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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뇌오리 Nov 06. 2022

#002

부디 너는 나의 그때처럼 끔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해야할 것들로 꽉 차버려 

  얕은 우울감에도 빠지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우울이 말랐습니다.

  삶이 건조해져 갑니다. 


  살아온 만큼 쓸 겁니다. 

  아무리 써내려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곳에서 우울하려 합니다. 

  우울에 번져버린 이 유서로 제 삶을 채우려 합니다.

  쓴 만큼 다시 살아내겠습니다.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죽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유서는 죽음보다 먼저이니, 오늘도 죽어갈 나를 위해 씁니다.

"""



   나는 상대방이 무언가를 마음 속 깊이 숨겨놨다는 생각이 들면, 그걸 살살 긁어내는 악취미가 있다. 취조하듯이 묻기보다는, 넓은 포획망으로써 어떤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해도 안해도 좋다. 그 다음 내가 할 일은 내가 가진 이야기를 적당히 변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픔과 슬픔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울음을 참기를 교육받았고, 그렇게 자랐던 나는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다고. 변비 같았다고. 울음이 터지려고 하지만 막상 터지지 못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아냐고. 그렇게 나는 수년을 절규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작 울음 한 번 터뜨리자고 그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고. 너는 그 끔찍한 수렁에 빠지지 말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 토해내라는 게 아니라, 너무 꽁꽁 싸매지 말고 혼자서라도 울분을 터뜨려라고. 말하면서 생각했다, 부디 나보다 끔직한 상황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 죽거든 이 유서를 보내겠다. 그건 아마도 초대장일테다. 서로가 누군지 모르지만 다 같이 부등켜 안고 울어라고 판을 까는 초대장. 나로 인해 시작된 울음일지라도, 어느 순간 왜 우는지도 모르게 펑펑 울 수 있게. 나의 죽음이 마중물이 되어서라도 부디 너는 나의 그때처럼 끔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죽진 않았지만, 조문은 부탁드립니다. 

  조의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편지로 대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글자 수만큼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저 다 채우지 못한 여백만큼 응원하겠습니다.


  유서는 썼지만 죽고싶진 않습니다. 

  오늘도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사랑합니다.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남아 내일도 다시 장엄하지 않은 유서를 보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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