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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람 Sep 25. 2024

여행으로 포장된 복습의 두 가지 얼굴

 밤아는 예술 중학교 입학을 목표로 실기와 학과시험에 전념했고, 틈틈이 언어 치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지만, 365일 내내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같은 날들만 반복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밤아에게도, 그리고 밤아의 목표 달성에 협조하기 위해 놀고 싶은 마음들을 꾹 참아온 다른 가족들에게도 한 번씩 힐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놀러만 가기에는 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여행 속 복습이다. 몸은 여행하며 놀고 있지만, 그 안에 과학과 사회 시간에 배운 것들이 숨어 있을 수 있도록 계획했다. 


 첫 번째 여행은 경주였다. 오래간만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와 떠나게 된 2박 3일의 경주 여행. 일부러 여행의 분위기를 내어보고자 KTX를 이용했다. 그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밤아가 좋아하는 핸드폰 게임도 기차 안에서 시간제한 없이(제한은 없지만 기차가 도착하면 게임을 끝내야 함) 할 수 있게 해줬다. 

 경주에 가서 맛집도 찾아다니고, 리조트 내에 있는 오락실과 코인노래방을 이용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숙소 안에서는 할머니께서 가져오신 윷놀이로 온 가족이 왁자지껄 신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에서부터 야심차게 알아보고 미리 예약한 경주시티투어를 하기 위해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고속버스 안에는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누군가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온 표정이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시티투어 가이드보다 아는 것이 많은 듯 재잘재잘 지식을 쏟아내느라 바빴다. 우리 밤아는 잘 듣고 있는 건지...(나는 재미있게 잘 들었다.)


 경주는 도시 자체로 살아 있는 신라시대 역사 창고이다. 한 블록 건너 하나씩 고무덤들이 있고, 땅만 파면 유물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저기 보이는 빌라 아래 땅 속에도 신라시대 그릇들 100개쯤은 묻혀 있을 거라고 한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이미 40세가 넘어 역사가 재미있어진 나에게는 참 인상 깊은 시티투어였다. 나름 엄마라고 철 좀 든 나는 초등학교 교과서와 교육방송을 통해 다시 배운 역사를 몸소 체험하며 값진 경험을 한 것 같아 뿌듯했지만, 그날 저녁 우리 밤아는 울었다.      


 “밤아야, 여행 어땠어?”

 “이거 여행 아니야~~~엉엉”     


 역시 애는 애다. 여행 간다고 엄청 기대했을 텐데, ‘이것은 여행인가 역사인가’ 헷갈리는 이 시간들이 억울하고 짜증날 법도 했다. 그 덩치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건 여행 아니라고, 여행 다시 가야 한다고 했다. 하긴, 너무나도 이해되는 것이 나도 옛날에 가족 휴가랍시고 아빠가 공주나 부여 데려가주시고, 박물관 가서 그 안에 적힌 설명들 모조리 다 읽고 그러면 그게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여행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빠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다니던 밤아에게 차마 ‘신라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에 있는 절인데, 아까 우리가 덥다고 잠시 쉬었던 곳이야. 절 이름이 뭐였지?’하고 복습 차원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밤에 가서 더욱 예쁘고 화려했던 첨성대를 바라보며, '이건 신라시대 어느 왕이 만든 거였지?'라는 쉬운 질문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야심차게 계획했던 경주 여행은 아이에게 불만만 가득 남긴 채 끝났다. 기억 속에는 더운 날씨와 윷놀이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여행은 여행, 공부는 공부. 쿨한 엄마가 되자, 놀러 가서 공부 물어보지 말자’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입시를 딱 10개월쯤 남겨둔 겨울 방학 때, 입시 전 마지막 여행이라는 명분으로 제주도를 예약했다. 이번에는 경주 여행 같은 '공부와 여행 그 어느 것도 아닌'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그러나 사람은 역시 망각의 동물, 함께 힐링하자고 여행가놓고 나는 그 시간마저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3박 4일이나 놀아서 어쩌나’ 하는 급급한 마음에 경주 때와 비슷한 실수를 또 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6학년 1학기 과학에 나오는 별자리를 직접 관찰하자며 ‘굳이’ 천문대 관람을 예약했다. 우리는 제주도의 평소 날씨에 비해 비교적 추웠던, 그래서 천문대 문 밖이 얼어서 문 여느라 힘들었던 밤에 북극성을 관측하며 전문가의 설명을 함께 들었다. 천문대 직원이 레이저로 쏴주는 북두칠성도 보고, 오리온자리도 직접 봤다. 추운 겨울 아주 캄캄한 밤, 오로지 레이저로 비추는 별에만 집중한 채 마이크로 들려오는 전문가의 설명은 밤아와 우리 가족 모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불빛 가득한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찬란한 별빛은 밤아와 우리 가족 모두를 고요하게 집중시켰다. 자칫 과학 공부처럼 느끼고 경주 여행과 같은 실수를 할 뻔했지만, 그 고요함과 캄캄함, 반짝이는 별들이 내려주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 그 이상으로 황홀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밤아의 눈물로 끝난 경주 여행에 비해 제주도에서의 별자리 관측은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다음에 제주도에 가면 또 별 보러 가자는 약속을 남겼다.      


 휴양지에 가서 뜨거운 햇빛과 바다에 몸을 맡겨보는 여행도 있고, 인류의 4대 문명지를 찾아다니며 옛 자취를 느껴보는 관광도 있고, 갖가지 여행의 모습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을 떠나는 본인의 마음과 함께 하는 이들과의 호흡이 아닐까 싶다. 경주 여행이 눈물로 끝났던 이유는 정말로 쉬고, 놀고 싶었던 밤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실수였을 것이고, 슬며시 끼워 넣은 천문대 관측은 제주도에서 놀고 즐기던 중 생각지도 못한 틈으로 들어온 환상적인 과학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앞으로의 우리 가족 여행은 어떤 모습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견학 같은 여행이든, 쉼 같은 여행이든 우리가 서로 웃으며 즐거워야 우리의 뇌도 더욱 건강하게 지식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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