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러나는 시간
어김없이 더위가 지나가고 서늘한 온도가 피부에 닿는 순간이 왔다. 말복이 지나고 나면 3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도 서늘함이 느껴지다니 정말 ‘절기 매직’ 덕 일까? 조상님들의 지혜에 또다시 감탄하고야 만다.
지난 주, 평일 오전시간을 하염없이 뒹굴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쌀국수 집을 방문했다. 맛집으로 소개될만큼 유명한 곳으로 이번이 벌써 3번째 방문이다. 하지만 혼자 간 건 처음이었다.
맛집 블로그 소개글엔 ‘혼밥하기 좋은’, ‘혼밥도 가능한’이라고 되었지만 왜인지 나는 혼자 밖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했다.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안정감이 배는 커지는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유행했던 ‘혼밥’,’혼영’,혼여’처럼 자유롭게 무언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됐다.
이번엔 달랐다. 용기를 내 키오스크에서 차돌쌀국수 한 그릇을 결제하고,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맛집 혼밥’에 발을 들였다. 무려 35년 만의 일이다.
문을 쓱하고 열고 들어가자 점심이 조금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나를 포함하여 4명이 앉아있었다. 쭉 늘어진 바 테이블 한 켠에 자리를 잡자 주문한 차돌쌀국수가 타이밍 좋게 내 앞에 놓였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아래로 보이는 푸짐한 차돌과 그 아래 숨겨진 뽀얀 쌀국수의 면이 보기만 해도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비주얼이었다.
쌀국수는 19세기 말 베트남 남딘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간편히 먹던 국수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의 ‘뽀오페(Pot au feu)’가 베트남식으로 변해 탄생한 음식으로 알려진 슬픈 역사 속에서 태어났지만, 짧은 시간에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러한 ‘쌀국수’의 육수를 만드는 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소고기의 뼈와 양파, 생강, 팔각, 계피, 정향 등의 향신료를 오랜 시간 낮은 불로 은근하게 끓여 국물이 퐁퐁 거품을 내며 터질 때 깊고 맑은 국물 맛을 낼 수 있다. 베트남의 ‘쌀국수’는 바로 이 ‘때’를 기다려 완성되었다.
뜨끈한 국물을 한 술 뜨니 온 몸에 찬기운이 가시고 따뜻함이 목에서부터 발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차분하게 가득 올려진 차돌을 걷어내고 면을 후루룩 먹었다. 슴슴한 면의 맛과 함께 육수는 깊은 맛이 어우러져 새로운 경험이 밀려 들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제법 ‘혼밥’ 잘 하잖아?
내 안에 국물이 끓어오르는 순간은, 불시에 찾아온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 마음의 온도를 높이며 내 안에 육수가 끓어오르고 깊고 맑은 육수를 낼 수 있는 온도로 향해간다.
나의 국물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오늘도 나는 나를 천천히 끓인다. 두근거림을 연료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