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학습으로 과학 실험도 하고, 태블릿을 활용한 오답 정리와 전지 활용 공부도 했지만, 이런 공부법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국어를 6살 절반이 넘어서야 겨우 했는데, 파닉스라고 오죽했을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어 교과목이 생기면서 수업만 겨우 따라갈 정도로 파닉스를 익히긴 했다. 하지만 단어를 외우는 요령도 모르고, 발음도 당연히 이상했다. ㄱ받침 발음을 잘 못하는 밤아는 ‘books’를 ‘북스’가 아닌 ‘붓스’라고 했다. 모국어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영어라고 나타나지 않을 리 없었다. 역시나 모국어도, 영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남들은 영어 유치원에도 다니고,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에도 다녀서 초등학교 영어 정도는 ‘누워서 떡 먹을 정도’의 쉬운 일이었겠지만, 우리에게 영어는 넘지 못할 산 같았다. 이렇게 초등 영어를 어렵게 끌고 갔더니 중학교 영어라는 또 다른 높은 산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영어까지 집에서 완벽하게 커버가 된다면 너무 아름답겠지만, 엄마인 나는 소위 말하는 ‘영알못’으로 영어 울렁증 환자이다. 사실 나는 대학교 때 영어가 아닌 제2외국어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15년 넘게 쓰지 않으니 듣기는 가능할지 몰라도 말하기는 안 되더라. 이런 내가 밤아의 영어까지 손대는 건 그야말로 선을 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중학생이 된 밤아와 머리를 맞대고 힘들게 영어 교과서 본문을 외우고 단어를 외우고 연습문제도 풀었다. 드디어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멋진 점수 63점이 나왔다! 다행히 50점대는 아니어서 성적표에 ‘E’는 면했다. 밤아도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영어만 빼면 그래도 괜찮은 성적이 나왔는데, 영어 때문에 평균 점수가 많이 내려갔다고 한다. 그래, 이 상황을 본인이 잘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나 가정학습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실력도 안 될 것 같은 밤아를 받아줄 영어 학원은 더욱 없을 것 같았다. 아예 레벨 테스트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밤아의 영어 문제로 고민이 많던 중, 집 근처에 요즘 많이 생기고 있는 소위 ‘랩실’ 형태의, 태블릿과 헤드폰을 갖추고 1인 학습을 하는 영어 학원이 있길래 조심스럽게 등록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지금의 수준도 많이 낮지만, 아예 초등학교 4학년 수준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교육비 35만원을 지불했다. 밤아 인생의 첫 공부학원 교육비였다.
나는 학원이라는 곳에 아이를 처음 맡기고 ‘영어’ 과목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맛보았다. 외주를 맡겼으니 아이의 영어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잘못 가르쳐서 성적이 안 나왔다는 원망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믿고 맡긴 만큼 숙제 검사 외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도덕, 기술/가정, 미술 필기, 음악 필기까지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과목을 집중 케어하고 있었으니 학원에 맡긴 과목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어는 전문가에게 맡긴 만큼 아웃풋을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이런 ‘쿨한 맡김’ 속에 ‘양날의 검’이 존재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밤아는 매일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영어학원에 갔다. 싫다고는 했지만, 본인의 영어 성적과 현재 수준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기에, 싫어도 열심히 갔다. 적어도 내 눈에는 열심히 가는 것으로 가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학원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밤아 어머님. 밤아가 학원 숙제를 거의 안 해오거나, 건성건성 해 와요. 학원에서도 거의 자요. 하도 졸아서 서서 공부하는 책상으로 바꿔줬는데도 많이 졸아요. 신경 좀 써주세요.”
이 무슨 날벼락인가. 쿨하게 외주를 맡겼더니 하루의 피로를 학원에서 풀고 있었다. 전문가의 케어가 있었지만, 학원비보다는 숙박비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나는 다시 학원 과목 체크 모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밤아의 영어 숙제를 저도 알 수 있도록 알림장을 하나 보낼 테니 거기에 적어주세요.”
나는 선생님과 밤아의 학원 학습을 공유하며 함께 관리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배우는 단어 암기 체크, 오답 체크, 숙제까지 채점은 안 해도 제대로 했는지의 여부를 함께 확인하며 도왔다. 아, 학원 보냈다고 끝이 아니구나. 이마저도 엄마가 케어하지 않으면 학원비 값을 못하겠구나. 생명체를 온전히 길러내는 데 쉬운 길은 없다.
이렇게 외주를 맡긴 영어는 다음 시험에서 85점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요즘 ‘엄마표 가정학습’이다, ‘홈스쿨링’이다, 나름의 신조어까지 생기면서 집에서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행은 그저 유행일 뿐, 각자가 가진 특장점에 따라, 그리고 부모의 케어가 가능한 범위에 한해 이루어져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무조건 엄마가 끌어안고 있다고 가정학습이 완벽하게 커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학원에 보냈다고 절대 온전히 믿지 말자. 엄마가 매일매일 체크해주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이의 마음도 느슨해지고, 무엇보다 엄마의 관심은 학원 선생님께도 전달된다. 학원 학습에 관심 없는 엄마의 아이는 학원에서도 무조건 알게 되어 있다. 그만큼 건성건성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학원 학습에 대한 엄마의 관심이 느껴지는 아이는 학원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건 절대적인 진리이다. 맞벌이 부부라 바빠서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자책하거나, 또는 너무 믿고 마음 놓지 말자. 무조건 엄마가 학원 문제집을 매일 들여다보고 학원 선생님과 자주 소통한다면 학원비 이상의 것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