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마치 유치원의 연장과도 같은 쉬운 교과목들을 학습하며 공부보다는 아이들의 교우관계나 학교와 교실의 규칙을 지키는 것들로 1,2학년이 훅 지난다. 그러다 3학년이 되면 갑자기 영어가 등장하고 사회와 과학이 슬슬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수학도 점점 큰 수가 등장한다. 어려운 학습 단계에 가기 위한 일종의 워밍업이랄까. 특히 사회의 경우 우리 고장을 배우기 시작해서 도시와 촌락을 거쳐 전반적인 지리를 배우고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가 나온다. 그런데 자녀의 교과서를 보지 않은 엄마라면 모를까,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본 엄마라면 그냥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엄마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장 서점에 가서 역사 만화라도 사와서 읽히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들은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어려운지 이미 수능을 통해, 어쩌면 학력고사를 통해 겪어봤기 때문에 아이가 나중에 벼락치기 하느라 고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를 해주고 싶은 모정의 연장선쯤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아이가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로 이해하고, 시험 대비는 딱히 하지 않아도 옛날이야기 하듯 술술 풀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뜬 구름 잡는 꿈을 꾸었더랬다. 한 술 더 떠서 ‘수능 때 역사 공부는 안 해도 만점!’이라는 나도 못 한 것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어미의 어리석은 환상까지 품었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많이 달랐다.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사용했고, 신석기 시대에는 간석기를 사용했는데, 이 중 아는 어휘는 하나도 없다는 함정. 모든 어휘를 새로운 영단어 가르치듯 설명해가면서 맨 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어마무시한 현실. 사실 우리 밤아가 이렇게 자기 학년의 수준을 잘 따라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예중 입학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목표를 세우고 보니 뭐든 다 잘 해서 목표를 꼭 이루게 하고, 피나는 노력 후의 짜릿한 결실을 몸소 체험하게 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맨 땅에 헤딩을 시작했다. 밤아의 머리 속에 어휘를 하나 하나 넣어주고, 스토리를 쌓아갔다.
사회는 흐름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내 기억 속에 남은 역사 조각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학창시절 벼락치기의 결과, 시험 후 머리 속이 리셋되는 현실이랄까). 요즘 초등학생 교과서를 읽어보니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어려웠고, EBS 만점왕 교육방송도 요점 정리 위주여서 밤아에게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EBS의 「매일 쉬운 스토리 한국사」였다. 해당 강의를 모두 시청하고 만점왕과 교과서를 반복해서 공부했지만, 사실 임진왜란은 기억해도 전후 역사의 흐름, 영조와 정조의 스토리 연결, 대한제국 건국 스토리 등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연표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으로 공부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짤막한 연표를 중심으로 공부를 한 후, 동화책의 줄거리 이야기하듯 자신만의 역사 스토리를 구성해보았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계기와 결과도 교과서에 간단하게 흐름을 필기한 후 동화 들려주듯 이야기해주었다. 어려운 한국사가 즐거운 스토리텔링 시간이 되었다. 물론 엄마의 필기와 엄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스토리텔링이었지만, 밤아의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되는 순간 밤아 머리 속에 잊혀지지 않는 한국사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전라도에 정읍이라는 곳이 있는데, 정읍의 옛날 이름이 고부야. 이 고부라는 마을의 군수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마음대로 빼앗았어. 정해진 세금 말고 마음대로 세금을 막 걷어서 백성들이 너무 힘들었어. 이런 것을 ‘횡포’라고 해. 그때 전봉준이라는 사람이 동학 농민군들과 마음을 합쳐 맞서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걸 ‘봉기’라고 해. 고부 군수의 횡포에 맞서서 처음 봉기한 것을 1차 봉기라고 하는 거야. 그때 농민군이 굉장히 세차게 일어나서 조선에서도 그들을 막아내기 어려웠어. 그래서 중국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고......”
이런 이야기들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다 보니 옛날에 ‘아기돼지 삼형제’ 책 읽어주던 때처럼 밤아가 즐겁게 듣고, 때로는 ‘청일전쟁!’, ‘우금치 전투’라고 먼저 외치며 이야기를 거들었다. 밤아가 어려운 한국사를 하나하나 익혀가며 대답도 하고, 가끔은 앞서가기도 하니 나도 소설 읽는 것처럼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미리 교과서를 들춰보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예중 입학 프로젝트’였지만, 나에게도 잊혀진 지식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소중한 여정이었던 것 같다.
현대사는 더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의 등장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지나 민주화 선언까지, 외울 것도 많고 흐름도 어려웠다. 그래서 숫자의 순서대로 연표를 적어주었다.
3.15 부정선거(이승만 대통령)
4.19 혁명
5.16 군사정변(박정희 대통령, 유신헌법 직선제→간선제)
5.18 민주화 운동(전두환 대통령, 도시 폐쇄, 민주화 탄압)
6월 민주항쟁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언론의 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시행)
이렇게 정리하면 3, 4, 5, 6 숫자의 나열이고, 5월의 2개는 16 다음에 18, 이것도 숫자의 순서이니 가르치는 것도, 외우기에도 굉장히 수월했다. 사실 별 것 없는 그저 ‘암기 방법’에 불과하지만, 이런 식의 암기 공부를 처음 해보는 밤아에게는 쉽게 외울 수 있는 꿀팁이 되었고, 더 나아가 ‘나 이거 잘 한다’며 친구들에게 자랑도 할 만큼 자존감 향상에도 촉매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