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pin - Piano Concerto No. 1 In E minor, Op.11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1829년,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19세의 쇼팽은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곳에 눈을 뜨게 된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쇼팽은 빈을 지나 체코의 프라하와 드레스덴, 브로츠와프 등 다양한 곳에서 연주를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세 쇼팽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풋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같은 학교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콘스탄차'였죠. 쇼팽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때문에 그녀 뒤에서 몰래 짝사랑만 하고 있었습니다. 연주여행을 마치고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방에 틀여 박혀 2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그는 '콘스탄차'를 생각하며,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했다고 알려지죠. 뒤이어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에서도 콘스탄차에 대한 마음을 담겨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는 폴란드를 떠나는 쇼팽의 마지막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처음으로 연주가 되었죠. 연주를 끝낸 쇼팽은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 빈으로 향했습니다. 빈으로 향하던 쇼팽은 잠시 브로츠와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주회를 보러 갈 기회가 생겼죠. 연주회의 휴식시간에 쇼팽은 무대 위에 남아있는 피아노를 잠시 연주했습니다. 그날 연주를 하기로 한 피아니스트는 쇼팽의 연주를 듣게 되었고, 그의 앞에서는 절대 연주를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연주를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쇼팽은 갑자기 즉석에서 연주자로 지명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하게 되었죠.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쇼팽은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쇼팽의 설렘과 즐거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과 불안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가 빈에 도착한 지 딱 일주일이 되던 때, 폴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나 국경이 폐쇄가 되었기 때문이죠. 결국 쇼팽은 마지막 숨이 멈출 때까지 고국 폴란드를 늘 마음속에 품고 그리워했다고 알려집니다.
쇼팽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두 번째로 작곡된 협주곡 1번은 처음으로 작곡된 협주곡 2번보다 먼저 출판을 하게 되어 '1번'의 이름을 달게 되었죠. 쇼팽의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모두 자주 연주가 됩니다. 특히 1번은 2번보다 더 긴 길이와 화려한 테크닉으로 콩쿠르에서 자주 연주가 되기도 하죠.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결선에서 이 곡을 연주한 이후로, 쇼팽의 협주곡 1번은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피아노만 작곡했기에 쇼팽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소 빈약하게 들려옵니다. 하지만 피아노는 무대 위를 가득 채울 화려함과 풍부함으로 이루어져 있죠. 음악은 기교적인 현란함과 서정적인 선율의 적절한 합으로 이루어진 1악장과 투명하고 순수한 감정이 나타나는 2악장, 그리고 경쾌한 폴란드의 무곡 크라코비아크가 사용된 정교한 다이내믹 표현이 특징인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로망스'라 불리는 2악장은 20살의 푸른빛을 내뿜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 가득 느껴지기도 하죠. 쇼팽은 2악장에 대해 친구 '보이체호프스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새로운 협주곡의 아다지오는 E장조라네. 여기서 나는 강렬한 힘을 추구하지 않았어.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 약간의 우울함을 느끼면서, 많은 추억들을 되살리는 장소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담아내려고 했지. 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어린 밤처럼 말이야.’
*2악장 - 로망스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코쟈노프(2010 쇼팽 국제 콩쿠르)
https://youtu.be/TY7VID8GmOM?t=1180
-메인 사진 출처 : gramoph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