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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출장길의 재미와 퇴근길의 친구

막걸리의 역사나 전통, 제조법에 대해서 글을 쓸만한 지식이나 정보는 전혀 없다. 그렇다고 각 지역의 유명 막걸리를 두루 섭렵할 정도의 열정이나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 막걸리가 좋아졌을 뿐이다. 통장군(씨름이 끝나면 막거리를 말통으로 드셨다고 해서 생겼다는 전설)이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할아버지는 가까운 곳으로 시집 장가 간 아들과 딸 집을 순회하시면서 손주들이 주전자에 사 온 막걸리를 즐기셨다. 아침을 자시고 나선 순방은 거하게 취하신 해걸음 귀가로 마무리되었고, 그 덕에 손주들은 동네 구판장으로 막걸리 사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향 마을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도개집(양조장의 전라도 사투리. 주로 막걸리를 제조하여 공급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마다 각 마을로 막걸리 배달이 왔고 그 술을 주전자를 들고 사 왔던 셈이다. 다들 주전자를 들고 오면서 한 모금씩 마셨다거나 취해서 비틀거렸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마셔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텁텁하고 시큼한 별 맛없는 이상한 액체로 각인되어 있었다.



술을 짊어지고는 갈 수 없어도 마시고는 갈 수 있다고 자신했던 스무 살에도 막걸리는 영 내입에 맞지 않았다. 게임에 져서 벌주로 동동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누군가가 사주는 막걸리가 아니고서는 내 돈내서 막걸리를 사 마시지도 않았다. 명절에 셋째 매형과 하동 악양 어느 도가로 술을 사러 가면서 '굳이 왜 이런 정성을?'이란 생각을 했던 걸 보면 한참 나이가 들어서까지 막걸리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였다. 딱히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막걸리를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시큼하고 털털하기만 한 것이 어느 순간 '독특한 맛'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막걸리를 마셔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막걸리에 처음 관심을 가질 때만 해도 대형마트에 막걸리 종류를 별 볼 게 없었다. 지금이야 막걸리 진열장이 따로 있을 만큼 종류가 엄청 많지만, 그래도 빨간딱지가 있는 녀석과 파란 딱지로 막은 막걸리 맛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동네 마트 시판용 막걸리에 대한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서는 '다른 녀석은 없나?'로 관심이 커졌고 출장을 갈 때면 그곳의 특색 있는 막걸리와 지역의 특색 있는 전통주를 찾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해창 막걸리와 서산의 국화주가 시작이었다. 해창 막걸리는 이제는 대형마트와 택배가 되니 생각나면 적절한 가격의 녀석을 마신다.



다양한 증류주가 있는 것처럼 막걸리도 각 지역의 강자들이 있는 셈이다. 출장이 많던 시절에 그 재미를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여수 개도 막걸리와 낭도의 젖샘 막걸리를 사러 가기도 하고 최근에는 의령에 갔다 '궁류' 막걸리에 반해 종류별로 사 오기도 했다. 시음의 유혹에 빠져 하루 자고 가겠다는 각오를 할 뻔도 했지만, 트렁크에 실려 있는 망개떡 배달 걱정에 허벅지를 꼬집고 잘 넘겼다. 막걸리도 특색 있고 이쁜 병에 담긴 것들은 만원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부담된다. 하지만, 천 원 후반부터 2~3천 원 사이이 맛난 막걸리가 많다. 최근에는 배상면 주가에서 나온 느린 막걸리 세트에 꽂혔다. 개인적으로 파란색 병이 제일 맘에 든다. 톡 쏘는 것이 알싸히니 맛나다. 아스파탐이 없다는 것을 광고하는 막걸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스파탐은 개인적으로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어서 별로인데, 우리 집 어부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건 그냥 많이 마셔서 그런단다.



막걸리 한 병이면 딱 좋다.

그리고 이 병과 저 병이 맛이 다르니 좋다.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고급진 맛이 없다고? 내 입맛에 맞으면 그게 고집진 것다. 고집지고 비싼 것도 생각없이 많이 먹으면 모두가 동등하게 'Dog'가 되도록 신께서 알콜에 능력을 부여하셨으니 괜시리 술을 '차별'할 필요 없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면 어마무시하게 비싼 해창 막걸리를 마셔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2~3천원의 행복에 만족스럽다. 오늘은 저 흙색 라벨이 붙은 녀석을 한번 마셔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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