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불순물 28화

습기의 시학

혹은 투명한 괴물에 관한 단상

by 브레인캔디

공기가 아니라 물속에 서 있다. 숨이 아닌, 걸쭉한 젤리를 들이마시는 기분이다. 체온을 잃어버린 채, 피부는 스스로를 증류하는 증기기관이 되었다. 이 맹렬한 습기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공기를 가로지르는 투명한 괴물이다. 그 존재감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살갗에 달라붙어 내부를 침투하며, 사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벽은 땀을 흘리고, 책장의 종이는 습기를 머금어 부풀어 오르며, 금속은 차가운 땀방울을 맺는다. 이곳은 물과 공기의 경계가 사라진, 액체와 기체의 변방이다.


태양은 하늘에 매달린 백열등이다. 그 빛은 공기를 가르며 내리 꽂히지만, 습기라는 두꺼운 렌즈를 통과하며 굴절되고 분산된다. 빛살은 공중에서 부풀고 흩어져, 모든 그림자를 흐릿하게 녹여낸다. 그 아래, 도시는 거대한 증류 플라스크 속에 갇힌 실험체처럼 보인다. 아스팔트는 검은 거울이 되어 하늘을 집어삼키고, 그 위를 지나는 발소리는 축축한 포옹 속에 삼켜진다. 인공적인 냉기는 투명한 괴물과의 잔인한 씨름이다. 에어컨의 냉기는 습기를 밀어내려 애쓰지만, 그 순간 벽면에는 응결수라는 눈물이 맺힌다. 실내와 실외는 습기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서로를 향해 땀을 흘리며 대치한다.


시간마저도 이 습기의 압력에 눌려 늘어진다. 초침의 움직임은 꿀처럼 끈적하게 느껴지고, 생각은 공기 중의 수증기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과거의 기억들은 습기로 인해 번져 흐릿해지고, 미래는 안갯속에 가려진다. 오직 현재만이, 이 투명한 괴물의 포옹 속에서 무겁게 호흡한다. 사람들은 움직이는 수증기 덩어리로 변한다. 땀은 개인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강물이다. 이마의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것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 습기라는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개체가 스스로를 잃어가는 은유다. 우리는 모두 이 투명한 바닷속을 헤엄치는 미생물들이다.


그러나 이 투명한 괴물은 파괴자이자 창조자다. 무성한 녹음은 그 숨결로 살아 움직인다. 잎사귀 끝에 맺힌 이슬은 지구의 맥박이자, 숨겨진 우주의 눈물이다. 비가 오기 직전의 그 무겁고도 촉촉한 긴장감, 공기 중에 떠도는 흙내음과 식물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이 습기 없인 불가능한 감각의 향연이다. 고온다습은 생명의 원초적인 발효조다. 썩어가는 것과 새로 태어나는 것의 경계가 무너지는 곳, 씨앗은 젖은 어둠 속에서 터를 터뜨리고, 버섯은 하룻밤 사이에 신비로운 우산을 펼친다. 그것은 썩음과 부패의 냄새가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명의 강렬한 향기다.


이 잔인하고도 관대한 계절 속에서, 우리는 습기의 미학을 배운다. 완벽한 건조함이 아닌, 젖음과 마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리듬을. 투명한 괴물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피부로 세계를 감지하게 한다. 땀 한 방울의 무게, 바람 한 줄기의 소중함, 그늘이 주는 고마운 위로를. 고온다습은 자연이 건네는 거친 포옹이다. 숨 막힐 듯하지만, 그 포옹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음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피부 깊숙이, 뼛 속까지 느끼게 된다. 결국 습기는 생명 그 자체의 무겁고도 축복받은 질감인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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