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땅거미는 다른 도시와 달리 특이한 무게를 지닌다. 노을이 한강을 적시면 강물에 비친 빌딩 숲이 황금빛으로 부서지듯 흩어지고, 그 파편 하나마다 눈부신 성공의 신화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빛이 사그라들 때마다 어둠 속에서 스민 한숨의 밀도가 점차 짙어진다. 통계라는 잔인한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이 도시의 그림자 너머에 20년 넘게 변치 않는 숫자 하나가 서 있다. 대한민국, 자살률 세계 1위. 이 땅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차갑게 식어가는 소리가 통계표의 그래프를 타고 흐른다.
봄이 오면 진달래가 혈액을 토해내듯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이 나라에서, 꽃잎보다 가벼운 생명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울까. 산업화의 기적이 남긴 그늘에서 할아버지들은 텅 빈 시골 마을에서 홀로 저녁 국수를 삶고, 회사원들은 지하철 시간표보다 빠르게 흐르는 인생의 역주행 표를 찾아 헤맨다. 386세대의 자식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부모의 눈물을 삼킨 채 학원가 계단에서 수학의 정석 대신 삶의 정석을 풀지 못해 노트를 찢는다. 디지털 문명의 최전선에서 SNS 별자리가 밝게 반짝이지만, 그 빛 사이로 미처 닿지 못하는 외로움들이 추락 실종 번호표를 나눠 갖는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가 이 땅에서는 '세계속경쟁'으로 뒤틀린 지 오래다.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희망의 연기가 재벌 체제의 강철 틀로 빚어지더니, 이제는 개인의 꿈을 가둔 금융 자본주의의 유리장 속에서 사막화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는 IMF라는 약칭으로 봉합되었지만, 정신의 파산관리절차는 아직도 법원 밖에서 방치된 채 부채의 이자를 불려 간다.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된 자리에 '1인 가구'라는 새 용어가 자리 잡았지만, 그 단어 속에는 고독사 예비군의 군번이 숨죽이고 있다.
그러나 이 암울한 지도에 백지 부분이 아직 남아 있음을 우리는 안다. 전북 부안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들이 텃밭의 고추를 딸 때마다 이웃 문턱에 놓아두는 빨간 봉투가 있고, 대전의 한 카페에서는 미처 청년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바리스타가 직접 찾아가는 '고독사 방지 커피'가 서서히 식어간다. 정부의 생명지킴이 사업이 관료주의의 미로에서 길을 잃을 때면, 광화문 광장의 한 벤치에 앉은 청년이 모르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손짓이 정책보다 먼저 도착한다.
인간의 목숨이 경제성장률 그래프의 각주로 전락한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속철도가 3시간을 1시간으로 단축하는 동안 상대의 아픔을 읽는 데 3초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민감함을, 스마트폰이 천 개의 얼굴을 저장하는 그 기술력으로 이웃의 눈동자에 서린 한 줄기 슬픔을 저장할 용기를 말이다. 통계청 자료에 등장하는 '자살률 1위'라는 숫자를 국가적 수치가 아닌 5천만 개의 개별적 서사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무거운 왕관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저녁노을이 한 번 더 강을 건너면, 오늘도 누군가의 창문에 마지막 빛이 스민다. 그 빛을 잡아둘 그물은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친 이의 미소일 테다. 눈부신 한강의 야경이 다시 켜지기 전,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띄우는 작은 등불들이 모여 새로운 별자리를 이루길. 생명이 통계의 숫자가 아니라 숨 쉬는 시(詩)가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