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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뇌오리 Nov 05. 2022

#001

죽음은 예고도 하지 않고 와서는 기다려지도 않고 데려간다.

"""

  해야할 것들로 꽉 차버려 

  얕은 우울감에도 빠지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우울이 말랐습니다.

  삶이 건조해져 갑니다. 


  살아온 만큼 쓸 겁니다. 

  아무리 써내려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곳에서 우울하려 합니다. 

  우울에 번져버린 이 유서로 제 삶을 채우려 합니다.

  쓴 만큼 다시 살아내겠습니다.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죽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유서는 죽음보다 먼저이니, 오늘도 죽어갈 나를 위해 씁니다.

"""



  주마등을 본 적이 있는가. 죽음에 때가 어딨겠냐만은, 죽기엔 너무 이르지만 돌발행동으로 죽음이 도래했을 때, 갖은 후회가 가득해지면서 모든 신을 부르는 순간, 그때 마주한게 주마등이었을까. 나는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때 보이스카우트로 2박3일 캠프를 갔고, 계곡이 있었다. 두 개의 큰 돌 사이에 좁은 틈이 있었다. 수심은 깊어보였지만 유속이 빨라보이니, 수영을 못하는 내가 저리로 지나가더라도 내 숨이 다 하기 전에 지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나쳐야 할 구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당황을 했고, 숨이 다했다. 생이 짧았어도 그 모든 과거를 되짚어가며 하고 싶은 말을 기도하듯 되뇌이는데, 어찌나 할 말이 많던지. 죽음은 그 말을 다 하라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예고 없고 다가온 죽음 앞에서, 지나간 모든 순간에게 이별을 고하는 나였기에, 나는 오늘도 유서를 쓴다. 나의 죽음 앞에서는 주마등이 없길 바란다.  



"""

  죽진 않았지만, 조문은 부탁드립니다. 

  조의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편지로 대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글자 수만큼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저 다 채우지 못한 여백만큼 응원하겠습니다.


  유서는 썼지만 죽고싶진 않습니다. 

  오늘도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사랑합니다.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남아 내일도 다시 장엄하지 않은 유서를 보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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