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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ahms Jan 04. 2022

잠시 동안 혼자서

에릭 사티 - 그로시엔느

Erik Satie - Gnossiennes
에릭 사티 - 그로시엔느

피아노 악보에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이라는 지시어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연주하고 싶으신가요? 기묘하면서도 재밌는 표현의 지시어를 남긴 프랑스 작곡가가 있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반, 프랑스 음악을 주도했던 모호한 음색의 ‘인상주의’ 음악과 달리 그는 단순하고 간결한 음악형식을 추구했습니다. ‘더 이상 인상주의 음악으로는 프랑스 음악의 미래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죠. 프랑스의 20세기 작곡가, 에릭 사티를 만나봅시다.

우리에게 <짐노페디>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에릭 사티는 전통과 기존 관념을 거부했던 작곡가였습니다. 13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사티는 격식과 규칙을 중요시했던 교풍에 싫증이나 중퇴를 할 정도로 약간의 반골기질도 있었죠. 사티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바그너의 음악극 같은 독일 중심의 음악에서 벗어나, 독일의 영향이 없는 프랑스의 음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음악을 주도했던 모호한 인상주의 음악을 추구하진 않았죠. 그와 달리, 단순하고 선율이 느껴지는 간결한 형식의 음악을 추구했습니다. 더 나아가 음악이 가구처럼 하나의 배경처럼 머무르길 바라며 <가구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주의 깊게 듣던 관객들에게 사티는 ‘음악을 듣지 마세요!’라며 소리쳤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죠.

에릭 사티(Erik Satie / 1866. 5. 17. - 1925. 7. 1.) / wikipedia

사티가 악보에 기입한 지시어에서 우리는 사티의 익살스럽고 범상치 않은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 짜증, 고통이라는 뜻의 <벡사시옹 Vexations>이라는 작품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한 장도 채 되지 않은 피아노 악보 위에 ‘840번 반복하세요.’라는 지시어를 적어 놓았습니다. 터무니없는 지시어를 도전해 본 연주자들은 사티의 지시가 18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죠. 그 시간 동안 연주자도 청자도 모두 정신병이 걸릴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되었죠.

그의 기묘한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싹 마른 태아>, <엉성한 진짜 전주곡, 개를 위한>, < 혐오스러운 신사의 뛰어난 왈츠> 등 특이하고 익살스러운 제목으로 곡을 작곡하기도 하고, ‘매우 기름지게’, ‘구멍을 파듯이’,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등 독특한 지시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독특한 지시어들에 대해 사티가 독일 음악의 섬세하고 엄숙한 지시어들을 풍자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가 작곡한 <벡사시옹>의 악보 위에는 840번 반복하라는 지시어가 적혀있다. / wikipedia

에릭 사티는 수많은 피아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짐노페디>와 <그로시엔느> 등 그의 초기 작품은 굉장히 큰 사랑을 받고 있죠.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의 도시 ‘크노소스(Knossos)에서 소재를 가져와 작곡된 <그로시엔느>는 정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성과 단순한 음형, 클라이맥스가 없는 초연한 음악은 에릭 사티만의 간결하고 단순한 음악적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죠. 이 음악엔 재밌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박자표와 마디 줄이 없다는 것이죠. 또한 '혀끝으로', '잠시 동안 혼자서'라는 독특한 지시어를 악보에 표기해 놓았습니다.

사티의 <그로시엔느>를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어느 한 곳을 그윽이 바라보게 됩니다. 연말연초 붕 떠있던 마음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 힘을 쭉 빼고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음악과 함께 흘려보내 보세요. 사티가 우리에게 지시한 '잠시 동안 혼자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