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독학자의 기쁨
어디까지 했더라? 아, 영어 선생님. 나한테 영어 과목 학습 수준은 상대적으로 그나마 봐 줄 만한 것이긴 했지만, 눈에 띌 만큼 괜찮은 성취를 쌓은 건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영어 점수로 대학 진학에 성공하긴 했다(수학 성적이 무진장 낮았는데 이걸 영어로 조금 커버했다). 아, 그리고 수능 외국어영역 지문을 읽으면서 우연히 단어를 예시 문장 맥락 속에서 익히면 훨씬 더 기억에 잘 남는다는 그 감각을 익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모든 단어를 그 방법으로 외웠다면 참 좋겠겠지만, 뭐 그러진 않았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고부터는 소프트웨어공학을 공부했다(아, 내가 이과반 학생이었다는 얘기를 했던가?). 요즘은 한차례 IT, 개발자 취업 붐이 일어 사람들의 인식이 제법 높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내 전공을 듣고는 한 친척 어른이 "너 공부 진짜 안 했구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뭐 하는 덴지도 모르고 간 것에 비하면 내 전공은 지금도 제법 마음에 든다. 소프트웨어공학은 좀 큰 학교에서는 전공 대신 과목으로 배우기도 하는 분야인데, 소프트웨어 구현에 관련된 여러 방법론과 철학 등을 이론적으로 익히고 코딩도 좀 하고 그런 식이었다.
대학에 오니까 애들이 공부도 안 하고 영어는 더 안 하고 참 잘 놀았다. 나도 좀 그 분위기에 취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입시 이후 내 삶을 전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인지 그때부터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교에서 영어 회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소위 영어 원어민 교수님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는데, 캐나다에서 온 마틴은 맨날 즐거운 듯이 'Debate!(말로 싸워 보거라)'만 외쳤다. 그리고 나는 음악 꿈나무였기 때문에, '버클리 음대에 가겠다'라든지 '프랑스로 뮤지컬을 보러 가겠다' 뭐 이런 말만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수업은 100% 출석의 덕으로 겨우 B0를 받았는데, 마무리가 좀 인상적이었다.
기말 평가로 조를 짜서 마틴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말싸움을 하게 됐는데, 상대 팀에 있던 언니 두 명이 해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체류했던 국가 소개를 서로 주고받으며 수업을 이끌던 선배들이었는데, 그 언니들에게 말로 흠씬 두드려 맞은 이후로 교훈을 하나 얻었다. "다신 영어 회화 수업 같은 건 듣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