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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니 병

아는 척 보다는 묻는 게 낫다.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몇 해전의 일이지만, 늦은 시간에 친구 녀석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거하게 취했다는 게 느껴지는 목소리지만, 화도 잔뜩 나 있었다.



'아니 누가 우리 oo이 빡치게 만들었냐?'

'안 있냐.. 지금 부산에 와서 미팅 끝나고 소주 한잔 하는 중인데..'

'근데, 설마 소주가 맛이 없냐?'

'아니. 그건 아니고.. 백운산이 광양에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부산 가서 백운산은 왜 찾냐?'

'아니.. 야들이.. 백운산이 부산에 있다고 자꾸 그러네...'

'앵? 진짜로?'

'어.. 미쳐분다. 광양에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자꾸 기장에 있는 산이라고 허네.'

'봉화산처럼 백운산 지명이 흔한 게 아닐까나?'

'어... 어... 그런가?'

'잠깐만 있어봐라. '


그랬다. 백운산은 전국에 많았다. 충청도에도 있고 경기도에도 백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었다. 어떤 모양을 하고 높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운산은 전국에 있는 '흔한' 산이었다.



친구는 전국 TOP 수준이 제약영업사원이다. 제약연구원이나 약사가 아니니 약의 효능, 작용기전 등에 대해서는 앎이 깊지 않을 수 있지만, 최소한 영업 노하우와 지식은 최상위 수준이라는 거다. 그런데, 술자리에 모여 앉은 제약회사 직원들 사이에 갑작스레 산이 끼어들었고, 서로의 말이 맞다며 우기는 장면이 연출된 셈이다. 서로를 무식쟁이라고 힐난하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고 한다.



주변에 박학다식한 사람이 꽤 있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묻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즐겁고 배울 것도 많다. 스스로 즐기는 일이니 행복한 일이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알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소위 '안다니 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그리고 이 부담감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모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으니 질문을 하는 데 인색해지고 상대 이야기에 적극적인 관심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는 척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라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런 생각에 갇혀 있으면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내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믿는 꽉 막힌 사람이 되어 버린다.



진짜 안다니병을 안고 살아야 할까? 내가 일하는 분야조차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십 수년을 한 우물만 파도 묻고 찾고 공부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쏟아진다. 하물며, 내 전공이거나 직업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분야가 아니라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그 대화에 적절한 용어와 내용으로 호응하며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 결국에는 그 사람을 피하게 된다. 불편하고 어려우니까.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와 내용이 나오면 단순하고 간단하게 '그게 뭐냐?'라고 물으면 된다. 모르면 어떤가? 모르니 신기하고 배울 수 있다. 아니면 들어보니 도통 나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면, 다른 이야기하면 된다. 눈치 없이 제 잘난 맛에, 자기 이야기만 하는 놈은 자주 만날 사람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이니 적절히 걸러지게 된다.



묻자.

백운산이 또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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