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글의 모든 것은 그가 만들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그림자가 만들어냈다. 나는 해 질 녘에 길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처럼, 그의 거대한 문학적 육체에서 비롯된 기나긴 흔적에 불과했다. 독자들은 '나'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 『침묵의 관현악단』이 울리는 장엄한 심포니에 열광했지만, 그 소리는 모두 그의 펜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나는 단지 악보를 뒤적이며 그 소리가 맞는지 확인하는 조용한 검열자였을 뿐.
그의 이름은 한유진. 세기의 문호이자, 나의 스승이며, 내 존재의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살며 글을 쓰는 내가 '그림자 작가'가 아닌 '빛의 해석자'라고 부르며, 내가 그의 원고에 가하는 붉은 글씨의 주석을 '가장 정교한 비판이자 최고의 찬사'라고 말했다. 그것이 위안이었을까? 아니, 그것은 나를 그의 예술에 영원히 묶어두는 가장 세련된 족쇄였다.
2.
그가 쓰던 원고의 여백은 내 전장(戰場)이었다. "이 대목, 등장인물의 동기가 빈약합니다."라고 내가 적으면, 그는 미소 지으며 "동기는 호흡과 같아서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깊다."라고 답했다. "이 비유는 너무 진부해요."라고 내가 지적하면, 그는 눈을 감고 "진부함은 고전의 씨앗이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모든 말은 완성된 문장처럼 흘러나왔고, 나의 모든 의심은 그 문장 앞에서 조각난 유리조각이 되었다.
나는 그의 서재, 그 광활한 서고(書庫)의 중심에서 자신을 점점 작게 느꼈다. 책장 사이를 채운 먼지 입자들처럼, 나는 그의 지식이라는 태양 빛에 휩쓸려 흩어지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문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때 유려하던 문장이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고, 날카로운 통찰은 의미 불명의 수사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피로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천재의 일시적인 침체. 하지만 그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갔다.
3.
반전은 가장 평범한 화요일 오후에 찾아왔다. 그는 새 소설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쓰고 있었다. 주인공이 평생의 적과 마주쳐 모든 진실을 폭로하는 장면. 하지만 그의 펜은 맥없이 멈춰 섰고, 원고지 위에는 '너는, 사실...'이라는 문장만이 고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내가 알던 날카로운 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찾아 헤매는 방황자의 눈빛이었다.
"마저 써 줘."
그의 목소리는 한낱 속삭임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 이 결말은 오로지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니야." 그는 부드럽고, 그러나 결코 흔들림 없는 단호함으로 말했다. "너는 알고 있을 거야. 네가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서재의 공기가 바뀌었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들의 글자들이 스치며 내리는 소리가, 이제는 고요한 기억 속의 빗소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4.
그가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낡은 가죽 표면은 그의 손때로 윤이 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七년 전, 그의 문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 쓰기 시작한 수기(手記)였다. 나는 그가 내 사적인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걸... 왜?"
"이게 진짜 원고야, 현석아." 그의 미소는 이제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내가 '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모든 작품은, 사실 네가 이 노트에 적어 내린 생각들, 이미지, 문장들의 조각에서 시작된 거야. 나는 단지... 그것을 다듬고 확장했을 뿐이지."
세상이 붕괴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고요했다. 그것은 유리병이 카펫 위에 조용히 떨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파편은 생겼지만, 굉음은 없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보조작가입니다."
"보조작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넌 언제나 메인작가였어. 나는 네가 그걸 깨닫지 못하게, 네 빛이 너무 빨리 드러나지 않게, 그림자로 만들어 온 거다. 나의 마지막 업무는 너에게서 빌린 이 모든 문장들을 지키는 것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구나."
5.
그는 점점 쇠약해지는 기억력과 싸워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알츠하이머. 그의 정신이라는 서고(書庫)에서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오직 한 가지는 붙잡고 있었다. 내 글, 내 생각, 내가 그 노트에 적어낸 문장들. 그것들은 그의 기억의 바다에서 유일하게 떠오르는 등대처럼 남아 있었다.
"너의 문장들이 나를 지탱해 줬어. 내가 사라져도, 네 글은 살아남을 거야."
나는 그동안의 인생 전체가, 한 편의 거대한 페이크로 재구성되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했다. 나는 그를 흉내 내려고 안간힘을 쓴 모방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지우고 내 목소리를 대신 울리게 했던 스피커였던 것이다. 내가 그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그 긴 세월, 사실 그는 내 빛을 가리기 위해 세워진 커다란 장막이었다.
6.
그러나 진정한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고백 이후, 나는 그 오래된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노트의 필체는 분명 내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 상상력의 폭발, 문장의 리듬... 그것들은 점점 더 '한유진'의 작품 세계와 유사해져 있었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내 젊은 날의 날카로움이 느껴졌지만,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그의 영향으로 인한 성숙함이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뒤집혔다.
우리는 서로를 모방하고, 흡수하고, 변형시켜 왔다. 나는 그의 그림자에서 시작했지만, 그는 결국 내 안에서 재창조되었다. 그리고 그는 쇠퇴하는 기억력 속에서도 오직 '나'에 해당하는 글자들만을 붙잡은 채,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까지 나라는 작가를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는 나를 위해, 그리고 나를 통해서만, 마지막 걸작을 쓰고 있었다. 그 작품의 제목은 『그림자 문장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나, 그리고 우리 둘이었다.
7.
이제 나는 빛이다. 하지만 그 빛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마지막으로 밝힌 등불 위에 겹쳐진, 내 본래의 빛이다. 나는 이제 혼자 책상을 마주하고 있지만, 원고지 위에 내려앉은 그의 그림자를 여전히 본다. 나는 펜을 든다. 그것은 이제 내 손에 쥐어진, 우리 둘의 유일한 목소리이다.
"선생님, 이제 제가 마저 쓸게요."
그리고 첫 문장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그의 문장이기도, 내 문장이기도, 우리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호흡이 된다.
“모든 글쓰기는, in the final analysis, 가장 정교한 형태의 사랑이자 배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