눈치를 뒤로하고 집 가장 작은 방으로 들어오셨다.

​집안의 공간은 생활을 위해 변형되었다.

안방 다락문을 오르면 옥상 발코니로 나가는 길 외에도 집내부 전체의 꽤 넓은 면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주방 천장 위 공간에 장판을 깔아 부부의 침실을 만드셨다. 성인은 고개를 숙이며 이동할 수 있는 그 공간에서 부모님은 밤을 보냈다.


원래의 안방은 자개장롱과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놓은 가족 공용실이자 언니와 나의 학습 공간이 되었고, 우리는 또 다른 작은 방에서 몸을 부대끼며 잠을 잤다.

​석조 기둥 사이 대문을 열고 화단을 지나 현관 계단을 오르면, 늘 꼼꼼한 물걸레질 대신 물칠을 대충 했던 거실이 나왔다. 그 거실 한편에서 10살의 나는 원인 모를 신경통에 시달렸다.

부모님을 닮아 허리가 약했던 탓인지,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고 3학년 때부터 엄마를 따라 침술원을 전전하며 허리에 긴 침을 맞았다.


아빠 역시 마흔 줄에 접어들며 정수리에 두꺼운 각질이 쌓이고 탈모가 시작되었다. 집은 화려해졌으나 가족들의 몸에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각질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5학년이 되던 해, 엄마에게 기적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양수 검사로 확인한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짧았다. 부동산 중개 일을 하던 엄마가 물건을 가로채 간 동네 아줌마와 격렬하게 시비가 붙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이를 유산하고 만 것이다.

온 가족은 슬픔에 잠겼고, 그 아줌마는 두고두고 우리 가족의 원망을 샀다. 하지만 엄마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6학년이 되던 해, 마흔의 나이로 엄마는 다시 임신에 성공했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남동생을 낳았다.

​한 시간을 꼬박 걸어 병실로 향하던 그 길, 나는 엄마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아들의 탄생과 함께 엄마는 안방을 차지했고, 언니와 나는 다시 다락방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집안의 서열이 완전히 재편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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