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미루기의 의식
마감은 창밖을 스치는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 그림자는 실체를 얻어, 벽을 타고 기어오르고, 책상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에 쥔 작은 유리창 - 스마트폰 - 속에서 유희하는 빛의 파편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한 번만’, ‘조금만’이라는 마법의 주문은 내 혀끝에서 녹아내려 뇌리를 스쳤고, 그때마다 책임이라는 무게는 증발했다. 증발하는 대신, 내 장기의 틈새에 침전물처럼 쌓여 갔다.
내 방은 시간이 정지한 박제실 같았다. 공기는 진하게 엉겨, 숨을 쉬는 것이 수은을 들이마시는 듯 무겁고 독했다. 책상 위 흩어진 종이들은 버려진 시체들처럼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 위에 쓰여야 할 글자들은, 아직 잉크도 묻지 않은 채, 공허한 구멍으로 내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눈을 뜨고 나를 응시했고, 그 검은 표면에는 내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그 얼굴은 피로와 공포, 그리고 뿌리 깊은 무기력으로 뒤틀려 있었다. 나는 그 비틀린 자아를 마주하며, 입가에 쓰디쓴 웃음을 걸었다. 이 웃음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저주였다.
과거의 실패들, 미완의 흔적들이 유령처럼 방안을 떠다녔다. 그들은 소리 없이 입을 벌려, 내가 저지른 똑같은 잘못의 연대기를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내 이마에 식은땀을 맺게 했고, 가슴속에 서늘한 공허를 파고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토록 명백한 절벽 앞에서도, 발을 내딛는 대신 뒤로 물러서서, 눈을 감고 현실을 지워버리는 어리석은 의식을 반복하는가? 이 의식의 제단에는 ‘지금 당장’이라는 제물이 바쳐지고, 그 대가로 ‘곧’, ‘이따가’라는 신기루 같은 약속이 내려졌다. 그 약속은 항상 거짓이었다.
그때였다. 책상 위 잉크 젖지 않은 종이 더미 사이로, 작고 검은 물고기가 헤엄쳐 나왔다. 비늘은 시간의 먼지로 빛을 잃었고, 눈은 완전한 암흑, 무(無) 그 자체였다.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내 두개골 속에서 직접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녹슨 칼날로 내 의식을 할퀴는 듯했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보고 있느냐?”
물고기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내 뇌수에 직접 스며들었다.
“이 방의 공기는 네가 내뿜은 게으름의 호흡으로 가득하다. 이 침묵은 네가 쌓아 올린 미완의 탑이 무너지는 소리다. 어찌하여 네 발은 무거운 납덩이인데도, 네 의지는 먼지보다 가볍냐?”
나는 입을 열려했으나, 혀가 마비되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넌 네 자신을 속이는 대가로 시간이라는 희생을 바치는 사제다. ‘곧’이라는 허상에 제단을 세우고, ‘지금’이라는 생생한 심장을 그 위에 찢어놓는 자. 그 피의 향연이 끝나면 남는 건 무엇이겠느냐? 썩어가는 흔적과, 네가 피하려 했던 고통의 백 배나 무거운 결과뿐이다.”
검은 물고기는 공중에 떠서 나를 선회했다. 그 꼬리가 스치는 곳마다 공기가 얼어붙고,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쫓아내려 했지만, 손가락은 허공을 헤집을 뿐, 실체 없는 공포만이 스쳤다.
“네 불안은 올바르다. 그것은 네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생명의 신호다. 그 신호를 무시하고, 이 유리창 속 가짜 빛에 도피하느냐? 그 빛은 네 영혼을 태워 재로 만들 뿐, 따뜻함은 주지 않는다.”물고기의 검은 눈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안에는 내가 마감을 놓쳤을 때의 모습이 비쳤다. 창백해진 얼굴, 떨리는 손, 상대방의 눈에 비친 실망과 경멸, 그리고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치욕과 자괴감의 검은 칼날. 그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지만, 그 고통은 이미 현실처럼 날 에였다.
“그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네가 지금 피하면 피할수록, 그것은 썩어가며 더 커질 뿐이다. 네가 지금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그 좌절, 그 실망, 그 자책감… 그것들이 모여 네 미래를 짓누를 산이 될 것이다. 그 산은 네가 숨 쉬는 공기마다 무겁고, 네가 보는 빛마다 어둡게 만들리라.”
갑자기 방 안의 시간이 왜곡되었다. 책상 위 커피 잔에 담긴 액체가 역류하며 증발하고,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광란으로 빙빙 돌았다. 그리고 그 왜곡의 중심에서, 미래의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은 깊게 패인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어깨는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려 처져 있었다. 그 미래의 나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가 내뿜는 절망의 기운이 공기를 찌르는 독가스처럼 퍼져나갔다. 그가 손가락으로 현재의 나, 스마트폰에 매달린 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난과 경멸이 응축되어 있었다. ‘네가… 너 때문에…’라는 무성의 절규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 순간,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만들어낼 추한 미래가 선명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검은 물고기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냉소가 섞여 있었다.
“이제 깨달았느냐? 네가 피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네가 죽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네 자신의 가능성, 네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네가 존재한다는 그 존엄성 그 자체다. 이 침묵의 방에서, 네가 스스로 굶주리며 죽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네 영혼의 일부다.”
물고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 있던 미완의 문서는 순간 재로 변해 사라졌다 “깨어나라, 잠든 자여. 발 없는 시간이 네 발목을 잡기 전에. 네 내면의 검은 물고기가 너를 완전히 삼키기 전에. 이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네게 남은 마지막 선물이다. 그것을 버리느냐, 칼로 갈아 네 길을 내느냐… 선택은, 오로지 너에게 달려 있다.”
말을 마친 검은 물고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환영처럼. 그러나 그가 있던 자리에는 쇳내 나는 공포와, 날카로운 자각의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 창밖에는 새벽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푸른빛이 스며드는 창문은, 다가올 낮의 냉혹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였다. 마감의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내 그림자다. 나와 함께 호흡하고, 내 걸음마다 따라다니며, 내가 숨 쉴 때마다 목구멍을 조여 오는, 살아있는 어둠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손에 쥔 유리창 속 가짜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