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Z세대에 겨우 끼인, 나름 ‘꼰대마인드’를 갖고 있는 40대 엄마이다. 그래서 그런지 신조어도 안 좋아하고, 심한 줄임말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세종대왕님께서 애써 만드신 국어를 왜 굳이 파괴하냐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도 곧잘 즐겨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네 아이들은 2024년을 살아가는 팔팔한 십대. 교과서적으로 언어 치료를 받고 자란 밤아라고 바른말, 고운말만 쓸 리는 당연히 없었다.
“우와, 엄마 이거 개쩔어요.” (대단해요)
“야, 너 왜그살~”(왜 그렇게 사니)
생일 선물을 ‘생선’이라고 하고, 버스 카드 충전을 ‘버카충’이라고 하던 시대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해야 하나, ‘쩐다’는 표현도 낯선데, 접두사 ‘개’까지 붙여서 ‘개쩐다’고...심지어 할아버지께는 “할아버지, 개쩌세요.”라고 나름 높임말까지 쓴다. 처음엔 망설였다. 앞으로 욕도 배우고, 안 좋은 말들 많이 할 텐데, 벌써부터 이런 저급한(?) 말을 써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막는다고 막아질 리 없었다. 그리고 요즘 말을 안 쓰면 아이들 사이에서 ‘아싸(아웃사이더)’가 될 것이 뻔한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십대의 말을 같이 쓰기로 했다. (단, 욕은 집 밖에서 친구들끼리만 하는 것으로 약속했다.)
하루는 밤아가 그려온 작품을 보고
“밤아야. 진심 개쩔어. 최고야.”
하며 ‘엄지척’을 날려줬더니 ‘엄마가 보는 눈이 있다’며 굉장히 좋아한다.
“엄마, 제 친구가 비연을 하는데요...”
“밤아야, 비연이 뭐니?”
“비밀 연애에요. 엄마 그것도 몰라요?”
순간순간 아이들의 언어를 모른다고 무시도 받는다. 하지만 “밤아야, 전에 비연한다던 그 친구 아직도 잘 사귀고 있니?”하고 관심을 보이면 함박미소를 지으며 재잘재잘 이야기해주는 친구같은 아들이다.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신조어들을 쏟아내며 자기네 세상을 즐기는 10대 초반 아들을 바라보며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고 싶은 순간이 하루에 수도 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아이가 철 좀 들고 성장하면 스스로 깨닫고 고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설마 대학교 가서도 “교수님, 과제 너무 에바에요(오바를 변형한 느낌, 약간 지나치다는 의미).”라고 하겠는가. 아니면 처음 뵙는 어르신께 “그건 너무 억까(억지로 깎아내림) 아닌가요?”라고 하겠는가. 난 우리 아이들의 자정능력을 믿기에 최대한 10대의 시선으로 함께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단,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매너를 지키고 교양있게 행동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엄마와 아들이 매일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시간 이상씩 공부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다. ‘빌드 업’ 과정이 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20분, 30분씩 매일매일 공부하는 습관 형성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습관이 잡히는 과정에 따라, 그리고 아이가 성장하는 속도에 맞추어 공부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아이에게 사춘기가 왔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오는데, 이 시기에 엄마와 아이 사이의 라포 형성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아가 5학년 쯤 되었을 때, 차에 아이를 태워 언어 치료 센터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센터로 올라가려던 중 예상치 못한 밤아의 한 마디,
“엄마,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와야 해요↝?”
그저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밤아의 ‘살짝 뒤집힌 눈깔’을 보면 절대 평범한 질문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억양도 거센 것이 사투리도 아니고, 내가 익히 알던 그 말투이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 날 언어 치료 선생님께 밤아의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선생님도 요즘 조금 이상한 낌새를 느끼셨다고 하신다. 언어 치료는 일단 아이를 살살 달래가면서 하기로 했고, 문제는 집에서의 공부였다. 장시간 엄마와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
나름의 심사숙고를 거치고, 시행착오 뒤에 나타난 결과물은 ‘수다를 떠는 것과 같은 공부’였다. 똑같은 공부를 하지만 하기 싫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설명 중간중간에 ‘10대의 언어’를 섞어 쓴다. 옛날 학창 시절 때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다가 비속어를 사용하시면 학생들이 좋다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비속어까지는 아니지만, ‘10대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설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네 학창 시절, 선생님의 강의보다는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처럼, 교과 내용과 관련된 엄마 아빠의 연애사, 또는 우리 가족의 추억거리 등을 들려주며 아이와 소통하는 공부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회 공부하다가, 과학이나 국어 공부하다가 가끔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중심을 지키고 소통하면 아이와 싸울 틈이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물론 사랑하는 여학생이 생겨서 뒤늦은 사춘기가 올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부모에게 반항할 수도 있겠지만, 자식과 부모 사이에 대화가 끊이지 않고, 그 안에 믿음이 있다면 그 관계는 끈끈하게 지켜질 것이라 믿어본다.
밤아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학업과 미술 실기로 바빠지면서 언어 치료를 중단하게 되었다. 말을 잘 해서 종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정으로 셀프 중단한 것이다. 굉장히 뒤가 찝찝한(?) 중단이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할 때마다 말의 내용보다는 발음 오류가 내 귀에 더 들리곤 한다.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 지적해봤자 잔소리 외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엄마, 이 쎄기(쓰레기) 어디에 버려요?”
“아, 햄복해(행복해).”
“야, 잔난(장난) 치지마.”
“에이 에쓰(엑스) 플러스 비는...”
발음 오류로 말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잘못된 발음이 고착되는 것도 큰 문제이다. 하지만 언젠가 본인이 발음 교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면 스스로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작은 기대도 해본다.
언어로 인한 소통의 문제부터 사회적으로는 친구와의 인간관계, 그리고 와우 기기를 머리에 부착하지 않고 있어야 하는 미용실에서의 커트나 파마 문제,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는 것까지도 스스로 해쳐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굴복할 밤아와 내가 아니지. 우리는 중증장애가 있다고 세상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싸워왔고, 그 단단함 속에서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어 왔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도난청이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또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고, 또 누군가는 장애는 없더라도 그들만의 어려움을 해쳐나가며 세상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이만큼 이겨내며 살아 왔듯이,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우리에게 못 할 것이란 없다. 인공 달팽이관(와우) 수술을 한 너와, 달팽이보다 느렸던 너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줄게. 자유롭게 훨훨 날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