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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2. 2016

12년간의 정(情) vs 12주간의 설레임

12년간의 정(情) vs 12주간의 설레임 

내 친구 <주영>은 올해 33세.

홍대에 거주하는 골드미스.

3개월 전쯤 그녀는 IT 솔루션 업체로 이직하게 되었고, 

새로운 직장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3살이 많은 36살짜리 남자선배 <지훈>

지훈은 회의 중에 다 티가 나도록

주영을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결국 다같이 모인 직장 술자리는 단 둘만의 2차로 이어졌고 

취한 용기로 손도 잡았다.

주영도 싫지 않았다. 

서로 호감을 느꼈던 그들은

서로를 참 좋아하고 아껴 주었다.

말도 잘 통하고 유머코드도 잘 맞는다.

정말 오랜만에 이토록 친밀한 감정을 느낀 주영은

지훈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지훈에게는

12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는 점.

주영은 사실 알면서도 그에게 빠져들었다.

죄책감은 들었지만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또한 그녀에게 빠지는 것이 분명했다.

 

나ㅡ 여자는 몇 살인데?

주영ㅡ 34살

나ㅡ 왜 결혼 안 했대?

주영ㅡ 결혼의 필요성은 못느낀대..

그리고 그 여자와의 결혼은

확신이 안선대

나 ㅡ 그럼 헤어져야 하는거 아냐?

주영 ㅡ 12년 만났는데 이제와서 헤어지면

그 여자가 자기를 죽일 거라고 그러더라

12년이면 다른 사람은 절대 이해 못할

그들만의 영역이 있나봐..

듣고보니 지훈의 여자친구 B양은 지훈을 정말 좋아하는

지고지순한 34세의 여성.

지훈도 사실 그리 쓰레기 같은 남자는 아니었다.

여자친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동안 몇번 헤어지자고 했지만 

여자친구가 너무 힘들하고 괴로워해서 

다시 만나고 만나고 하다보니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가족끼리도 너무 잘 알고

그 둘이 이제 가족같은 느낌이라

헤어지고 자시고 할 입장도 안된다는게 

내가 전해 들은 말이다.

지영은 그 사실에 스트레스 받아하면서도

지훈과 사적으로 계속 만났다.

주말에 근교로 나가 맛있는 해물을 먹기도 하고

1박 2일로 여행을 갔다오기도 했다.

처음에 지영은 그저 한순간 즐기려고만 했다.

나이가 있어서 역시 스킬이 좋다는 둥 하면서.

나는 지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 ㅡ 그 남자 어쩔려구?

칸 ㅡ 뭐, 글쎄. 나는 그냥 즐기고 있는데 얘는 좀 심각해. 

      나한테 푹 빠진 것 같아 아무래도.”

나 ㅡ 왜? 어떤데?

칸 ㅡ 뭐 여자친구랑은 일요일 저녁에 딱 한번 만나고 

거의 시간을 나랑 보내니까..

나 ㅡ 일요일 저녁에 만나는 사람은 

정말 미루고 미뤘다가 의무감으로 만나는 사람인데..

칸 ㅡ 그러니까 말이야.

나 ㅡ 니가 정식으로 사귀자고 하면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너랑 사귈 것 같아?

나의 질문에 칸은 휴대폰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칸 ㅡ 응. 당연하지. 근데 내가 별루야. 부담스러워. 하하하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쿨함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말 지훈이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즐기는 것 뿐이라던 지영은 

나를 만날 때마다 지훈에 대한 얘기만 해댔고 

나는 그녀가 점점 그에게 빠지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쿨하게 보이고 싶어 했던 것은

그녀 또한 그 남자의 여자친구 존재를 알고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내면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방어막이었으리라.

며칠이 지났다.

예측하기가 힘든 이상한 날씨 때문인지 

좀체 잔병치레가 없는 나는 편도선에 걸렸고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회사 근처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한 건물에 성형외과 하나 정도는 있는 병원이 난무한 강남역에서 

20분만에 이비인후과 하나를 겨우 찾아 간단한 치료를 받고 링거 주사를 맞고 있는데

지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영 ㅡ 니 얘기 듣고 그 남자 한테 

살짝 떠봤는데...

     자기 여자친구랑 헤어질 생각 없는 듯 해..

며칠 전 확신에 차서 얘기하던 친구의 모습이 떠오르며 

살짝 민망해짐을 뒤로 하고

답장을 보냈다.

나 ㅡ 2년도 아니고 12년이잖아..

지영 ㅡ 이러다 나는 결국 세컨드 밖에 안되는거네

나 ㅡ 알고 시작한 거였잖아

지영 ㅡ 즐겨 보려 했는데, 그게 잘 안되네.  

자꾸 좋아져. 나 어떡하냐

나 ㅡ 에휴. 정말 이 멘트 하기 싫었는데, 

내 이럴 줄 알았다 알았어.

며칠 뒤 지영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여자친구에 대해 묻고, 

또 지금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단다.

지훈은  ㅡ너에게 여자친구 얘기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ㅡ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마치 주영을 배려하는 듯, 좋아하는 듯 

얘기하는 나름의 스킬을 발휘했겠지만

내가 듣기로는 

ㅡ 여자친구 얘기할 만큼 너랑 확신도 없고 내가 불편해ㅡ 

정도로 들렸다.

그럼 이제 나와는 어쩔 셈이냐는 주영의 질문에

지훈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ㅡ 지금 당신에게 너무 끌리고 설레여.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은 이렇게 감정이 흐르는 대로 냅두면 안될까.

12년 사귀었다는 지훈의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인가. 

알면서도 오래된 부부에게 가끔 있는 일처럼 

모른 척해주는 것일까.

12년 사귀었다는 그 ‘역사’는  

아무도 끼어들기 힘든 둘 만의 교감과 관계가 

형성되어있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문득, 

하긴 20-30년 같이 산 부부도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세상에

12년이 대수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훈은 12년이라는 아늑하고 든든한 정이라는 

홈타운을 벗어나

12주라는 설레임의 여행을 잠깐 하는 것일까.

아니면 12년 동안 황무지에서 

확신 없는 방황을 하다가

12주간 느낀 설레임을 통해 

새롭고 확신에 찬 삶을 찾으려는 것일까.

경험과 사례를 통해 나는 사실 

전자에 한 표를 던지는 일반적인 생각을 하는 편이다.

다만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좋아지는 어쩔 수 없는 

순수한 엔조이 불가 종족들이

엔조이 한번 해보려 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받은 채

너덜너덜 해지는 상황이 안타까워 

아주 희박한 케이스라도 쥐어짜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12년 동안 사귀면서도 설레임은 소진되었기 때문에

다른 여자에게 한 눈을 파는 남자친구를 둔 

그 여자친구가 안쓰러운건지. 

12주간 한 여자로서 남자에게 

흥분되는 감정과 설레임을 줬지만 

결국엔 자기 여자친구에게 돌아갈 남자를 좋아하게 된 

<주영>이 안 된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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