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May 02. 2016

감정의 인수분해, 어장관리

                                                                                                                                                                                                                                                                                                                 

주변을 보면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으로 매력을 어필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들은 '만인의 연인'이다.

특정 누구와도 진지한 만남을 시작하진 않지만,

주변의 여러 명과 이성적인 관계를 유지하곤 한다.

 

'아는 오빠' 나 '아는 여자'라는 단어를 통해

표면적으로 친구 관계로 포장된 이것은

바로 어장관리다.

 

이성중에 관계의 발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최대한 즐기는 것이다.

당장 마음에 들지 않아도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어장 안에 넣어둔 채 종종 먹이를 주며 관리한다.  

 

 

31세 수진은 약 1년간 좋아해오던 남자가 있다.

남자는 그녀와 동갑내기 성형외과 의사 훈.

훈은 수진의 회사 동료를 통해 만나게 된 동네 친구.

그들은 집이 가까워 종종 만나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술도 먹고 잠도 잤다.

감정은 더욱 깊어지고,

대화까지 잘 통하는 그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수진은 자신과 훈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훈은 종종 그의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도

수진을 불러내곤 했는데,

친구 중 한 녀석이 수진에게 관심을 표현하자, 

"내꺼야 임마~ 넘볼 생각하지마라~"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훈은 수진에게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한달에 2-3번 만나 술을 마시고,

밤을 같이 보내기도 했지만 그 이외의 진도는 없었다.

답답해진 수진은 훈에게 사귀자고 고백할까 했지만

그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할 수가 없었따.

수진은 직감적으로 훈이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그런 식의 관계로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 가을 훈으로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수진은 답답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그는 여전히 반갑게 그녀를 대해 주었지만,

바빠서 당분간 만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소 자존심이 상했떤 그녀는..

(사실 좋아하지 않으면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2달쯤이 지났을까..

갑자기 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한다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진은 훈에게 물어봤다. 

 

수진 - "여자친구가 있었던 거야..?그때 분명히 없다고..."  

훈 -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걔랑 잘 됐어.."

 

수진은 뭐리 따질 수 없었다.

본인이 훈의 여자친구도 아니니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훈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수진 - "어... 그래..축하한다."

청첩장을 보내겠다는 훈의 쿨한 멘트에 

수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어장관리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35세 호진.

호진은 조각 미남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다.

과하지 않은 근육질 몸매. 키 크고 까무잡잡.

쌍꺼풀 없고 날카롭지만 매력있는 눈빛.

자유분방하고 넉살 좋은 성격으로 

대학시절부터 인기가 많은 녀석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한 동안 한 여자에게 정착을 하지 못하다가

해외 여행을 갔다가 영화같이 만난 정민에게

푹 빠졌다.

정민은 32세 유수한 금융권 인재.

매력적인 미모와 건강한 몸매. 털털한 성격을 가진

그녀와 호진은 4년을 넘게 교제를 했다.

난, 그들을 보면서

그토록 방황하던 호진이 자신에게 딱 맞는 여자를 만나

정착하는 모습에 둘이 천생연분이구나.

정말 잘 만났다 싶었다.

그러던 최근, 정민에게서 소주한잔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호진과 그녀는 헤어졌단다.

그녀는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호진은 정민과 함께 알던 한 B양 때문에

정민의 속을 한 두번 뒤집어 놓은 게 아니란다.

여자에게 그토록 무심한 호진이

다같이 술 마시는 자리에는 꼭 B양을 부르고, 

B양이 온다고 하면 길을 못찾을 것 같으니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며 챙기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여자친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B양이 먹던 버블티의 스트로에 그대로 입을 대고 

먹지를 않나.

어떤 날은 지인들끼리 단체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정민이 스스로 양보하여 앞자리에 앉게 되었단다.

차 안에서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자 뒷자석에서 

B양이 휴게소에서 사온 두부과자를 호진의 입에 넣어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둘 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친한 친구처럼 천역덕스럽게

(이게 왜??? 에이~ 오해하지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고 한다.

하이라이트는 지난 겨울, 눈이 쌓인 산에서 등산을 했는데

이 날도 호진은 힘들어 하는 B양과 속도를 맞춰주며

챙기고 있었고,

눈 밭에다 "B야~ 힘내서 가자~" 라는 글자를 막대기로 

써주고 자빠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B양은 한술 더 떠서, 그 글자를 사진으로 찍어

본인의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

정민은 호진에게 수없이 이 문제로 싸우고

이야기 했지만 그때마다 호진의 반응은 이랬다.

-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왜 오버하냐 

- 너도 같이 친한 사이고 알면서 왜그러냐

오히려 그녀를 이상한 취급을 했다고 한다.

쿨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B양에게 여지를 주는 그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고

스스로가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아 이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B양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언니. 앞으로 전 언니와 연락하지 않을겁니다.

한 커플 사이에 껴서 하는 행동이 정말 추하네요.

언니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생겨 고맙게 생각해요

앞으로 언니도 꼭 본인 같은 사람을 겪어보길 바랍니다 "

그러자 그 B양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피해자 코스프레.

- 오늘 누군가에게 들은 말은

   내 생애 가장 가슴 아픈 말이었다.

   남들의 오해가 나의 마음을 이리 아프게....(블라블라)

정민은 호진과 헤어졌지만

결국 호진이 관리하던 B양과 호진은 사귀지 않았다.

단지 그 관계가 샘이 났을 뿐,  B양에게 있어 호진도

어장 속 물고기들 중 한마리였던 것이다.

요즘은 어장관리도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이성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호감도를 높여 놓으면,

나중에 싱글이 됐을 때  Next 애인을 만드는 것도

수월하고,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을 찾는 과정 중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애인의 긴장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어장관리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도 가능성이 있는 이성의 존재는

애인의 긴장감을 자극시켜 본인에게 더 충실하게

된다는 얘기다.

 

또는 진지한 관계가 부담스러워 어장관리에 

익숙해진 사람도 있다.

서로 구속하는 관계가 싫고, 거절에 대한 부담없이

필요할 때 서로 만나고 아니면

다른 사람 만나도 그만이니까. 

 

 

어장관리.

이제 어장관리는 잔인한 희망고문이 아닌,

연애의 스킬이자, 서로 쿨해질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아닐까.

나도 어장관리..해봤다. 

20대 중후반에는 여기저기 질질 흘리고 다녔다.ㅋㅋ

상대방이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사귈 마음이 딱히 없으면서도

외로워서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했던 적이 있다.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의도적인 립서비스를 시도하면서

마음을 들었다놨다 요물짓을 했다.

그러다 상대가 서로의 관계를 정의하거나 

거리를 좁히려 들면,

정색을 하거나 부담스러워 뒷걸음질 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릴 적 첫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뒤 

줄곧 그랬던 것 같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픔이라,

관계와 사랑에 있어 나는 점점 영악해지고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러한 관계의 패턴에

익숙해져 버린 내가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난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내 삶의 추억으로 남는 관계가 별로 없었다. 

 

 

- 내가 사랑을 하긴 한 것일까..

  사랑이 아니라면 난 대체 

  그 예쁘고 젊은 날, 무엇을 한 것일까..

물론 나를 지나쳐 간 남자들 중 좋은 감정과

설레는 마음으로 교제를 했지만

내 삶에 추억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해보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

웃기는 소리하네.

사랑 따윈 개나 줘버려 할 세상이 되었지만,

나는 스스로 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을 할 기회를 놓치며 

내 20대 후반과 30대초반을 보낸 것이

뼈저리게 후회가 되었다.

내가 가지긴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그 못된 패턴이

무서운 습관이 되어

정말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먹이 던지는 재미와 가벼운 인기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게 조금의 용기만 있었더라면,

내 삶 속 등장인물들인 그들을 좀더 제대로 봤을 테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이 아닌걸 아면서도 상대를 이용하는 일은

적어도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대학 교수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들은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 

 우리나라는 명백한 일부일처제이고,

 사람은 자신이 사랑할 단 한사람만 있어도 충분하거든.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도

 얼마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왜 그리도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를 받고 싶어서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르겠어.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지."

 

어장관리자들이여.

나의 외로움 때문에 상대를 이용하는 것.

때론 그것이 감정과 사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젊은 날 즐겨보길.

그러나 그 패턴에 자신을 잠식시키지 말기를.

자신의 감정을 수없이 인수분해해서

흩뿌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사람을 놓치고

누군가의 어장에서 졸라리 헤엄치고 있는

아둔한 금붕어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 것을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랑을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이렇게 살다간 10년도 훨씬 넘은 그때 그

첫사랑의 아픔 때문에

나는 평생 사랑 불구자로,

금붕어나 키우고 있어야 될지로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술, 도박,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