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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보 Jun 12. 2016

김기덕 감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

김기덕 감독의 영화 만드는 과정의 머릿속을 훔쳐보다

김기덕 감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란 영화로 현학적 상상력과 사유를 작곡하여 우주를 향해 연주하다. Maestro Kim, Bravo!


미륵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시공간을 초월하니, 

내 모습과 중생의 모습이 둘이 아닌 연기(緣起)와 연기 (演技)라네...


**이 곳의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3 천대 천 세계(三千大千世界) 구성의 최소 단위인 1 수미 세계 (一須彌世界)를 상징하는 수미산(須彌山) 욕계육천 (欲界六天)의 불교적 우주 공간에 사계를 통한 '동자승 - 청년 - 장년승 - 노승 - 뱀 - 동자승'의 윤회를 보여 준 것이라는 사유의 깊이는 김기덕 감독이 만들어 놓은 인생암에 겨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아직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수미산의 대웅전으로 들어가지 못 해 부처를 만나지 못 한 것이다. 사계를 통한 '동자승 - 청년 - 장년승 - 노승 - 뱀 - 동자승'의 윤회 과정은 심연 우주 (深淵宇宙) 공간과 어울리지 아니하는 윤회 과정이다. 그리하여, 본고는 김기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심연 우주와 어울리는 윤회 과정을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다시 한번 사색해 보고자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해체하고 내 어리석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현재의 페이지에서 사용한 내용들이 드러났다는 것도 밝히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단서를 푼 후 결정적 단서(이 부분은 다음 편으로 하기로 한다)를 발견해 시원섭섭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후에  <봄...>을 통한 한국 신화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상상력에 악연 실색(愕然失色)을 금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다. 밑줄이 그어 있는 부분의 내용은 타 사이트에서 가져와 조금의 변형을 한 것일 수 있음을 밝히고 링크를 글자 안에 걸어 주석을 대신한다는 것도 밝힌다. 

삼계 육도 그리고 윤회와 해탈

미래는 '미륵 반가 사유상'의 나라이다. 반 가부좌를 한 생각(사유)을 하는 미래의 부처의 나라여야만 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김형효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깊은 사유는 세상을 정사(正邪:바른 일과 사악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확연히 이원론적으로 나누기보다, 정(正)이 돌변하여 사(邪)로 기승을 피우게 하는 연기(緣起)의 구조를 진단하려 한다. 본디 정사(正邪)는 서로 다른 것으로 독립해서 각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작용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약과 독으로 갈라지게 하는 것은 연기의 구조가 그렇게 한 것이다. 좋은 구조는 독을 약으로, 나쁜 구조는 약을 독으로 변질시킨다. 구조의 진단은 흥분하여 들뜬 마음에서가 아니라, 고요히 진정된 사려 깊은 사유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나오는 삼계 육도(三界六道), 사생(四生),  윤회(輪廻), 그리고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와 다르지 않게 화면 안에 공존해 있음을 그들의 관계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봄

다시 한 번  아래 김기덕 감독이 꾸며 놓은 영화 속 장소를 보자. 불교의 3 천대 천 세계(三千大千世界) 구성의 최소 단위인 1 수미 세계 (一須彌世界)를 상징하는 수미산(須彌山) 위 욕계육천 (欲界六天)의 불교적 우주 공간 속 인생암의 양쪽 문에는 수미산(須彌山)의 삼계중 음욕과 탐욕이 강한 상태인 욕계는 사대천왕 (사왕천)이 지키고 있다.

인생문 바깥은 사천왕이 인생문 안 쪽은 관세음보살이 지키고 있다. 왜 관세음보살일까? 그리고 노승이 아닌 동자승이 이 문을 뚫고 나가야 하는가?

그리고 <인생암>의 문과 대웅전 안의 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불이문(不二門)은  한자를 그대로 놓고 해석해보면 '둘일 수 없다는 의미'로서 이승계와 부처의 세계는 둘일 수 없는 곳으로써 불이문을 지나게 되면 더 이상 이승계와 부처의 세계는 둘일 수 없고 오로지 부처의 세계가 존재하는 그런 곳임을 의미하게 됩니다. 불이문은 사찰의 문들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문들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것이 불이문이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이 불이문을 인생암 제일 입구에 놓았다. 왜? 그게 이치니까 그리고 그게 인생이라는 시스템에 적용되는 부처의 문리(文理)이기 때문이다. 이 발상은 아주 놀라운 발상이고 쉬운 발상이 아니다. 이미 해 놓았으니 쉽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좀 있겠으나... 


김기덕 감독은 그의 다른 영화도 그렇지만 그의 사고는 참 민감한 감수성을 갖춘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인생암을 만들어 부처가 말한 이론을 테스트하고 그 안에서 불교의 이론과 맡게 결론이 나오는 경우 불교에서 내놓은 결론을 꺼내놓는 방식이어서, 그의 영화 세트장은 과학자의 실험실이며 실험과정은 그의 영화의 전개 과정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고 사유에 잠기는 것이다. 우리도 영화를 보면서 실험 설계자가 되었으니 결론 추출과 그 전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서 짚어보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 실험을 이어가기에 필수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래 장면들은 김기덕 감독의 <봄..> 속 대웅전 안에 있는 방과 대웅전이 둘이 아니지만, 문의 길(道)을 통해서 안과 밖, 요사채와 법당이 구분된다. 잠시 김기덕 감독이라고 생각을 해 보자. "불교에서 불이문(不二門)이라 했다. 그럼 이 인생사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둘이 아니여야겠네? 한 번 실험해 볼까?"

실험의 재료는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물고기가 많은 연못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는 모습이 일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물고기의 속성상 낮이든 밤이든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이에 연유하여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자지 않고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뜻에서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나 목어, 목탁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연꽃은 인도에서는 힘과 생명의 창조를 상징하고, 민간에서는 다산을 상징한다 하여 "연생귀자 (連生貴子) - 연이어 귀한 자식을 낳으라'는 상징도 있다 하다. 그리하여, 동자승의 어머니로 나오는 여인의 바람과 불교적 바람을 동시에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 물고기는 불교에서 무아를 설명할 때 아래와 같다 한다.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은] 메마른 개울에서 [허덕이고] 있는 물고기와 같다. 이것을 보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행하여야 한다. -- 모든 생존에 대해 집착하는 일 없이... 


그럼, 왜 석가는 수미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인생암에 앉아 있는 것인가. 석가가 부처가 되기 이전 "유수"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뭄으로 땅이 갈라져 그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뿌려주며,  “내가 지금은 물고기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배를 부르게 하였으나 내생에 너희는 마땅히 법식(法食)을 베풀리라!”라고 발원하였단다. 그 후 그 나라 백성들은 병이 모두 나았으며, 유수는 나중에 부처님이 되셨으니 이 부처님이 곧 김기덕 감독의 인생암의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 이시다.


또한, 김기덕 감독의 인생암에 물고기가 많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금광 명경』에서는 유수 장자는 그 뒤에 손님들을 모아놓고 잔치하면서 술이 취하여 누었다. 그때에 땅이 갑자기 크게 진동하면서 십천 고기가 한꺼번에 죽어서 도리천에 태어났다. 천상에 태어나서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무슨 선근 인연으로 도리천에 태어났을까) 하면서 서로 이야기하였다.

'우리들이 지난날에 염부제에서 축생의 과보를 받아 물고기가 되었었는데 유수 장자가 우리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었고, 다시 우리를 위하여 매우 깊은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하여 주고, 아울러 보승 여래의 이름을 들려준 인연으로 우리들이 이 도리천에 태어나 천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당장 유수 장자 집으로 가서 은혜를 갚고 공양하여야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가라사데...

"선녀천이여, 그때의 유수 장자를 알고 싶은가. 그는 지금 나의 몸이고, 맏아들 수공은 지금의 라후라이고, 둘째 아들 수장은 지금의 아난이고, 십천 마리 고기는 지금의 십천의 천자이다. 그래서 내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수기를 준 것이다. 그때에 몸을 반쯤 나타냈던 나무귀신은 지금 너의 몸이니라." 인생 암에는 300년 된 나무가 있지 않은가... 


아래의 왼쪽 그림은 김기덕 감독의 <인생 암> 대웅전의 수미단이고 오른쪽 그림은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의 모습이다. 


왜 그리도 영화 중간중간에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물고기가 많은 연못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는지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단지 사람이 아닌 천상의 상징적인 부처님과 인간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단서이다. 왜? '공성은 불이'니까, 


아침 예불을 마친 노스님은 대웅전 앞 석등의 불을 하나 씩 차례로 끈다. 

열반은 범어로 니르바나(nirvana)이고 ‘불어서 끄는 것’, 혹은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 열반이다. 양초의 촛불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녹여버리듯 중생의 번뇌라는 촛불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태워 없애버릴 때까지 괴로움 속에서 발버둥 치게 만든다. 그 불을 불어 꺼버리면 안온하고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데 그러한 적정(寂定)의 상태가 바로 열반이다. 촛불을 끄는 것이 열반을 상징한다면, 촛불 하나를 끄고 다른 한 개의 촛불을 끄는 노스님의 연속적 행위는 불교의 생산관의 연기설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한다. 


그 후 장면은 노승과 동자가 같이 출타를 준비한다. 그런데, 배에 그려진 그림이 심상치 않다. 1차원적으로 말하면 노승, 동자, 갓난 아니가 모두 이 반야용선을 타고 인생암 대웅전의 부처를 본 것을 상상한 것이다. 


인생암의 강을 건너온 노승은 동자승에게, "뱀 조심해"라고 말한다. 이들은 수미산에 산다. 노승은 동자승의 거울이고 석가이다. 그들 자체가 억겁의 세월을 겪어 온 신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당신이 본 <봄...>은 1 사이클이 아니다라는 것도 암시한다.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삼계 육도의 우주관에서는 1 사이클이 아니다. 억겁의 사이클을 동시에 본 것이다. 이것의 증거는 추후에 설명하겠다. 


시간 가운데 최소는 60 찰나 가운데 1 찰나[念]이고, 최대는 겁(劫)이라 한다”고 정의한다. 또 《석가 씨보》(T50-84c8)에서는 “서역의 산스끄리뜨로는 깔빠[劫波]라 하고, 이곳에서는 큰 시간[大時]으로 의역한다. 이 1 대시의 그 햇수는 셀 수 없다”고 한다. 깔 빠는 시간 단위 상에 자리하고, 또 가장 긴 시간으로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과거(過去) · 현재(現在) · 미래(未來)의 3세(三世)의 시간을 한 화면에 넣은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시간뿐만이 아니라 공간도 그러하다. 이 것의 증거도 아래 설명하겠다. 예를 들면, 노인이 "뱀 조심해"하는 것은 동자승의 미래다, 동자 입장에서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동자는 현재에서 과거의 그인 뱀과 만난다. 이 뱀은 전생에 동자승에게 악업을 저질렀기에... 다시 말하자면, 동자승은 이미 석가모니이다. 그가 석가가 되기 전 뱀은 그를 유혹한 적이 있다. 그가 뱀을 만난 이유는 그가 전생에 이 실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유식유 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허공(虛空, 산스크리트어: आकाश ākāśa, 절대공간) 즉 공간을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즉 (法)으로 보아서 불생불멸의 무위법(無爲法)으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유식유 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모든 유위법을 (識)의 전변이라고 보며, 모든 무위법을 (識)의 전변과 법성(法性)에 의지하여 가설(假設) 한 것이라고 본다. [8]) 반면, 시간에 대해서는, 설일체 유부 · 유식유 가행파 · 법상종을 비롯한 불교 전반에서 공통되이, 일체 유위법의 생멸 변화의 상속상(相續相)에 근거하여 과거(過去) · 현재(現在) · 미래(未來)의 3세(三世)의 시간을 가설(假設) 한 것이라고 본다. 즉,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단순히 편의상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첫 번째 관문에서 통과한 동자승은 돌부처 옆에 섰다. 왜 첫 관문에서 통화했는가?

아래는 노승의 석가(석가세존: 석존)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할 때 있었던 일화이다. 노승, 즉 동자승도 과거에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을 피했던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석존이 성도한 후의 일화에서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빠삐만(波旬)이라고 불리는 악마는 석존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때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상왕(象王)으로, 때로는 큰 뱀(大蛇)의 왕으로 변하여 큰 바위를 부수고 큰 굉음을 울리며 석가에게 접근했지만 그럴 때마다 석가는 이를 피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생 암을 미륵과 같이 보고(자연 그대로를 관하고) 무사히 인생암으로 되돌아 간다. 

노스님은 인생암에서 출타하기 위해 반야용선에 올라타고 동자승 역시 '약초를 캐기 위해" 노승과 동승한다. 불교에서 "약초"는 무엇인가? 각자의 근기를 말한다. 몸속에 배어있는 유전적 정보나 성향 그리고 생활을 통해 발현된 어떤 행동 양상의 패턴이라고 볼 수도겠다. 하지만 동자승의 근기는 그리 크지 않다. 그리하여 동자승은 비슷하나 비슷하지 아니한  풀이나  풀의 성분인 독과 약을 구분 못 하는 것이다.


아래는 법화경 제5 약초 유품(藥草喩品)과 한 웹사이트의 설명을 발췌한 것이다.

여래가 출현하심을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에 비유하시고, 여래께서 한 소리로 말씀하심을 구름에서 비가 내려 사방천지를 적시는 것에 비유하셨다. 각기 다른 종류, 근기와 성질을 가진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믿는 정도가 다름을 나무, 풀, 숲, 약초, 뿌리, 줄기, 가지 잎, 등이 같은 땅, 같은 비에서 영양분을 취함이 각기 달라 각기 다르게 자라는 것에 비유하였으며, 똑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지만 그 결과가 각기 다른 것을 나무, 풀, 약초 등이 각기 다른 꽃과 열매를 맺는 것에 비유하셨다.
나무, 풀, 약초 등이 그 종류와 성질에 따라 땅과 물에서 섭취하는 영양분이 다르듯, 중생도 근기와 성질에 따라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과정이 다르니 부처님께서는 각자의 근기와 성질을 통찰하시는 능력이 있으시어 이를 이미 아시고 그들 각자에게 알맞은 법을 설하여 그들이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게 함으로써 각자의 근기와 성질에 맞는 수도(修道)의 결과를 얻게 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다.
여러 자녀를 둔 부모가 자녀에게 똑같이 신경 써가며 부양하고 교육시키지만 자녀들 각자에게는 그들이 갖고 있는 근기와 성질이 있어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각기 다르다. 그러하니 부모는 자녀 각자의 근기와 성질을 달관(達觀)하여서 그들의 근기와 성질에 맞게 지도하고 인도하는 법으로 그들을 다스림으로써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부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기를 당사자는 자기의 근기와 성질을 알지 못하며, 그 근기와 성질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고, 그 근기와 성질을 여의는 법도 알지 못하며, 그 근기와 성질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얻어지는 열반의 경지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 알고 계심으로서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으니 여래의 설법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부모가 자녀들의 근기와 성질을 잘 알아야 하며, 지도자가 지도 받을 대중들의 근기와 성질, 스님이 신도님들의 근기와 성질을 잘 알아 그에 맞게 함으로써 훌륭한 부모, 지도자, 스님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부처님께서 작은 약초(藥草)에 비유하신 중생은 땅의 세계 중생 중 부처님의 법을 듣고 능력대로 이해하고 받아 익혀 자비한 일 늘 행하며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함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중생이다. 그리고 하늘 세계 중생들 전륜성왕, 제석천왕, 범천왕, 그리고 여러 하늘 세계 왕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위에 만족하여 수행하지 아니하고 중생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고통받는 중생으로 태어나게 됨으로 작은 약초에 속한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하느님들은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들로 이해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들은 작은 약초에 비유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모든 번뇌를 여읜 사람은 자기를 극복, 혹은 정복한 사람이다. 자기를 정복한 사람을 하느님들보다 더 상위 계급에 놓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하느님이 되기보다 더 어려운 수행이 자기의 온갖 번뇌를 여의는 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품 약초에는 성불(成佛)을 위해 선정을 닦고 정진하면서도 신통으로 법륜을 굴려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는 보살이다
.


사바세계는 고통(苦痛)의 세계라,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는 중생들은, 약효가 있는 식물에 관심이 있지, 약효가 없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누가 암에 특효가 있는 식물을 모아 책을 만들면 제법 팔리겠지만, 약효가 없는 식물을 모아 책을 만들면 한 권도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병을 고치는 신통력이 있다” 하면 귀가 솔깃하고, “누가 병을 고치는 신통력이 없다” 폭로하면 들은 체도 안 한다. 그러므로 굴(屈) 하지 말고 줄기차게 “참나가 있다”라고 외쳐라. 사람들은, “참나가 있다”는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이지, “참나가 없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낙원, 이상향, 천국, 극락정토 가는 법, 벼락부자 되는 법, 돈벼락 맞는 법, 복권 당첨번호 찍는 법, 머리털 나는 법, 젊음을 찾는 법, 영원히 사는 법(長生不死), 부자나 권력자로 환생하는 법,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변강쇠나 옥녀가 되는 법, 수학의 왕도, 공부 안 하고 공부 잘하는 법, 놀고먹는 법, 떼돈 버는 법, 일확천금하는 법에 혹하지, “그런 법은 없다”고 하면 옆에 오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속기 위해서는 거금을 내지만,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사마천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불교 색깔을 입히고 내세워, 돈에 대한 욕망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무명 중생들을 혹세무민 하는 자들이 있다. 정신 나간 불교방송은 이런 자들을 출연시킨다. 시청률 상승은 광고수익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중생들의 무명 제거라는 불교방송 설립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삶은 있다(有)이고 죽음은 없다(無)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삶을 싫어하고 죽음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불법(佛法)은 ‘무상 심심 미 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고 ‘백천만겁 난조 우’(百千萬劫難遭遇)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없이 높고 깊고 미묘한 진리이며, 수백억 광년이 지나가도 만나기 힘든 가르침이다. 지구 상에 불법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진실로 기적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시린 진실을 직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자유가 어디 쉽게 얻어지랴!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 어떤 것도 아(我)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아이다”(일체 비아 시고 무아 一切非我 是故無我).

도교, 힌두교 수행자들은 "참나(진아 眞我)가 작기는 겨자씨만 하고, 크기는 삼천대천세계만 하다"고 주장하지만, 입자가속기로 소립자를 두들겨 까 보아도, 허블망원경으로 은하계를 샅샅이 뒤져도, 그 어디에도 참나는 없다. 이 우주에는 끝없는 명멸(明滅)하는 상호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아(無我)이다.

화폐이건 무아론이건 끝없는 위조의 대상이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의 발달에 따라, 위조는 속계(俗界)의 일이건 성계(聖界)의 일이건 모두 코너로 몰리고 있다. 


자연에서 깨우치지 못 한 동자승은 노스님, 강아지, 그리고 나비에게 배움의 기회를 총 3번 봄에 받는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에게는 육안(肉眼)이 있다. 그리고 심안 (心眼)이 있다. 물론 내재된 불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불안(佛眼)도 있다. 우리는 세 가지 안(眼) 중에 주로 무엇을 사용하나? 속담에 이르기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어찌 강아지는 사람의 습성까지 알아채는데, 같은 사람끼리 어떻게 사람을 못 알아볼까? 사람은 자기가 아는 범위와 경험한 사례를 기반으로 육안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이르는 안근(眼根)이라고 하는 육안(肉眼)은 눈앞에 펼치진 전경(색경色境)을 볼뿐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무안(無眼)과 무색(無色)을 설하지 않았겠는가? 안근(眼根)으로는 말 그대로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처인 아이는 지혜의 상징인 해태라는 상징적 동물에 발을 올리며 낮잠을 잔다. 

한 나라 때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 묘사된 해태를 보면 '동북지방 깊은 수풀이나 산 속에 사는 짐승으로 신선이 먹는다는 먹구슬 나무 열매만 먹으며, 그 주위에는 어떤 미물도 가까이하지 못한다고 하여 신비한 영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해태는 힘이 세고 심성이 정의로워 싸울 때에도 사악한 자를 혼내 주어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판단하는 동물인 것이다. 또 이물지에 보면, “해태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으로, 뿔이 한 개 있으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사악한 사람을 물고, 사람이 논쟁하는 것을 들으면 부정한 쪽을 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의를 지키는 짐승으로 믿어지는 해태가 부처님 도량에 나타는 것은 불법(佛法)을 따르며, 불법(佛法)을 비방하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동자승은 다시 개울가로 가서 나비를 만난다. 나비는 봄의 시작을 알린다. 불가(佛家)에서도 나비 문양을 지혜와 길상의 상징으로 여겨 사용했는데 불교의 연기설을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비의 알(卵)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 불변하는 것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이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나비 알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다. 


윤회와 업 사상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는다'라고 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이다. 나비의 비유에서처럼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밀린다 왕문경"에서 나가세나 비구는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자가 지은 업(業)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의 무아(無我)의 이론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에 태어나서 한 생을 살다가 죽어 가는 현상계의 인간 존재까지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하고 고정 불변하는 실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나(我)"란 비실 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짜 나(假我)라고 하고 있고, 이 '가짜 나(假我)'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자승이 자연에서 놓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는 업을 쌓는다. 그런데 왜 물고기와 뱀만 죽고 개구리만 살아있는가? 이 의문은 아주 중요한 힌트를 준다. 



기본적으로 '공성()이 불이(不二)'하고 시공간을 탈피하면 축생도(畜生道)  난생(卵生)으로 태어난 생물체인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에게는 돌을 메다는 장난을 치며 이는 곧 물고기와 뱀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동자승이 바로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난생(卵生) 곧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공식을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장 인물들의 관계도 작성자: 의식주와 의식의주인

왜 물고기, 개구리, 뱀이 '공성()이 불이(不二)' 인가? 아래는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나기 전 소년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유리왕이 석가족을 죽인 고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카필라성에 한 어촌이 있었다. 그 어촌 안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어느 때 가뭄으로 연못물이 말라 연못 속의 고기들은 모두 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잡아 먹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꼬리가 아주 큰 고기 또한 잡혀서 삶아 죽었다. 마침 그때 과거부터 고기를 먹지 않던 어떤 소년이 이 큰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희롱했다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파사익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렬히 믿어 석가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유리라고 지었다. 유리가 어렸을 때, 석가족이 살고 있는 카필라성에서 공부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에 올라가 놀다가 사람들의 꾸지람을 들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끌려 내려졌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후에 국왕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카필라성을 공격하여 성 안의 주민을 모두 살해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3일간 두통이 있으셨다.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께 법을 설하여 저들을 구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부처님은 결정된 업은 돌이키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목건련 존자는 신통력으로 부처님 친족 오백 인을 바루에 넣어 공중에 있게 하여 그들을 구출코자 했다. 그러나 바루를 내려놓으니 이미 모두 피로 변해 있었다. 

모든 제자들이 그 이유를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촌민들이 고기를 먹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그때의 큰 물고기는 현재의 유리왕의 전신이며, 그가 거느린 군대는 그 날 연못 속의 많은 물고기였고, 지금 피살된 카필라의 주민들은 그때 고기를 먹던 사람들이었다. 부처님은 그때의 소년으로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린 원인으로 3일간 두통의 과보를 받았다. 결정된 업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석가족 5백 사람은 비록 목련존자에게 구출되었으나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유리왕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원한과 원한이 서로 갚는 것은 기한이 없고, 원인과 결과는 진실로 있는 것이니 가히 두려워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출한  공식을 보완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장 인물들의 관계도 작성자: 의식주와 의식의주인


다시 질문한다.  왜 뱀의 '공성()이 불이(不二)' 인가? 그리고 왜 개구리는 살았는가? 부처가 깨닫는 과정에서 뱀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개구리를 먹지 않았다. 


옛날에 아이가 왕이 아이가 왕국을 다스렸다. 두 왕은 계속 서로 싸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아이가 왕이 이기고, 어떤 때는 마가 다왕이 이겼다. 그런데 어떤 전투에서 마가 다왕이 앙가왕에게 패해서 말에 올라타고는 앙가 왕의 군사들에게 쫓기며 전장에서 달아났다. 왕국은 갠지스 강이 아니고 캄파 강을 사이에 두고 나눠져 있었다. 이 물속에는 캄 파야라는 뱀 왕이 다스리는 뱀 왕국이 있었어요 마가 다왕이 이 강에 이르렀을 때 강이 홍수가 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적의 손에 죽느니 이 강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말과 함께 급류로 뛰어들었다.

강바닥에는 뱀 왕이 보석으로 정자를 만들어 놨다. 그리고는 왕좌에 앉아 신하들과 차를 마시고 있다. 마가다 왕은 급류에 휩쓸려 밑으로 빨려 들어가 정자에 떨어졌다. 뱀 왕은 마가다 왕의 제왕다운 풍모에 감탄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왕좌에서 일어난 뱀 왕은 마가다 왕을 의자에 앉히고는 강에 빠진 연유를 물었다. 마가다 왕은 전쟁에 패한 슬픈 사연을 말했다.

그러자 뱀 왕은 『위대한 왕이여 두려워 마세요! 내가 두 왕국을 다 갖게 해주겠소』 일주일 동안 마가다 왕은 뱀 왕국에 있으면서 대접을 잘 받았다. 7일째 되는 날 뱀 왕과 그는 강을 떠나 인간 세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뱀 왕의 신통력으로 마가 다왕은 전장에서 앙가 왕을 찾아내 죽였다. 그래서 그는 두 왕국의 주인이 됐고 그 날부터 뱀 왕과 그는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었다.

해마다 마가 다왕은 캄파 강 둑에 보석 정자를 지어놓고 뱀 왕에게 아낌없이 진상을 올렸다. 신하들이 참석한 가운데 뱀 왕은 공물을 받기 위해 강에서 나왔고 마가다의 백성은 환호를 했다. 때가 돼서 뱀 왕이 죽자,새 왕이 뱀 왕국을 다스리게 됐다. 이 왕은 검소하고 덕스러워 뱀 궁전의 사치와 허영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곧 뱀들이 영위하는 낭비와 무질서한 생활에 지쳐 이렇게 생각했다. 『이 궁전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나가 신성한 서약을 이루어야겠다』

이전 뱀이 아니고 이 두 번째 뱀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라고 돼 있다.

그래서 단식 일에 그는 강에서 나와 변경 마을에서 멀지 않은 큰길 옆에 있는 개미 언덕 위에 누웠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누군가 내 껍질을 갖고 싶어 하면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누군가 내가 춤추는 뱀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큰길 아래로 지나가며 뱀 왕에게 예배하고 그에게 향료와 향수를 받쳤다.

변경 마을의 거주자들은 이 뱀 왕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누운 개미 언덕에 멋진 정자를 지었다.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는 한 궁전에서 탈출해 다른 궁전으로 간 셈이다. 반달이 뜨는 14일과 15일에는 뱀 왕이 맹세를 지켜 단식을 했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첫째 날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뱀 왕비 수마나가 남편인 왕에게 말했다. 『오,왕이여! 단식 날,당신은 맹세를 지키려고 인간세상에 갑니다 위의 세상은 위험이 가득한데 당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어떻게 알죠?』 뱀 왕은 왕비를 행운의 연못에 데려가 말했다. 『누가 날 해치면 이 연못의 물이 혼탁해질 거요 도둑이 날 채가면 물은 사라질 거요 마법사 뱀이 날 잡으면 물은 핏빛으로 변할 거요』 왕비에게 세 가지 징조를 알려준 후 뱀 왕은 캄파 강 아래의 궁전을 떠나서 개미 언덕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은 똘똘 감은 순금 같았죠 거기에 눕자 비늘은 태양 빛에 반짝거렸다.

이제 베나레스의 젊은 브라만은 유명한 스승과 공부하려고 타실 라에 갔다. 그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마법을 배웠다. 집에 오는 길에 국경마을을 지나다가 개미 언덕에 누워있는 뱀 왕을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뱀을 잡아서 춤추는 걸 가르쳐서 읍내와 마을에서 구경시키면 돈을 많이 벌겠지』

그래서 마법 약초를 구한 다음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뱀 왕에게 다가갔다. 뱀은 마법의 영향을 느끼고 고개를 꺼내 뱀 마술사 브라만을 보고 생각했다. 『독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맹세를 깨는 거야』 그래서 머리를 넣고 눈을 감았다. 브라만은 뱀 왕에게 다가와서 꼬리를 잡고 갈대 바구니에 그를 넣었다. 그다음 바구니를 국경 마을까지 가져가 뱀 왕을 굉장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추게 했다.

사람들은 뱀의 묘기로 즐거워지자 브라만에게 은화 천 개와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주었다. 브라만은 은화 천 개를 벌면 뱀 왕을 놓아주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돈이 쉽게 벌리자 탐욕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뱀을 계속 잡아 두고 장차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졌다.

이제 그는 뱀을 왕과 신하들 관리들에게 데려가 더 많은 돈을 벌 생각을 했다. 브라만은 모든 재산을 실을 짐수레와 그가 앉을 마차를 가져왔다. 많은 군중들이 함께 갔고 그는 뱀에게 춤을 추게 하고 읍내와 마을을 지나갔다. 그는 마침내 베나레스의 왕 우 가세나 앞에 뱀을 보이기로 했다. 그는 뱀을 왕에게 보여준 다음에 풀어주려고 마음먹었다.

브라만은 개구리를 잡아서 뱀 왕이 먹도록 주었지만 뱀 왕은 먹기를 거부했어요. 그다음 브라만은 뱀을 꿀과 튀긴 옥수수로 유혹했지만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뭐든 먹으면 죽을 때까지 여기에 있게 될 거야』

그래서 브라만이 베나레스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되자 그는 뱀 왕을 마을과 도시 입구 밖에서 춤추게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왕은 춤추는 멋진 뱀 이야기를 듣자 공연을 보려고 브라만을 데려 오도록 명령했다. 고수를 도시 곳곳에 보내서 다음 날 궁전 안마당에서 뱀이 춤을 출 테니 마을 사람들 모두 공연에 참석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궁전 안마당은 훌륭히 꾸며졌고 브라만은 왕 앞에 불려 갔다. 그는 뱀 왕을 보석 바구니에 담아 가서 땅에 다채로운 천을 깐 다음 바구니를 그 위에 놓았다. 왕은 궁전에서 나와,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옥좌 위에 앉았다. 브라만은 뱀 왕을 바구니에서 꺼내어 춤추게 했다. 뱀의 동작은 너무나 우아해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수천 개의 손수건이 공중에 흔들렸고 보석이 뱀 왕 주변에 쏟아졌다. 

이제 뱀 왕이 붙잡힌 지 꼭 한 달이 되었고 그동안,그는 전혀 먹질 않았다. 캄파 강 아래의 궁전에서 뱀 왕비 수마나는 걱정이 되고 불안해졌다. 『남편이 집에 안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래서 그녀는 행운의 연못에 갔고 물이 피처럼 붉은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뱀 마법사에게 붙잡힌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성을 나와 인간 세상으로 올라 가 개미 언덕에 갔다. 그가 잡혀서 처참하게 울었던 곳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베나레스로 잡혀간 것을 알고 국경 마을로 향했다.


김기덕 감독의 <봄...>에서 노승과 동자가 불이(不二)이면서 왜 동자승이 노승의 한계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 그가 사용한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은  정사(正邪:바른 일과 사악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원론적 성격이 아닌 정(正)이 돌변하여 사(邪)로 기승을 피우게 하는 연기(緣起)의 구조를 그리고 사가 변하여 정이 되는 연기(緣起) 과정의 다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필자는 개구리를 통해 김기덕 감독이 사용한 설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추후에 설명하도록 한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붓다께서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 교화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우루벨라의 신통’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결발의 행자 우루벨라 깟사빠가 머물고 있던 수행처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셨다. 

“깟사빠여,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오늘 하룻밤을 그대의 화옥(火屋)에서 지내고자 한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흉악하고 신통한 용왕이 살고 있는데, 그 용은 맹렬한 독을 뿜는 독사여서 당신을 해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깟사빠에게 세 번 반복하여 간청하였다. 그러자 깟사빠는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였다. 여기서 화옥(火屋)이란 불을 섬기는 성화당(聖火堂)을 말하는데, 이곳에 나가(Nāga)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팔리어 나가(Nāga)는 용(龍), 코끼리(象), 뱀(蛇)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마 거대한 독을 가진 뱀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세존께서는 화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로 앉으신 뒤 몸을 세우고 선정(禪定)에 드셨다. 큰 독을 가진 뱀은 세존께서 들어와 계시는 것을 보고는 괴롭고 쓰라린 심정으로 독의 연기를 내뿜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다. 

‘나는 이제 이 독을 가진 뱀의 피부와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켜야겠다.’ 

세존께서는 신통력으로 연기를 뿜어 내셨다. 그러자 독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불을 뿜었다. 세존 역시 화계 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을 뿜으셨다. 

세존과 독뱀,  그 둘이 불꽃에 휩싸이자 성화당 안은 마치 거세게 불타는 것과 같았다. 

수행자들은 성화당 주위에 모여 말했다. 

“아, 그 위대한 사문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이제 독뱀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세존께서는 피부, 가죽, 살, 힘줄, 뼈, 골수 등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켰고, 밤이 지나자 그 독뱀을 발우에 담아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셨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대의 독뱀이다. 이 독뱀의 불은 나의 불로 소멸되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이 흉악하고 신통한 독뱀이 맹렬한 독으로 불을 뿜는데도, 그 불을 자신의 불로써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영화 <봄..>이란 영화는 이 영화의 구조 자체가 연기(緣起) 과정으로 구성되어있기에, 봄을 이해하지 못 하면,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있다. 하지만 봄을 이해하면, 그다음은 봄의 과정을 순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추후 영화의 자궁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봄이 끝나기 전에 노승이 동자승의 등에 돌을 매달은 후 석가상에 묻은 먼지를 붓으로 터는 장면이 있다.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들이 둘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 동자승의 고행이 먼지터는 일임을 암시한다. 


                          여름



다시 복습하면, 김기덕 감독의 <봄...>에서 둘이 아닌 알에서 탄생한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은 불이(不二)이면서 왜 그들은 연기(緣起)와 연기 (演技)를 동시에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봄에 죽은 난생은 뱀과 물고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현재는 개구리이다. 그러면서, 장년승과 소녀 역시 동시에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이고 부처의 전생, 노승의 과거, 그리고 갓난아이(우리)의 미래를 그들 안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아래의 표를 보면, 동자승은 봄에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을 살생한다. 그중에 살아남은 난생계의 축생은 개구리뿐이며, 이는 등장인물들이 개구리 임을 시사한다. 공성이 불이 이고 수미산의 불이 세계이기에.. 여름에 소년 승과 소녀는 서클 랜즈를 끼고 나오고 그것은 물고기의 견성을, 개구리의 몸, 그리고 뱀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을의 인물은  물고기의 중생적인 행동, 개구리의 몸과 뱀의 눈을 갖고 있다. 물고기와 뱀의 인연이 마친 후, 겨울은 개구리로써 존재할 뿐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인생암의 불이문(不二門) 안에 들어와있다.  

김기덕 감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계절 벌 인물의 변화 작성자: 의식주와 의식의주인

감독의 연출력의 절정은 여름의 두 주인공이 서클렌즈를 끼고 나온 것에 있다. 그리고 이 두 주인공들은 말한다. 우리가 현재 물고기이자, 뱀이자, 개구리이자, 부처이자, 당신의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간과 해선 안 될  점은 이 뱀이 정사(正邪:바른 일과 사악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 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디 정사(正邪)는 서로 다른 것으로 독립해서 각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작용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살인을 어떻게 해석을 하냐 혹은 이들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신으로 보는가, 사람으로 보는가, 난생으로 보는가에 따라 해석이 나뉜다. 즉, 보는 이의 근기에 따라, 동시에 볼 수 도 있고, 한 면만 볼 수 있다.



또한 물고기인 소녀도 부처와 둘이 아니다. 그녀가 인생 암 대웅전 안에서 두통에 괴로워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108배를 한다. 위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첨부하며 아래와 같다.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파사익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렬히 믿어 석가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유리라고 지었다. 유리가 어렸을 때, 석가족이 살고 있는 카필라성에서 공부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에 올라가 놀다가 사람들의 꾸지람을 들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끌려 내려졌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후에 국왕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카필라성을 공격하여 성 안의 주민을 모두 살해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3일간 두통이 있으셨다. 


그들이 인생 암 대웅전에 도착하기 전 화면 중앙에 닭이 모이를 먹고 있다. 실상 닭과 고양이는 한 쌍이나 그들의 과거를 원인으로 하여 닭은 여름 그리고 고양이는 가을에 등장한다. 그 둘의 숨겨진 이야기는 이와 같다. 즉, 닭도 과거에 석가임을 나타내는 설화이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숲 속에서 닭으로 태어나 많은 닭들과 친구가 되어 살았다. 그 숲 가까이에 암고양이가 한 마리 살았는데, 숲 속의 닭을 모두 꾀어서 잡아먹고 말았다. 그러나 부처님만은 그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고양이는 ‘이 닭은 꽤 똑똑하지만, 내 교묘한 계략은 알 리가 없어. 당신의 아내가 되겠어요 하고 달콤한 말로 꾀어서 내 것이 되었을 때에 잡아먹을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고는 닭이 사는 나무 밑으로 가서 말했다.
“아름다운 날개에 가느다랗게 늘어뜨린 벼슬이 있는 새여! 나무 위에서 내려오세요.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되기만을 바리는 몸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저 고양이가 내 친구들을 다 잡먹었지. 그리고 지금 나를 먹으려고 하는구나. 쫓아보내야.’ 하면서 말했다. “ 아름답고 멋있는 그대여, 그대는 네 다리, 나는 두 다리. 새와 짐승이 결혼하는 일은 없소. 남편은 다른데서 구하시오.”

그러자 암고양이는 ‘내가 너무 얕봤는걸, 무언가 다른 궁리를 해서 닭을 꼬여서 잡아먹어야지’하고 내심으로 생각하였다.

“당신을 위해서 저는 새댁이 되겠어요. 달콤한 말을 속삭이겠어요. 깨끗한 마음으로 저를 맞아 주세요. 그리고 뜻대로 하세요.”
부처님은 이번에는 ‘고양이에게 욕을 퍼부어서 돌려보내야지.’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그대는 우리 친구들의 피를 마시고 도둑질하여 속였다. 그대는 깨끗한 마음으로 나를 남편 삼기 바라는 것이 아니오."
고양이는 이 말에 마침내 쫓겨간 뒤로 두 번 다시 닭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석가불 가라사데..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그때의 그 닭의 왕은 바로 나였다.』하였다. 


그러므로, 삼천대천 수미산의 정신적 세계에서 닭도 가축 닭이 아닌 곧 부처와 다르지 아니하다. 사람의 모습을 한 인물들이 봄의 난생 동물인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뱀 임과 동시에 인간과 신이듯이....


또한, 경전이나 불교사에서 보이는 닭의 이미지는 깨달음이다. 〈본생담〉 ‘수탁의 전생이야기’ 편에 따르면 부처님이 전생에 수탁으로 태어난 닭을 잡아먹은 매를 훈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증일아함경〉에는 “미래 세계에 미륵이라는 이름의 부처가 출현하는데 그 나라는 계두 왕(닭의 왕)이 다스리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 뱀은 현세와 내세를 버리는 수도를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업을 받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김기덕 감독의 뱀의 정사 장면은  정사(正邪:바른 일과 사악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정신()을 수양()하는 곳; 情事: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關) 한 일;: 바른 일과 간사(奸邪) 한 일 )이기도 하다. 보는 이의 근기에 달린 것이다. 그리하여 중년승은 부처 옆에 서서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를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을 물고기로 보았다면, 그 둘의 정사 장면을 당신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좋다? 나쁘다? 그들이 인간이라 할 때는? 소녀의 고질병인 두통을 낫게 하였다면? 알고 보니 전생의 선업 혹은 악업 때문에 그랬다면? 인간이라 할지라도, 섹스 장면이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두 신이 만난 것이라면? 


청년 승과 소녀는 그들이 탄생한 곳에서 다시 재회한다. '장 노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에 나타난 당시의 여성들의 생활상은 “육신을 굽게 하는 세 가지-절구통, 절굿공이, 그리고 포악한 남편 ”이라는 말이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끝없는 육체노동과 가난, 그리고 편견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게송의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게송의 작자 가운데는 한 남자를 남편으로 했던 모녀도 있었고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그 빚을 갚기 위해 첩이 되었던 여성도 있고 기생도 있다. 그러나 석존의 가르침은 이들 여성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김기덕 감독은 소년승에게 약을 절구통에 넣어 절굿공이로 빻아 소녀에게 약물을 바치도록 하는 것 그 자체가 인과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소년 소녀가 전생에 부부였다면, 그리고 남편인 소년승이 소녀에게 육체노동을 시켜서 현재 우리가 그들의 역할 바꿈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아, 이것은 자연이 꼭 3번의 기회를 준다는 말인가. 봄에도 3번 그리고 여름에도 3번의 기회가 소년에게는 주어진다. 단견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들의 결합은 여름에는 좋다. 소녀의 병을 낫게 하고, 소년도 그녀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니... 하지만, 가을은 그가 훈련의 시간을 갖고, 겨울에는 이 인과법에 의하여 새로운 자신을 맞이하게 되니... 옳고 그름의 정의는 가히 연기 작용에 따라 약이 독으로 독이 약으로 변하는구나.

소년승과 소녀는 대웅전에서 한 번, 주산지 연 못에서 한 번, 그리고 인생 암 밖에서 한 번, 즉 마치 욕계, 색계, 무색계를 넘나들 듯한다. 그들 안에 만물이 있고, 그들 자신들의 현상학적 몸은 인간의 몸이나, 서클 랜즈로 물고기의 눈을 하고, 뱀에게 보았던 행동을 보여준다. 이런 점들이 그들이 교미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정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 영적인 만남을 상징하는지 그 경계를 허물어 버려, 불성이 공이 이고 정사(正邪:바른 일과 사악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가 한 곳에 있는 점을 보여 준다. 또한, 정사가 연기의 작용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봄...>에서는 이 영화를 보는 이가 마치 화두의 공안을 푸는 상태가 계속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들은 만물을 내제하고 있는 상징적인 인물들 이때 문이다. 

그리하여, 소년이 넘는 저 선과 문수보살이 타고 다닌 다던 상상의 동물 해태를 소녀에게 내어 준 것도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관념적 타파인가 계율을 어긴 것인가?

수미산 주승지 연못의 물새로서의 오리는 물 위를 떠다닐 수 있고, 때로는 잠수활동을 하기에 알맞은 몸을 갖고 있다. 이 잠수능력은 수계(水界)나 지하세계와 관련한 중용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 곧 물새는 하늘땅 물을 그 활동영역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들새나 산새보다도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기에 충분하다. 
또한 오리는 물과의 밀접한 관련성으로, 비와 천둥을 지배하는 천둥새 속성도 지님과 동시에 오리의 꽥꽥거리는 울음소리 때문에 야크트족은 오리는 철새, 곧 철로 만든 새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천둥새로서의 오리는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경마을에서는 비를 가져다주는 농경 보조 신으로서 발달 정착되었다. 오리는 전형적인 물새이며, 잠수 조이기 때문에 홍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불사조로도 생각되었다. 오리의 또 하나 특성은 철새라는 점이다. 철새는 계절이 바뀌는 변화를 암시해 주고 초자연적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혼의 순환적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즉 철새는 이승과 저승을 그리고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닭은 봉황이나 주작을 내포 한 다고 할 수 있고, 주작은 붉은 작형(雀形)으로 새(鳥)로는 닭의 형태(鷄形)로 나타나기도 하고, 적조(赤鳥)라든지 금조(金鳥)도 되며, 대조(大鳥)에서 붕(鵬:대붕 새)나 봉황(鳳)에 이르기도 하고, 해(日) 안에 표현되는 삼족오(三足烏)도 되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의미하는 등 서상(瑞祥)의 새로 여겨져 왔다.

소녀가 떠난 수미산 인생암을 소년 스님도 떠난다. 석가와 닭과 함께... 불교에서 지혜, 부처, 중생, 축생의 미물 그리고 주작의 상징인 닭은 이제 인생암 밖에 있다. '불이'라 하여 안과 밖이 없다 하지만, 소년 승이 그들 (석가와 닭)과 함께 나왔다는 것 역시 영화의 중의성을 중첩시키고 그가 마이너스라고 할 때, 부처가 플러스라 해석을 한 다면, 이 즉시 우리는 '공성이 불이'라는 수미산의 기본 개념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소년 승과 부처, 그리고 닭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같이 떠났다'하면,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인생암> 밖으로 나갔는가... 입을 여는 즉시, 노승의 죽비 소리가 우리들의 등짝과 만나 사바세계를 울릴 것이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함구하며 공안을 풀듯 영화를 계속 볼 수밖에 없다. (아, <다모>에서 나왔다던 대사가 떠오른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무일 우학 스님의 <무문관의 첫 백일 일기>에서는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연등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보리를 얻고 법륜을 굴리니 삼천대천세계가 무문관(無門關)은 ‘문이 없는 집 ’이란 뜻으로 폐관(閉關)과 통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수행을 왜 하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6근(六根:안이 비설 신의)의 문(門), 즉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문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수문 견성(守門見性)! 문을 지키면 성품을 본다.’..”우학 스님은 무문관 수행에는 6 무의 공덕이 있다고 전한다. 무문 무설(無聞無說),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공덕, 무해 무질(無害無嫉), 음해도 없고 질투도 없는 공덕, 무포무비(無飽無肥), 배부르지 않고 살찌지 않는 공덕, 무명 무욕(無名無慾), 명예와 오욕락을 떠나는 공덕, 무주무우(無宙無宇),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고 공간을 의식할 이유가 없고, 무득 무실(無得無失),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공덕이다.


공덕이 크다고 아무나 무문관에 들 수는 없다. 닫힌 가운데 열어나가는 힘이 없다면 위험하다. 일상 속에서 때때로 침묵하는 가운데 다음의 구절을 생각하는 것으로 무문을 대신하는 방법은 어떨까.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니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리라.”(본문 115쪽)


                           가을


김기덕 감독 영화 <봄...>의 봄에서 동승은 부처와 둘이 아닌 물고기와 뱀은 여름에 소년 승과 만나, 소년승은 '물고기 눈'으로 '뱀의 몸 짓'을 하고 말았다. 시공을 떠나 물고기와 뱀도 부처의 몸짓이라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을은 소년승이 '뱀의 눈'으로 '물고기의 몸 짓'을 할 인연 과보가 봄에 만들어져 있다. 씨앗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탁발 후 돌아온 노스님은 바랑에 떡을 꺼내어 한 입 베어 물고 '청년 승'의 아내 살해 기사를 읽고 풍경의 물고기를 쳐다본다. 이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이 '화두'이기에 한 장면의 이해가 부족하면 다음 장면의 <무문관>을 열어나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풍경을 바라본 것은 가을에 청년승은 여름에 심어 놓은 원인 그리고 봄의 결과로 인하여 '뱀의 눈'으로 '물고기의 몸 짓'을 하기에 풍경을 보았지만, 떡은 무엇 이란 말인가?

한 번은 운문문언 선사에게 승려가 질문했다. 승 묻다; 불교계의 선배들(진실을 얻은 사람들)을 초월해 버리는 경지의 논의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선사 말한다: 쌀가루로 만든 떡이다.

※ 니시지마 선생 : 주

이것은 결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 진실을 얻은 사람들을 초월한 경지는 어떤 것인가 묻는데, 현실 그 자체다 고 대답한 것이다. 현실 그 자체라고 해봐도, 하나의 말이며 추상 개념이기 때문에, 현실 그 자체의 하나의 대표로서 쌀가루로 만든 떡이란 구체적인 것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쌀가루로 만든 떡은 쌀가루로 만든 떡 그 자체로서, 바로 현실의 것으로 되고 있는 단계에서는 진실을 얻은 분들을 더욱 초월한 논의를 설하는 운문 선사가 있었다. 그 운문의 말에 대하여, 그 말조차 문제 삼지 않는 뛰어난 불도 수행자도 있었다. 또 운문과 승려의 문답을 오랜 불도 수행에 의해 몸의 체험을 통해 이해하는 불도 수행자도 있었다. 그리고 또 운문과 승려의 문답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 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운문의 “쌀가루로 만든 떡”이란 말이 구체적인 사물에 관련하여 현재의 순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약하는 경우에는, 그림의 떡에 의해 표현되는 말, 개념을 사용한 말이 둘, 셋으로 반드시 사용되고, 반드시 나타나 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형태로 구체적인 사물과 언어에 의한 표현이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실을 얻은 분들의 경애를 극복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악마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 니시지마 선생: 주

우리는 보통 불도라고 하면, 부처님은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지만 부처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라는 것으로, 다양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코 나쁜 일을 한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나쁜 일을 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처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전체란 것도 눈앞에 보이는 키가 큰 대나무의 뿌리고 줄기며 가지고 잎인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키가 큰 대나무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서야 말로 우주가 영원한 존재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넓은 바다, 수미산, 우주란 것도 구체적으로 눈앞에 무성한 긴 대나무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서야 말로 견고하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넓은 바다, 수미산, 우주라는 거대한 것뿐만 아니라, 승려가 사용하는 여행용 지팡이와 죽봉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도, 어떤 물건은 나이를 먹고 있으며, 어던 물건은 아직 나이를 먹고 있지 않다는 것일 뿐의 일이며, 개별 물건으로 개별 상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파초의 잎은 물질적 요소(땅 · 물 · 불 · 바람)와, 정신적인 요소 (마음 · 뜻 · 식별 · 지혜)를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 빛과 색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을바람이 불면 가을바람에 부서져 버리고, 다 시들어 버려서 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형태로 파초는 가을이 되면 모습을 사라져 간다.

아주 맑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는 장애가 될 부분도 없고, 아교나 기름이 묻어있는 일도 없다. 파초는 파초 나름대로 현재의 순간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파초의 모습이란, 속도가 구속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라든지 순간 따위라는 논의와도 관계없다. 파초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 이 같은 힘을 일으키는 것으로, 물질적인 요소도 비로소 활약할 수 있는 것이며, 정신적인 요소(마음의 작용)도 그 임무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파초의 모습을 보면, 봄 · 가을 · 겨울 · 여름이란 계절의 변화를 자신의 도구로서 파초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로, 눈앞에 보이는 키가 큰 대나무도, 푸르고 푸른 파초의 모든 모습이란 것도 한 장의 그림으로 파악할 수 있다. 향엄지한 선사가 어느 날 청소를 하면서, 자갈이 대나무에 맞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진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실을 얻은 후에든, 진실을 얻기 전에든, 마찬가지로 한 장의 그림으로서 인생을 살고, 일상생활을 보내면서 불도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한쪽이 보통사람이고, 한쪽이 성자(聖者)라는 식의 감정적인 견해에서 사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 대나무는 이처럼 길고, 저 대나무 저렇게 짧다.

이와 같은 형태로 눈에 비치는 일체의 사물은 그림으로서 정리된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긴 것은 긴 것으로서, 짧은 것은 짧은 것으로서 눈에 비치는 것이다. 그래서 긴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있고, 짧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명확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런 후, 노승은 법당에 들어가 가사를 꿰맨다. 원래 경(經)의 원어(原語)인 Sūtra는 동사 siv 또는 sīv(꿰매다의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실, 끈, 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위로는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꿰고 [貴穿] 아래로는 중생(의 고통과 미망)을 거둔다는 [攝持] 것이 경의 ‘근본 기능이요, 존재 이유’인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상류층의 언어인 베다(Veda) 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족어(民族語)로 전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즉 초기불교가 친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언어 인식과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되어 중생들의 개 아적 언어 인식과 한없는 거리와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법[진리]을 자각 게 하려고 했을 뿐이지 자신의 말을 절대시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기도 한 것이다.

글쓴이는 이 장면에서 '독사의 독'을 뿜어 내고 있는  연기(緣起)와 연기 (演技)를 보았다. 그리고 이 부분의 대사는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 속 이야기를 연상시켰다. 과거 김기덕 (김영민)이 미래의 김기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사랑을 한 죄 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여자뿐이었습니다.  갠 다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 말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나만 사랑한다고 해 놓고? 그래서,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승의 말, "내가 좋은 걸 남도 좋은 줄 왜 몰라!"

그 후, 청년은 인생 암 밖으로 모셔갔던 석가를 인생암 대웅전에 돌려놓는다. 그도 '불이 부처'이니, 그도 돌아오니 부처도 돌아온 것인가? 원래 있었던 부처를 자신 안에서 발견해 나가는 것인가? 이 과정도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니... 가히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라..


원인의 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기 안의 모순을 발견하고 즉시 하는 것 일지라.. 무명초(無明草)라고 불리는 머리카락은 번뇌와 망상을 상징하며 삭발은 머리카락과 함께 잡념도 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고, 삼천대천세계가 무문관(無門關)은 ‘문이 없는 집 ’이란 뜻으로 폐관(閉關)과 통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수행을 왜 하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6근(六根:안이 비설 신의)의 문(門), 즉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문을 지키기 위해서이지만 청년의 귀는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아서 청년은 바르게 정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밧줄에 매달리는 정진을 받게 되는데.. 서양에서는 우주의 시작이나 인생의 길흉화복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삶의 현실에는 그 뒤에서 ‘밧줄’을 드리우고 조종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 ‘존재’를 신이라느니, 정신이라느니 해왔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관념론이라 말한다. 그 어떤 ‘존재’를 물질이라 말하는 부류도 나타났다. 이른바 유물론이다. ‘정신’ 내지 ‘신’으로부터 풀어오든지, 물질로부터 풀어오든지 간에, 이러한 사유는 공히 어떤 ‘존재’로부터 이 세계의 현상을 설명한다. 그 ‘존재’가 하나라면 일원론, 둘이라면 이원론, 셋 이상이라면 다원론이 된다.

이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공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집착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붙잡고 놓지 않을 ‘밧줄’이 필요하다. 그게 중생이다. 그래서 그토록 사람들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가 없기에, 무아이기에 윤회할 수 있지, 주체가 있다면 윤회할 수 없음”(어느 사석에서, 승가대 송찬우 교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실체도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저 세상에 태어날 리는 없다. 다만 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태어날 뿐이다.(161쪽) 그래도 사람들은 그 ‘밧줄’을 놓지 않는다. 왜? 살고 싶은 것이다. 죽어서까지, 죽은 뒤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집착이 윤회에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 가지야마 선생은 분명히 알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공으로부터 공이 태어날 뿐이라고.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자. 공, 쉽지도 않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비이비난(非易非難)이다. 불교가 책 안에만 있지 않다(敎外別傳)는 것은, 불교가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삶과 수행에서 집착의 ‘밧줄’을 놓을 수 있을 때, 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윤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자유롭게.

꿈속에서는 여섯 갈래가 뚜렷하더니 꿈 깬 뒤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도무지 없노라!!


이런 모든 정진 과정 후에 비로소 청년은 '반야심경'을 각인하며 인각 할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은 전편에 써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고양이는 조선시대,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에게 자객이 있음을 경고해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 이야기는 불교 설화 중 유명하다 한다. 세조는 그 고양이를 위해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고,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 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세조는 서울 근교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해 고양이를 키웠다. 또한 왕명으로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지금도 상원사에는 계단 좌우에 돌로 조각된 고양이 석상이 있다고 한다. 그 석상은 아래와 같다. 


상원사 고양이 석상 (출처: 구글 이미지)

인각에 대하여 흥미로운 김형효 교수의 "데리다의 철학 사상과 불교"의 한 부분을 덧붙이면 이와 같다. 영혼의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영혼에 진리의 말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자가 말을 가능케 하는 근거라고 데리다는 언명하였다. 말을 통하여 일시에 모든 내용을 동시에 우리가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말은 영혼에 새겨진 것을 비동시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차이의 접목에 다름 아니므로 말의 근거는 차이의 접목과 같은 비동시적인 것의 순차적인 표출과 같다. 비동시적인 차이의 표현은 곧 말이 문자의 생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는 이 세상의 사실은 이 세상이 잡종의 만(卍) 자와 다르지 않고, 그 만(卍) 자는 상호 의타적인 이중성의 현상에 다름 아니므로 그 이중 긍정은 자가성이 없는 환영(simulacrum)의 사이와 같다. 그래서 그 환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이중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마치 불가에서 현상론적으로 보면 연기법인 것이, 실 상론적으로 보면 반야 공이라고 일컫는 것과 유사하다.


데리다는 ‘같음을 다름의 다름(The same is the other of the other.)’이라고 규명하고, 또 ‘다름도 자기와 다르게 같음(The other is the same otherwise than self.)’이라고 명제화하였다. 만상이 이처럼 연회의 계기에서 성립하는 연생에 불과하다면, 만상은 같음과 다름이 서로서로 차이 속에서 동거해 있는 그런 이중성의 위상에서 읽혀야 한다. 차이와 동거가 만상을 해석하는 가장 간단한 언명이고 이 언명이 곧 로고스와 같은 말이 아니라, 파르마콘과 같은 문자-표지라는 것이다. 이중성의 파르마콘이 곧 문자-표지의 별칭이라면, 문자-표지의 형성은 반드시 이중성을 한 단위로 하여 이룩된다.


예컨대 종이 위에 물결무늬를 그린다고 해도, 그 무늬는 흰 바탕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기에 흰 바탕이 물결무늬의 타자인 셈이다. 흰 바탕을 배제한 물결무늬는 사상누각과 같다. 그런 점에서 물결무늬와 흰 바탕은 서로 상호 연루되어 있고 공동 출두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결무늬와 흰 바탕 사이에는 서로 상보적인 가역 작용이 성립한다. 흰 바탕이 없이는 물결무늬가 그려질 수 없고 물결무늬가 새겨짐으로써 흰 바탕이 이미 둘로 쪼개져서 두 면을 동시에 지시한다. 두 면을 차이로서 동거시킨다. 말-표현의 세계는 계시적으로 일회성으로 흘러 내려가서 공관적 사유(synoptic thinking)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자-표지의 세계는 이처럼 상호 가역적 순환의 반복이 가능해서 공관적 사유가 가능하다.


차연이 가장 오래된 고어라고 데리다는 설파한다. 차연의 관계는 두 가지의 이항적 대립보다 더 나이가 먹었고 오래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즉, 산은 계곡과의 차연관계인데, 산과 계곡이 생기기 전에 인간은 이미 표지-문자학적인 사유의 선험성에 의거해서 산과 계곡을 하나의 이항적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그런 원 흔적의 선험성을 사유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연은 이분법이되 이원적인 이분법이 아니고 이중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사를 인식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불일 이불이(不一而不二)의 그런 애매모호성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공간과 시간도 그런 불일이불이의 관계로서 이해한다. 연기(le de큞ai=delay)의 개념이 시간적 대기(temporisation=temporizing)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또 공간적 간격(espacement=spacing)의 뜻으로 인식되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시간의 공간되기(le devenir-espace du temps=becoming-space of time)’와 ‘공간의 시간 되기(le devenir-temps de l’espace=becoming-time of space)’로서 시간과 공간을 차연의 관계로 다발처럼 묶는다.


조개가 법보(法寶)를 보호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하여, 노스님은 경찰 2 명과 함께 노스님이 고양이 꼬리로 쓰고, 청년이 인각 한 반야심경을 형형색색으로 색칠한 것이다. 
왕대제라는 사람은 방생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수많은 조개를 사서 강물에 넣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배를 타고 항구 어귀에 이르자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었다. 왕대제는 급한 마음에 항상 수지 독송하던 『금강경』을 꺼내 물 가운데 던졌더니 문득 바람이 자고 파도가 쉬었다. 포구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고자 하는데, 이상하게 뱃머리에 뒤웅박 같은 물건이 매달려 물속으로 오락가락하는지라 급히 헤쳐보니 조금 전 물에 던졌던『금강경』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경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 한 방울 묻지 않았으며, 뒤웅박은 모두 조개 뭉치였다고 한다. 또한, 다른 설화 중 하나는 
중국 문종 황제의 불교에 귀의하여 어육을 금했으나 유독 조개만은 끊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조개를 까니 조갯살이 상아 관세음보살 상으로 변하였고 그는  관세음보살의  "설함이 없이 설하시는 무설 이설(無說而說) 들리지 아니하여도 들은 것으로 생각하는  불문 이문(不問而問)"을 배웠다 한다. 


이는 마치, 알록달록한 영락으로 치장한 화려한 보관과 푸른색 천의는 신비감을 자아내고 긴 손가락과 멋을 낸 손톱은 정병을 우아하게 잡고 있어 신통하고 묘한 힘 두루 갖추신 관세음보살을 표현하는 듯하다. 

즉, 노승, 경찰 2명, 청년과 고양이는 사 불 (寫佛) 불사를 한다. 사 불이란 무엇인가사 불(寫佛)이란 불상을 그려내거나 또는 새기는 일련의 모든 행위를 말하며 채색하여 장엄하는 장식적인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불상의 범주는 불보살 상을 포함한 신중 상까지 아우르므로 불상, 보살상, 신중상을 그리는 모든 행위가 사 불의 범위에 들어간다.

사 불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으로 완성해 내기 전에 사 불선(寫佛禪)을 통하여 외적인 형상을 내적인 형상화로 구체화한다는 점이다. 사 불은 이러한 사 불선으로 불상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삼매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사 불은 사 불선의 부분과 관상한 부처님의 형상을 직접 그려내는 사 불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요하고 참된 내면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깊이 관상하여 그리는 일체의 행위가 사 불의 범주에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 불은 선수행(禪修行)의 일종인 관상법(觀想法)으로써 사 불선에 들어 그 깊은 몰입 속에서 32상 80종호의 부처님 원만 상호를 통하여 내면의 불성(佛性)을 확인하고, 고요하고 투명한 본래의 마음에 그 부처님의 형상을 각인하여 그러한 모습의 부처님을 그려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처님의 형상을 관하는 사 불 수행은 32상 80종호의 부처님 형상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 심상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 불은 곧 수행의 의미가 결부되어 전개된다.

이렇게 사 불은 그리는 행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사 불선에 드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 불의 요체는 사 불선에 있는 것이다. 사 불하기 이전에 선에 들어 그 부처님의 상을 명확히 관한 상태에서 사 불을 진행한다면 그 차제가 법이 되어 수행자의 마음을 열어 줄 것이다.  


대승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의 내용을 깊이 통찰하고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는 이들 경전에 대한 치밀한 이해와 청정한 직관력이 요구되는 사 불선(寫佛禪)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시대의 ‘관경변상도’나 ‘화엄 회상도’ 등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경변상도로 전해지는 경전 앞면의 모든 변상도도 사 불선을 통한 깊은 몰입의 결과로, 초본 없이 그려진 순수한 사 불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 불의 과정에는 대승 경전에 대한 교학적 이해는 물론 그것을 관상하는 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선과 교가 동반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깊은 사 불선을 통하여 내면의 정화화 함께 처처 곳곳의 부처님 기운도 같이 할 수 있으며 타인을 위한 회향이 따라야 하므로 사 불은 대승불교의 수행법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다채로운 채색이나 다른 여러 장식적 표현도 넓게는 사 불의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정화하여 삶의 질을 한층 높일 수 있는 모든 종교의 이면에는 훌륭한 예술을 동반하게 된다. 하물며 불화는 그보다 더한 종교적 영감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러한 영감을 표현하기까지는 사 불선의 영향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수많은 형상과 경전의 변상으로 이루어진 불교의 예술들은 모두가 작가의 순간적인 영감으로 표출되었다기보다는 아주 오랫동안 믿음으로 다져진 내면의 세계를 관상법(觀象法)을 통하여 외부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 불을 마친 청년은 참구(參究:화두 등을 꿰뚫어 알아내기 위해 마음을 집중함;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두함;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그의 문을 두드림)의 순간을 맞이한다.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말하기 이전이다. 처음 참구 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의 공부가 시끄러운 곳에서의 공부보다 힘을 얻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절대로 분별하는 마을을 내서는 안되며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또 어찌 부질없이 고요함과 움직임을 분별하여 집착하는가. 만일 공(空)에 집착하여 망상을 두려워하면 그것은 또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것이다. 청정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청정이 아니다. 공(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며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 묘도(妙道) 아님이 없고, 김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참선이다. 하루 종일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 도 닦는다고 하지 않는다.


                          겨울


겨울 부분은 전편에서 빠진 것들만 보충하기로 한다. 수미 세계의 <인생암>은 겨울을 품고 불이문과 대웅전을 가로지르던 문은 어느새 얼음이 되어 수평선을 만들었다. 장년승은 정화를 거쳐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선무도를 배운다. 


선무도를 배운 후 그는 삼계 (욕계, 색계, 그리고 무색계)를 다스리고 대중불교의 미륵을 수미 세계에 재림시킨다. (여담:(餘談): 그가 폭포수 아래에서 보여주는 선무도는 (전)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양의 Y자 그리고 스파이럴 시퀀스를 연상시킨다. 그 당시, 김 감독은 오른편은 왼편보다 강하다. 그것은 그가 양 쪽 뇌가 활성화되어있지만 운동신경에 있어서 왼쪽 뇌가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다 - 실험 안 해 봤음).

그리고 찾아 갓난아이를 맡겨 두고 간 여인.... 그리고, 왜 기아(棄兒) 인가?

다시 말하면 아이를 대지에 버리는 것은 아이를 대지라는 어머니의 품에 놓는 것이다. 대지는 아이의 수호자이며 모든 힘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물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물은 파괴하고 정화하고 창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대지라는 우주의 기본 요소에 버려진 아이는 죽을 고비에 이르지만이 고비를 극복함으로써 대부분의 경우 영웅이나 왕이 된다.

아이를 버리는 자 는 대부분 아이의 부모나 부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영웅이 되기 위해서 먼저 부모의 품에서 떠나야 된다는 것 같다.

아이에게 모든 믿음의 근원이 되는 부모 가자 기아 이를 버린다는 것은 아이를 인간사회에서 축출하고자 연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물들이나 인간사회에 깊이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버려진 아이를 구제한다는 것도 이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자연에게 맡긴다는 것은 아이를 인간사회에서  축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이 버림을 통해서 아이에게 인간사회를 초월함으로써 이 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장년승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아이를 버리고 간 여인네도 부처와 둘이 아님을...

수미산 정상에 미륵불을 재림시킨 후, 그의 중생구제를 기원한다. 



                       그리고 봄...


그리고, 봄, 봄, 봄, 봄이 인생암에 도착했다. 다시 얼음으로 이루어졌던 평행선은 사라지고, 인생암의 불이문과 대웅전은 물을 품어 안고 있다. 장년승은 동자승 사불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거북이는 관세음보살을 입은 반야심경 위를 서성이고 있다. 중생이 윤회하면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 눈먼 거북의 비유이다. 붓다(= 부처)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난 널빤지를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넓은 바다에는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있어 100년에 한 번씩 해면 위로 머리를 내민다고 하자. 그 눈먼 거북이가 해면 위로 떠올라 널빤지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할까?” 제자들로부터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자, 붓다(부처)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는 비유를 또 하나 살펴보자. 붓다는 한때 손톱 끝 약간의 흙을 집어 들고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손톱 끝으로 집어 든 흙과 땅 위의 흙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고 물었다. 제자들이 땅위의 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난 중생의 수는 매우 적고 인간이 아닌 중생으로 태어난 수는 훨씬 많다.”며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비유의 요지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 열심히 수행하여 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크게 소중히 여기거나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짐승과 같은 짓을 하여 지탄을 받는다.
이 비유를 받아들이면 인간으로 태어난 지금 우리의 삶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되새기게 된다. 거북이가 살고 있는 물밑은 삼악도를 가리키고 있다. 삼악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염두에 두면 설령 더 나은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악도에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욕계라고 보았던 이유를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욕계의 본질은 곧 욕망이다. 욕망이 없으면, 이 우주가 설명되지 않는다. 욕망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바깥의 것을 소유하고 점령하려는 타동사적인 욕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의 것을 실현하려는 자동 사적인 욕망이 있다. 전자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려는 소유론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본디 속하는 힘을 실현하려는 존재론적 욕망이다. 존재론적 욕망이라는 말은 세상 만물의 존재가 본디 욕망이므로 그 존재가 자기의 것을 실현하려는 것이 자기 존재의 힘을 발양하려는 것과 같은 뜻이므로 생긴 의미이다.


다시 김기덕 감독의 <봄...>을 다시 생각해 보면 아래와 같다. 노승은 원래 불성을 갖고 태어난 개구리에서 노승이 되었는데 그가 뱀으로 욕계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용을 상징하는 뱀으로 그가 해탈을 했는지는 장년승의 현재에 달려있고, 장년승의 미래는 현재 동자승에 달려있고, 현재 동자승에 따라 거북이의 미래도 달려있다. 그리하여, 괄호는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정의되냐를 나타낸다. 사계를 함께한 현재 장년승은 동자승에서 물고기 동자승으로, 그리고 뱀 청년승으로 그리고 현재 개구리 장년승이다. 그가 지장보살이 되는지는 그와 현재 거북이를 갖고 놀던 갓난아이, 그리고 거북이와의 관계에 미래에 정의되는 것이다. 이 셋이 최상의 길을 열면 우리의 역사적 미래는 해탈을 의미하고, 개구리 장년승은 지장보살이 되고, 갓난아이는 미륵이며, 거북이는 마지막 해탈의 기회를 잡는 것이다. 원래는 아래와 같으나, 글씨가 작아서 읽기 어려우니 두 개씩 나누면...

이와 같다.. 노스님은 우리의 역사적 미래를, 장년승은 우리의 현재를, 동자승도 우리의 현재, 그리고 소녀 엄마는 마지막 기회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계도가 왜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는 다음호에 계속한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 역사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가? 현재에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럼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옛날부터 찾아왔던 미륵은 누구인가? 답이 궁금한가? 답을 알고 싶다면 지금 수미산의 꼭대기에서 한쪽 다리를 괴고 사유하고 있는 미륵의 뒤통수를 보고 있는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김기덕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기덕 감독 영화 다시 보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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