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소저체중아로 태어나서 청각장애 진단, 인공 와우 수술을 받고 끝없는 재활의 시작, 예술중학교 도전까지...좁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작디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며불며 병원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힘든 시간도 즐거웠던 시간도 그저 한 자락 추억만 남기고 지나갔다. 남들보다 6년 이상 늦었지만, 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 간격을 좁혀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코카콜라 페트병보다 작았던 밤아가 어느덧 13살이나 되어 이제는 엄마보다 키도 훨씬 크고 늠름한 남성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엄마 손에 이끌리어 살아 왔지만, 슬슬 엄마와 아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독립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일대일 언어 치료를 받으면서 누군가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삶을 살아왔던 밤아였다. 선생님의 발음을 따라하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어휘들을 따라 말하고, 예문을 만들어서 소통하며 그 예문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는 작업들의 연속. 사실 이런 것들이 밤아에게 언어는 가르쳐줄 수 있지만, 독립성이나 적극성 또는 진취적인 부분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말한 것이 틀린 말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자존감마저 낮아지는 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공 와우 수술을 해서 잘 듣고 말도 곧잘 하고는 있지만, 소음 환경이나 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는 듣기가 훨씬 어렵다고 한다. 마치 손님들과 시끄러운 커피머신들로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친구와 소통하기 위해 귀를 기울일 때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소모되고 피로가 느껴지는 것처럼, 밤아는 매 순간 ‘평범한 듣기’를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생기는 여러 상황과 오해들 속에서 헤쳐 나가려는 밤아의 노력도 건청인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밤아만의 어려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가며 밤아는 날마다 성장하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현재 중학교 1학년까지 밤아는 늘 엄마와 함께 공부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한 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 때 미리 다음 학기에 대한 예습을 마쳤었다. 중학생이 된 지금은 미술 실기 하느라 바빠서 수학만 한 단원 정도 앞서가고, 나머지 과목들은 복습으로 따라가고 있다. 나름 철저한 계획 하에 시험 기간 2주 전까지 시험 범위에 대한 전과목 개념 정리를 다 끝내고, 시험 2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암기와 반복학습에 들어가는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밤아가 시험 공부를 하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별도로 나에게 한 번 더 개념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교과서를 소리 내서 함께 읽으며 중요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표시하기도 하고, 필기한 부분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시험 준비를 한다.
집에서 공부하니 나름 ‘자기주도학습’ 같지만, 사실 지금까지는 ‘엄마주도학습’이었다. 계획도 내가 세우고, 물론 밤아의 상황을 보고 판단했지만 학습 방법도 내가 정했다. 스터디 플래너를 만들어놓고, 매일 해야 할 공부들을 적어두면 밤아가 체크를 하면서 공부했고, 그 이후엔 하루에 한두 과목씩 진도를 나갔다.
제3자가 보면 아이가 집에서 얌전히 공부하니 만점짜리 공부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공부 방법을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이 ‘어떻게 아이와 함께 공부가 가능하냐’고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이렇게 몇 년 간 지속해왔더니 큰 문제점이 발견됐다.
“엄마, 학교에서 사회 2단원 나갔는데, 빨리 2단원 가르쳐주세요.”
처음에는 이런 밤아의 말에 감동 받았다. ‘밤아가 먼저 공부를 하자고 하는구나. 공부에 욕심이 있구나. 기특하다, 대견하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밤아의 말 이면에는 엄마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공부가 어렵다, 또는 혼자 공부하기 힘들다는 밤아의 속마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 내일 과학 수행평가인데 서술 문제 좀 같이 풀어요.”
아이 공부에 깊게 관여하다 보니 수행평가까지 엄마 몫이 된 것 같다.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해와서 긍정적인 효과가 참 많았는데, 밤아는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나도 아이에게 공부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어쩌면 내가 더 아이의 공부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이제는 정말 엄마주도학습에서 자기주도학습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인공 와우 기기를 착용한 청각장애인이 대형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는 것은 너무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고, 과외 선생님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밤아의 현재 언어 수준에 맞게 설명을 해줄 선생님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밤아에게는 집에서 셀프로 공부하는 것이 최고이다. 밤아가 엄마에게 의지하려는 그 마음과 내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그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밤아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내 자리를 조금씩 비워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